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제주 일 년살이
제주에는 올레길이, 지리산엔 둘레길이 있다. 헌데 기막히게 아름다운 둘레길이 제주에 또 있다. 그것은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한라산 둘레길°이다. 울창한 숲길 사이에 쏟아지는 햇살과 나무 그늘을 시원하게 울리는 청아한 새소리, 초원에서 말들이 풀을 뜯는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지는 신비의 숲길이다. 하지만 주의할 점이 있다. 한 코스마다 출발지와 도착지가 다르기에 도착하면 버스나 택시를 타고서 출발지 주차장으로 이동해야 한다. 또 중간에 둘레길을 빠져나가는 길이 없으니 한 번 들어서면 종점까지 트레킹을 해야 한다. 버스가 끊기면 낭패이므로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는 트래킹을 마쳐야 한다.
초여름의 토요일, 남편과 다솔이는 바다 수영을 했고, 나와 온유는 사려니 숲길°을 걸었다. 여행자일 땐 붉은 오름 쪽 숲길에 주차를 하고, 잘 닦인 삼나무 데크를 걸었었다. 그것이 사려니 숲의 전부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제주에 살다보니 이곳은 환상적인 수국과 화산 송이가 깔린 기나긴 숲길이었다. 총 10km로 어른 걸음으로 2시간 30분이 걸린다. 아이와 함께라면 점심도 먹고, 짬짬히 쉬어야 하니 4시간을 예상하며 갔다.
산수국이 소담스레 핀 숲길은 천국 길을 걷는 듯 신비로웠다. 하늘은 유난히도 맑고 파래서 기분이 한껏 들떴다. 아들에게 처음으로 사진 찍는 법을 알려주었다. 산수국과 어우러진 내 뒷모습을 사진으로 남겨주었다. 평생 간직할 효도선물이다. 난 중간 중간 벤치에 누워 내쉬며 산림욕을 즐겼다. 그 어느 숲보다 새들의 지저귐은 다채롭고 울창했다. 옆 벤치에 누워있던 온유는 좀 지나자 여기저기 나뭇잎을 들춰보며 곤충들의 세상에 몰입하느라 바빴다.
둘레길은 경사가 완만하고, 길이 평탄해서 도란도란 대화하며 걷기에 안성맞춤이다. 아이는 걷다가 힘들면 기어이 내 무릎 위에 올라 앉아 쉬었다. 꼭 껴안아 주었더니 대뜸 이렇게 사랑고백을 했다.
“난 엄마랑 천년 동안 같이 살 거에요.”
그래, 이 순간, 네 고백을 평생 못 잊을 거야. 사랑스런 아이의 어깨를 보드랍게 주물렀다. 숲이 마술을 부린 듯 벅찬 행복감에 몸이 떨렸다.
갑자기 온유가 벌떡 일어났다. 보물을 만난 듯 길가에 떨어진 까마귀 날개 두 개를 주워들었다. 그리고는 까만 깃털을 조막손에 꼬옥 쥔 채 부지런히 날개짓을 해댔다. 덩달아 아이의 고운 다리도 재빨리 움직였다. 마침 힘들던 차에 아이는 새 힘을 얻은 듯 숲길을 내달렸다.
“너무 빠르죠. 속도가 100키로가 넘어버려요. 엄마 때문에 그나마 최대한 느리게 가는 거에요.”
“보세요. 가만히 서 있어도 조금씩 앞으로 가죠? 아, 멈추기가 힘들어요.”
“온유야, 내리막길에서는 뛰지 마. 깃털까지 있는데 너무 빨라져서 넘어지면 어떡해!”
“깃털이 너무 빨리 달리게 해서 자꾸 뛰게 돼요.”
이 앙증맞은 허세꾼을 어쩐담! 종알거리는 그 입이 너무 귀여워, 언젠가는 내 차지가 아닐 그 입술을 얼른 훔쳐버렸다. 우린 연인처럼 얼굴을 부비며 서로를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내 눈동자 속에 자기 모습이 보인다며 온유가 신기한 듯 눈을 반짝였다. 귓가를 간질이는 고운 새소리는 환희의 순간을 한층 더 밝혀주었다. 아들과 함께한 장장 4시간의 걷기는 거짓말을 좀 보태서 마치 한달음인 듯 짧았다. 역시 아이는 엄마의 순수 비타민이다.
(자작시입니다)
아이는 엄마의 비타민
네 입에서 맑게 쏟아지던 그 은구슬들
모조리 주워 담아 내 가슴 속에 콕 박아두고 싶구나
까마귀 날개를 휘휘 저어가며 내달리던
네 여리고 고운 뒤태를 보며
나는 무수히도 간절한 기도를 올렸단다.
신비의 숲에서 반짝이던 너와 나의 눈동자
우주가 녹아들 듯 애틋했던 우리.
그 순수의 결정이 내 안의 아이를 살포시 다독인다.
아낌없이 내어주는 모성으로
넉넉한 어른으로 나를 빚어낸다.
°한라산 둘레길: 해발 600m~800m에 위치한 평탄하여 걷기 좋은 울창한 숲길이다. 총 80km에 달하는 둘레길은 천연림의 피톤치드가 가득하고, 희귀한 야생 동·식물들이 많다. 현재는 동백길, 돌오름길, 사려니숲길, 천아숲길, 수악길, 절물조릿대길 등의 8개의 코스가 있으며, 거리도 3km부터 16.7km까지 다양하게 조성돼 있다.
°사려니 숲길: 제주시 봉개동 절물오름 남쪽 비자림로에서 물찻오름을 지나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붉은오름까지 이어지는 10km의 숲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