– 끝까지 가야 보이는 길
요즘 사랑하는 딸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 부부도 함께 마음이 무겁습니다.
간호사를 꿈꾸며 누구보다 부지런히 살아가던 딸.
3학년이 되어 실습과 학업을 병행하느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지친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걸 보며 안쓰러운 마음이 컸습니다.
어제는 마침내, 그동안 혼자 끌어안고 있던 마음을 딸이 조심스레 꺼내놓았습니다. 그 고백 앞에서 어떤 위로의 말도 선뜻 건넬 수 없었습니다.
아내는 딸의 마음을 단번에 읽었습니다.
“힘들면 내려놔도 돼. 진로는 다시 생각해 볼 수도 있는 거야.” 조심스럽게 딸의 마음을 보듬으며 말했지만,
저는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없었습니다.
어렵게 여기까지 왔는데, 끝까지 인내하며 이 길을 마주했으면 하는 바람. 그리고 간호사로 당당히 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는 딸의 모습을 상상하며 희망에 젖어 살았던, 제 욕심을 버리지 못해서였습니다.
딸은 학과에서 뛰어난 학생들 이야기를 했습니다.
적성에도 맞고, 환자의 상태를 이론에 맞춰 정리하고 멋지게 리포트를 해내는 친구들. 그런 학생들과 비교하며, 자신은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잘되지 않는다며 점점 이 길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깊어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으며 여러 복합적인 감정 속에서 딸의 혼란스러운 심정이 느껴졌고,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사실 저도, 부끄럽지만 40대 중반까지도 적성과 진로에 대해 고민하며 살았습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과연 내게 맞는 일일까?”
“이게 정말 내가 태어난 이유일까?”
그런 질문들을 수없이 되뇌며, 마음 한켠이 늘 허전했습니다.
하지만 40대 후반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에게 맞는 일은 애초에 정해진 것이 아니라, 살아가며 간절히 바라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다 보면 굽이굽이 돌아 결국 만나게 된다는 것을요.
그리고 어떤 일이든 적성과 상관없이 그 자리에서 내가 감당할 몫이 있고, 그 속에서 작게나마 즐거움과 보람을 느낄 수 있다는 것도요.
그래서 저는 쉽게 “그만둬도 돼”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인생의 길은 끝까지 가봐야, 그 끝에서 진짜 자신의 길을 발견할 수 있으니까요.
아내와 결혼했을 때, 자녀를 갖는 문제를 두고 많이 고민했었습니다.
잘난 인생도, 부유한 삶도, 세상의 본질은 고통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새 생명의 탄생을 그런 두려움과 조건으로만 판단할 수는 없었습니다.
결혼이라는 사랑의 인연도, 그저 감정의 결과가 아니라 새 생명을 위한 신비로운 하나님의 계획 속에 이루어진 일이라 믿었습니다.
그렇게 세상에 온 아이가,이제 막 인생의 거친 출발선에 섰을 뿐인데 벌써부터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 부모로서 마음이 아픕니다.
강해져야 한다고, 이겨내야 한다고 말하고 싶으면서도 “모든 걸 내려놔도 괜찮아. 내가 널 품어줄게.”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제 자신이 부끄럽고 미안합니다.
다행히 어제는 푹 잠을 자고 실습 병원에 나간 딸.
하지만 예전처럼 밝던 얼굴은 어느새 빛을 잃었습니다.
장난기 많던 아이가 말이 없어졌고, 아내는 그날 밤을 한숨도 자지 못했습니다.
다음번, 딸이 또다시 힘들다고 말한다면 이번에는 이렇게 말해주려 합니다.
“힘들면 잠시 멈춰도 돼. 인생은 그렇게 돌아가도 괜찮아. 늦는다고 아무 일도 안 생겨. 결국 너는 네가 가야 할 길로 가게 되어 있어. 느긋하게, 천천히 살아도 돼.”
그리고 이 상황에서 말은 못 했지만,
속으로 꼭 전하고 싶었던 말이 있습니다.
적성과 진로는 하늘에서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란다. 끝까지 가보기 전엔 아무도 알 수 없어.
꼭 뛰어날 필요도 없어. 어떤 길이든 걷다 보면 수많은 갈림길이 나오고, 그 선택의 반복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나에게 맞는 길'을 만들어가는 거야.
진짜 적성은,
자신을 지켜내며 하루하루 살아내는 그 여정 속에서
조금씩 다듬어지고,
나중에 돌아봤을 때야 비로소 ‘그 길이었구나’ 하고 알게 되는 것인지도 몰라.
그러니 우리 딸,
조금 느려도 괜찮으니 끝까지 걸어보자.
지금 이 순간도 결국 너의 길이 되어줄 테니까.
그리고, 딸아.
정 힘들면 쉬어가렴.
세상은 자꾸만 빨리, 먼저 가라고 재촉하지만
우리는 끝까지 가기만 하면 되는 걸로 하자.
쉬엄쉬엄 가자, 우리 딸.
그렇게 천천히, 너의 속도로 가도 괜찮으니까.
너의 삶은 네가 만들어가는, 너만의 길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