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휴직의 후유증은 컸다. 수업과 업무 능력이 모두 초기됐기에 업무 분석만 해도 시간이 모자랐다. 밤낮 없이 폭탄 제거하듯 업무를 해치워도 쌓이는 속도가 더 빨랐다. 끝없이 깜박대는 업무메시지와 수시로 울리는 전화기 속의 요구사항을 해결했다. 수십 건의 공문서를 처리하고 나면 두 시간이 훌쩍 갔다. 내 업무에는 손도 못 댔는데, 퇴근 시간이다. 오늘까지 결재해야 할 공문도 있는데 어쩌랴 결국 아이에게 양해를 구했다. 미안해도 할 수 없다. 나 때문에 학교 일정에 차질이 생기면 안 되니까.
“엄마가 오늘도 늦어. 동생 잘 챙겨줘. 고마워 우리 딸.”
총회준비위원회, 선출관리위원회 이름도 길고 생소한 각종 위원회를 꾸리고 회의록을 지었다. 보고용 공문과 계획서, 가정통신문을 만들고 내부 기안을 올리고 나니 저녁 시간이 훌쩍 지났다. 주말에도 바뀐 틀에 맞춰 평가 계획서를 짜내느라 정신없었다. 엄마 사랑이 고픈 아이들을 영화로 겨우 달랬다. 자정이 넘도록 키보드를 두드렸고, 쪽잠을 잔 후, 못다한 수업 준비를 하려 새벽에 출근했다. 몰려드는 두통과 안통, 흐르는 콧물을 닦으며 몇 주를 이렇게 견뎠다. 글쓰기를 좋아하지만 공문서는 아무리해도 정 없다. 상투적인 단어가 나열된, 사람을 옭아매는 규범의 산물이다. ‘유기적이고 원활한 소통과 협력을 통한 민주적인 학교문화 형성’, ‘의사소통과 주체적인 사고 능력을 함양하여 민주시민성 함양을 도모함’,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고 자유로운 의사표현과 협동심, 창의력을 고취시키고자 함’. 온통 형식적인 말 뿐이다. 이미 있던 말에 비슷한 추상적인 말을 보태며 반복한다. 상투적이고 규범 가득한 글 속에선 내가 애정하는 ‘창의성’이란 말조차 회색빛이다. 시간과 공을 들여 이들의 글자체와 크기, 어미를 맞추고, 정렬했다. 표 디자인과 외형을 통일감 있게 갖추려 모니터에 꽂힌 눈이 따끔 아팠다. 문서주의로 인해 수십 장씩 생산되고 파기되는 종이가 아까웠다.
실은 나도 이 단어처럼 변할까봐 두려웠다. 나 역시 누군가를 규범으로 구속하고, 타인의 생기를 짓밟는 사람이 될까봐, 업무 포화에 질린 나머지 일 늘리기가 싫어 사명감을 잃을까봐, 결국 아이들에게 추상적이고 피상적인 것만을 가르치는 선생이 될까봐 두려웠다. 구체성이 없는 단어는 사람을 움직일 수 없다. 목표가 두루뭉술하면 눈앞에 현실에만 초점을 맞추고, 타인의 강요와 기준에 따라 살게 된다. 일상을 ‘의미’가 아닌 순간의 ‘재미’로만 채운다. 행복하기를 포기한 채 근근이 살아가는 보통의 인간으로 전락하고 만다. 공문서를 볼 때마다 그리웠다. 생각을 변화시키고 생의 지혜를 담은 글, 이웃과 마음을 나누며 생을 행복하게 관리하게 만드는 글, 좋아하는 일에 대해 더 깊어지도록 만드는 ‘유의미한 표현’이 그리웠다.
‘워라밸, 루틴 있는 삶, 나다운 삶’ 따위는 워킹맘에겐 꿈인 걸까? 이런 고민을 수시로 했다. 결론은 지금은 학기초니까 다만 견뎌야할 때라는 것. 마인드셋을 다시 했다. 행복은 ‘내 삶을 사랑하는 정도’라고. 내가 많은 시간을 보내는 장소를 얼마나 사랑하느냐가 행복수치를 결정한다. 먼저 불평을 유발하는 ‘냉기’가 아닌 감사를 돋우는 ‘온기’에 촉각을 세우기로 했다. 교무실에서 늦게까지 함께 키보드를 두드리는 동료가 보였다. 참, 다행이다. 의지할 대상이 있으니까. 덕분에 밖이 캄캄해져도 무섭지 않았다. 동병상련의 위로 속에서 동지애도 무럭 자란다. 우선 내 몸을 건강한 집밥과 무지개 해독주스로 달랬다. 지친 우리를 위해 제주 천혜향을 큰 상자로 주문했다. 껍질을 깠더니 상큼한 향기가 포말처럼 퍼졌다. 이 극강의 비타민을 분주와 긴장으로 굳은 동지들에게 건넸다. 노란 열매 덕분에 교무실에 온기가 살아났다. 생계와 경쟁의 저편에서 쉼과 향유의 이편으로 넘어오는 기적이 스물스물 일었다.
3월, 교문에서도 긴장의 바람은 불었다. 교실이 어딘지 모르겠다는 불안한 신입생, 체육복을 두고 와 발을 동동거리는 학생, 신발주머니에서 실내화를 꺼내 신고, 주섬주섬 운동화를 정리하는 떨리는 손길들. 이 아이들에게 온기를 전하려 더 활짝 웃으며 학생맞이를 했다. “좋은 아침이야. 어서 오렴.” 무미건조했던 아이 표정에 미소가 스쳤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생기를 먼저 전할 수 있는 교사임이 감사했다. 그 때 “미정아, 사랑해!”라고 외치는 신입생 엄마의 애끓는 목소리가 들렸다. 코끝이 시큰했고 눈앞에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귀해 보였다.
업무도 온기로 돌파해야 했다. 피상적 자아로 살길 강요하는 사회로부터 돌파해 주체성을 회복해야 했다. 아침마다 바인더에 꽂힌 사명선언서를 읽었다. 행복한 사람은 수동적이고 무의미한 일마저도 능동적이고 가치 있는 일로 바꾸는 사람이다. 마인드를 바꿨다. 공문서와 계획서, 결재와 보고의 가치는 과연 무엇일까? 수시로 고민한 끝에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어떤 기업과 기관이든 공문서가 없으면 일이 진행되지 않는다. 그것은 업무의 체계이자 약속이다. 책임감을 돋운다. 또 불시에 일어날 사고로부터 기관과 업무 담당자를 지킨다. 결국 일의 바탕이자 뼈대가 된다. 큰 조직을 움직이려면 이 때문에 문서화가 필요하다. 결국 조직을 움직이는 리더에겐 이 또한 필요한 능력이리라. 행정 업무를 의무가 아닌 자율적인 것으로, 의미있는 일로 바꿨다. 메마른 광야같은 일이라도 마인드셋을 바꾸면 사명이 된다.
“까짓 것, 돌파하자. 체계를 맞추고 실수를 바로잡느라 시간이 걸리고 머리가 아파도, 익숙해질 때까지 부딪히자.”
반복의 힘을 믿는다. 책을 쓰면서 몸소 체득한 그것. 유능한 야구 선수의 스윙도 수많은 반복의 시간에 흘린 피와 땀, 눈물로 만들어졌다. 계획서와 기안문 작성, 보고와 회의 등 위계와 문서주의를 당장은 뚫지 못하지만 우선 기어오르기라도 하리라. 타닥타닥 건조한 눈을 비비며 공문 쓰기에 시간과 노력을 집중했다. 자신이 아닌 외부 세계에, 수단으로서의 행위가 아니라 그 자체를 목적이라 여기며, 자의식에서 벗어난 몰입의 경지에 다다른다. 뒷산,죽은 듯 메마른 가지에 진분홍 진달래가 맺혔다. 메마른 광야에서도 사명의 꽃은 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