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딱 일 년 살았습니다
‘소형 가전’들을 가져갈지 말지 고민을 됐다. 정수기, 공기청정기, 식기세척기, 건조기, 제습기 등등. ‘신박한 정리’에 출연했던 이지영 정리 전문가는 말했다. “꼭 미니멀이 중요한 건 아닙니다. 맥시멀도 미니멀도 삶의 형태일 뿐 중요한 건 라이프죠.” 그래 중요한 건 라이프다. 내 체력과 건강을 지켜줄 소형 가전들은 ‘회복’에 있어 꼭 필요한 물건들이었다. 결국 모든 짐이 실렸다. 한겨울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고난도의 테트리스 기술을 선보인 남편 덕분이었다.
<자동차에 한가득 실린 일년살이 짐 목록>
소형가전과 화분 2개(아이들이 애지중지 기르고 있던), 캠핑의자 4개, 당장 입을 겨울옷, 전집 네 질, 학용품, 장난감, 레고 박스, 의약품과 영양제들, 그릇과 주방기구, 냄비, 양념과 김치, 남은 식재료들.
나와 아이들은 남편보다 하루 일찍 비행기를 타고 입도 했다. 이름도 생소한 ‘리사무소’에 가서 전입신고부터 했다. “애들아, 우리 이제 진짜 제주도민이야!” 흥분한 마음으로 동네 구경을 나갔다. 햇살이 푸짐하게 쏟아지는 제주는 역시 클라스가 남달랐다. 골목마다 수놓인 알록달록한 벽화는 마음에 생기를 줬다. 개성 넘치는 감성 카페들이 눈을 즐겁게 했다. 키 큰 야자수는 이국적이고 독특한 해변의 분위기를 자아냈다. 무엇보다 형광 물감을 풀어놓은 듯 반짝이는 에메랄드빛 함덕 바다에서 커피를 홀짝이고 있으니, 설렘과 감사함이 가득해서 몸둘 바를 모를 정도였다. 해수욕장의 너른 잔디밭에 앉았다. 바다만큼 파란 하늘빛이 너무나도 황송하여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남편이 탄 차는 고속도로에 주저앉지 않았다. 다행히 온가족은 무사히 입도를 마쳤다. 저녁을 먹고 함덕 해수욕장에 나갔다. 마침 코로나로 중단됐던 ‘플리 마켓’이 한창이었다. 향긋한 생화가 알록달록 수놓인 수제 향초, 개성이 넘치는 신박한 소라 스피커, 눈부시게 화려한 반짝반짝 선캐처(창문을 장식하는 색유리)들. 해변에는 가수 성시경의 나긋나긋한 음색이 소라 스피커를 통해 흘러 다녔다.
“떠나요 둘이서 모든 것 훌훌 버리고 제주도 푸른 밤 그 별 아래”
멋들어진 해변의 풍경과 소리는 잃고 있었던 내 안의 낭만 세포를 슬금슬금 건들어 깨웠다. 촉촉한 바닷가의 감성에 취하고 나니 마음이 한껏 설렜다. 시원한 바다 공기를 쐬며 아이들은 마음껏 달리기 솜씨를 뽐냈다. 신난 아이들의 춤사위를 보며 부부는 정말 오랜만에 마음껏 웃었다.
이삿짐 정리가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역시 단순한 것은 행복을 준다. 덕분에 우리는 이끌리듯 밤바다로 산책을 나갈 수 있었다. 그 날따라 함덕 밤바다는 낮 동안의 광풍이 무색하리만큼 고요했다. 자욱한 안개는 신비스럽기조차 했다. 멀리 수평선 위에 걸치듯이 줄줄이 떠 있는, 고깃배들만 반짝이며 어둠을 밝혀주고 있었다. 남편은 오랫동안 바다를 응시하더니 입을 열었다.
"우리 가족, 제주에서 많이 회복하자!"
"......"
“당신 덕분이에요. 병원 살이 대신 제주 살이”
아내의 도전과 용기를 힘껏 응원하는 따뜻한 그의 손을 오래토록 꼬옥 쥐었다. 앞질러 뛰어가다 이내 돌아온 아이들이 함박 미소를 지으며 우리 품에 폭삭 안겼다.
“정말 정말 신나요. 아빠 엄마도 우리랑 같이 달리기 시합해요. 네?”
네 사람은 “와!”하며 해변가를 신나게 달렸다. 까르륵 웃음소리들이 화음을 이루며 공중에 가득 울려퍼졌다. 이내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고, 심장은 두근거렸다. 인간은 행복을 원할 때에만 행복해진다. ‘진짜’ 행복해지기 위해 우린 제주에 왔다. 그 날 저녁 우리 가족은 얼마 남지 않은 행복의 문턱에서 한없이 설레고 설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