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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하수반짝 Nov 13. 2021

데이트는 꼭 ‘단 둘이서’

제주에서 딱 일 년 살았습니다

빗살이 내리는 신비의 숲, 엄마와 데이트


“엄마, 오늘은 꼭 일찍 데리러 오세요. 우리 데이트하는 날이잖아요.”

“알았어. 그런데 오늘 누나도 같이 데이트하면 안 될까?”

“안 돼요! 데이트는 둘이서만 하는 거잖아요!”


아이 말이 맞았다. 데이트는 단 둘이서만 해야 데이트답다. ‘단 둘이서’는 넉넉한 마음과 부드러운 미소를 장착시켜 주는 마법의 단어다. 아이들은 그 요술을 알기에 둘만의 데이트를 손꼽아 기다렸다.


온종일 학교와 유치원을 견뎌낸 아이들은 매일 엄마의 따뜻한 품과 위로가 그립다. 하지만 독박육아의 버거움 때문에 아이들의 맘을 매만질 차분한 틈은 자주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현실적인 대안으로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씩은 평일 두 시간의 짬을 내서 각각 ‘둘만의 데이트’를 하기로 했다.


고맙게도 제주에서는 데이트 장소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다. 지천에 데이트 장소가 널려있다. ‘걸어가는 늑대들(전이수 미술관)’, ‘김택화 미술관’, ‘북촌 돌하르방갤러리’는 차로 5분도 걸리지 않았다. 9살 딸과는 주로 미술관과 서점에서 데이트를 즐겼다. 연인들처럼 쌉싸름하고 달콤한 눈빛이 오고갔다. 그림을 보면서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넘나들었다.


중고 서점인 ‘구들 책방’에서는 노란 조명의 따뜻한 구들 바닥에 책을 펼쳐 놓고 나란히 앉아서, 은은한 미소를 주고받았다. 갤러리와 서점 카페인 조천 ‘시인의 집’에서는 향긋한 수제차를 홀짝이며, 앞바다의 쉬어가는 새들을 조용히 바라봤다.

딸과 달콤한 갤러리 데이트


새들이 쉬어가는 조천 시인의 집


하지만 6살 아들과의 데이트는 더 다이나믹해야 한다. 정적인 미술관이나 서점보다는, 이색 카페를 가거나 숲길과 바닷길을 걷는 편이 차라리 낫다. ‘망고’를 유난히 좋아하는 온유는 카페에서 망고 메뉴를 사 주면 만고땡이었다. 함덕 ‘카페 바나나’에서는 바나나보다 ‘망고 빙수’를 주문했고, 시내로 데이트를 나가면 꼭 공차의 ‘망고 요구르트’를 주문했다. 아들은 달짝지근하고 보드라운 망고 과육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데이트를 즐겼다.


서우봉도 자주 올라갔다. 시간이 넉넉할 땐 올레길을 따라 북촌 마을로 건너가기도 했다. 촉박할 땐, 함덕 해수욕장의 바람이라도 함께 느끼며 걸었다. 바닷길에서는 어느 배가 가장 큰 지에 대해, 찻길에서는 어떤 차의 바퀴가 가장 크고, 개수가 많은지에 대한 질문을 끝없이 했다.


딸과 달리 아들은 데이트 시간을 자주 자연 관찰과 채집 시간으로 착각하곤 했다 “온유야 요즘 엄마한테 하고 싶은 말 있어?”라고 물으면, “엄마! 저 갯강구 잡고 올게요!”라고 말하며, 이내 온 몸을 갯강구가 드글거리는 바위 사이로 던졌다.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텁썩텁썩 맨손으로 갯강구를 열심히도 사냥했다. 느림보 갯강구가 한 마리가 걸려들고 말았다. “엄마, 드디어 잡았어요!”하며 환희에 찬 목소리로, 그 시커멓고 번들거리는 바퀴벌레 사촌을 눈 앞에 갖다 놓았다. “아악!” 나의 비명 소리에 아들은 이렇게 말했다. “엄마는 갯강구가 싫어요? 나는 귀여운데......”


숲길도 자주 걸었다. 아들은 나뭇가지를 늘 애정했다. 길다란 나뭇가지가 보이면 그것을 들고선 먼저 키재기부터 했다. 자신의 키와 비슷한 그것은 아들의 숲속 절친이 됐다. 지팡이로 쓰다가 호신용 막대기로 변하기도 했다. “엄마 뱀 나오면, 제가 쫓아줄게요. 저는 뱀 하나도 안 무서워요.” 자신의 불타오르는 의지를 어찌할 수 없어 괜한 나무와 칼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역시 ‘XX’와 ‘XY’는 확연히 다른 존재였다.


그래도 가끔씩 데이트의 성과를 거둘 때가 있기도 했다. 초여름 오후의 햇빛을 피해 아들과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동백동산으로 피신했다. 동백동산 서문 입구에 주차를 하면 평평하고 넓은 숲길이 나온다. 무성한 나무 덕에 숲길은 꽤 어둡다. 둘은 손을 꼭 잡고서 용감하게 숲속으로 걸어갔다.


숲속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원시림의 피톤치드를 온 몸으로 느끼느라 잠시 멈춰 서 있었고, 아들은 여러 나뭇가지 중 마땅한 놈을 고르느라고 종종 구부려 앉았다. 따로 또는 함께 숲길을 걷다보니, 나무 그늘 사이로 빛살 여러 가닥이 차르르 들이치는 신비한 풍경이 나왔다. 그 묘한 아름다움에 홀려 둘은 걸음을 또 멈췄다. 휘파람 새의 청아한 울음 소리도 들렸다. “훠~~~~리리릭” 얼마나 곱던지 심장도 벌렁거렸다. 이내 꾀꼬리들도 야단스럽게 울어댔다. 34가지의 울음소리를 내는 꾀고리 울음소리는 뭐라 흉내내는 말조차 찾기도 어렵다. 이 타이밍을 놓칠 새라 온유에게 물었다.


“온유야, 새들이 뭐라고 말하는 것 같아?”

“음....‘나 요리하고 있으니깐 말시키지 마.’라고 말하는 것 같아.”

“헉, 엊그제 저녁에 엄마가 했던 말에 속상했구나. 엄마가 더 예쁘게 말할 걸. 미안해. 그래서 이렇게 데이트 왔잖아”

아이가 마음을 표현한 이 기회를 놓칠 새라 진도를 좀 더 나갔다.

“요즘 저녁마다 야단을 맞아서, 온유도 힘들지? 많이 힘들어? 조금 힘들어?”

“음....많이 힘들어.”

“많이 힘들었구나. 엄마가 감기로 아파서 요즘 더 예민했었나봐. 기다려주지 못하고, 화를 내서 정말 미안해.”

“엄마, 저녁에 우리한테 화를 안 낼 수는 없어요? 음, 내가 엄마랑 누나 말을 잘 들으면 좋은데 저도 그렇게 하기가 너무 힘들어요. 내 마음대로 잘 안 돼요.”

“괜찮아. 우리 온유 노력하고 있잖아. 엄마가 많이 고마워. 힘들어도 절대 노력하기를 멈추지는 말기! 엄마도 너희들을 더 오래 참고 사랑할 수 있도록 노력할게.”


우리는 모두 한계를 지닌 존재다. 현실은 절대 녹록하지 않다. 상황이 힘들거나 몸과 마음이 지치고 화가 나면, 종종 이성을 잃고 어두운 감정의 지배를 받는다. 그 땐 과도한 아픈 말이 툭툭 튀어나온다. 말하기 전, 6초의 심호흡도 중요하지만, 이미 말들이 튀어나간 후에는 빠른 뒤처리를 해야 한다.


먼저, 여유를 갖고 속상한 마음을 솔직하게 나눠야 한다. 세상에 나쁜 감정이란 없다. 미움도 슬픔도 두려움도 불안도 모두 우리에게 필요한 감정이니까. 동서양의 심리학을 통합한 심리치료사인 타라 베닛 골먼은 이렇게 말했다. “고통스러운 감정을 느낄 때 그것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라. 억누르지 말고 몇 분 동안 그 감정을 그대로 느껴보자. 감정이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하면, 고통은 저절로 사라질 수 있다.” 즉 미운 말과 서운한 감정이 상처가 되어 맘속에 박히기 전에, 얼른 말로 표현하고 충분히 공감해줘야 한다. 그러면 부정적인 감정이 자연스레 흘러간다.


그 다음, 서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진심어린 사과를 나눈다. 각자 노력할 부분도 함께 찾아본다. 이렇게 아이의 감정을 읽고, 공감하고, 행동의 한계와 방향을 찾아보는 것이 감정읽기라고 책에서 배웠었다. 나에게 있어 데이트의 목적은 아이의 감정을 읽는 데에 있다. 나와 아이가 둘만의 시간과 감정을 공유하면서, ‘나는 너를 언제나 믿고, 사랑해.’, ‘너는 정말 소중한 존재야.’라는 진심이 아이에게 전달되기를 바랐다.


아참, 중요한 게 또 있다. 바로 핸드메이드 ‘망고 라떼’. 데이트에서 선물은 무척 중요한 역할을 한다. 행복 호르몬인 세로토닌을 왕창 분비시키니까. 사랑받은 아이는 행복하고 행복한 아이는 기쁘게 순종을 한다. 예를 들면 이렇게 말이다. “온유야, 밥 차리자. 식탁 위에 장난감 좀 치워줄래?” 단 한 번, 말했을 뿐인데도, 대답은 기적처럼 즉각 온다. “네~~~엄마.”


데이트의 힘, 뇌물 아니 선물의 힘은 실로 놀랍다.

나의 사랑 망고 음료, 함덕 카페 바나나
뱀아, 물러가라! 나는야 이순신 장군
막대기는 언제 어디서나 내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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