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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단은 금물, 겹겹이 깊은 도시 빈(Wien)

벗겨낼수록 새로운 얼굴을 드러내는 곳

by 은하수반짝
빈 시청사와 빈 미술사 박물관

이번 여행을 계획하면서 우린 오스트리아 빈을 건너뛸 뻔했다. 예전에 베르사유도 다녀왔는데 쇤브룬 궁전을 굳이 봐야하나, 또 우린 모차르트를 가끔씩 찾는 클래식 초보인데다 아인슈페너는 가까운 ‘비엔나커피하우스’에서 마시면 되지 않냐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이를 두고 마치 서유럽을 가는데 파리를 빼고 가느냐는 뉘앙스로 우릴 말렸다. 빈에 직접 와서 보니 이들의 강력한 만류가 참 고마웠다.

빈은 수식어가 많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도시,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모차르트와 클림트가 숨 쉬는 예술 도시, 화려한 궁전의 도시, 합스부르크 왕가의 도시, 달콤한 비엔나커피의 도시 등. 이런 수식어 만큼이나 빈은 생각보다, 아니 상상보다 훨씬 더 깊었다.


통째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구시가지에는 슈테판대성당이 심장처럼 우뚝 솟아 있다. 거대한 호프부르크왕궁, 로마 시대 유적이 깔린 미하엘 광장, 바로크 건축의 정수 카를 교회, 인상파 화가의 보물이 가득한 알베르티나 미술관, 유명한 국립 오페라하우스. 이게 끝이 아니다. 마리아 테레지아 광장에는 웅장한 르네상스풍 쌍둥이 건물이 대칭을 이루며 서 있고, 조금만 걸어가면 고딕 양식의 걸작인 빈 시청사와 클림트가 실내 장식을 한 것으로 유명한 왕립국립극장이 반긴다. 빈은 껍질을 벗길수록 새로운 보물이 나왔다.

빈은 ‘속단’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여행 내내 실감케 했다. 다리에 힘이 풀릴 즈음 ‘카페 자허’가 보였다. 바로 입장이 가능해서 바로 자리를 잡았다. 빈의 커피하우스 문화는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사색하고 교류하며 만들어냈다. 빈 카페의 ‘살롱 문화’는 2011년에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커피 한 잔을 주문하면 하루 종일 머물러도 눈치 주지 않는, 편안하고 자유로운 분위기라니 유럽다웠다. 하지만 우린 이 카페에서 눈치를 봤다. 손님 대기 줄에 무언의 압박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자허토르테와 아인슈페너


다시 ‘카페 자허’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이곳은 자허토르테로 유명하다. 이 초콜릿케이크는 1832년, 당시 16살의 요리 견습생 프란츠 자허가 황실 연회를 위해 급히 고안했다. 겉은 진한 초콜릿으로 코팅하고, 케이크 속과 겉면에도 살구잼을 발랐다. 이는 황실의 사랑을 받아 지금까지 오스트리아 대표 디저트가 되었다. 우린 이 초콜릿케이크에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어차피 초코케이크잖아?”하는 마음이었는데 살구잼의 산미가 초코의 풍미를 더하는 참신한 맛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진한 초콜릿의 쌉싸름함, 살구잼의 산뜻한 신맛 거기에 푹신한 생크림이 한데 어울려 입안에서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역시 속단은 금물이다. 아참, 아인슈페너의 탄생도 신박했다. 쓴 커피를 더 맛있게 먹기 위해 또 마차 위에서도 커피가 넘치지 않기 위해 생크림을 올렸다니, 오스트리아인의 창의성에 박수를 보낸다.

오스트리아의 또 다른 자존심은 단연 슈니첼이다. 커다란 망치로 고기를 두드려 얇게 펴고, 바삭하지만 가볍게 입혀낸 튀김옷을 두른 후, 기름에 살짝만 잠기게 구워낸다. 슈니첼 전통 식당인 ‘피그뮐러’에 앉아 접시를 본 순간, 다솔이는 말했다.

고소한 바삭함 슈니첼

“엄마, 이거 남산 왕돈까스 아니에요?”

정말 그랬다. 넓적하고 푸짐한 돈가스와 비슷했다. 하지만 첫입을 먹는 순간, 두툼하고 기름진 돈가스와는 다른 우아하고 산뜻한 고소함이 입안을 채웠다.

“엄마, 이건 돈가스가 아니라 슈니첼 맞네요!”

다솔이의 농담 섞인 선언에 모두 웃었다. 접시는 넓었지만 생각보다 양이 많지 않았다. 그게 얇은 두께 때문이었을일까, 아니면 우리의 왕성한 식욕 탓이었을까?


피곤한 다리를 이끌고 숙소에서 잠시 쉰 뒤, 우리는 다시 야경을 보러 시내로 나갔다. 알베르티나 미술관 위에 서니 오페라하우스의 전경이 황금빛으로 펼쳐졌다. 낮의 고전미와는 다른 또 다른 화려함이었다. 온유는 카메라 야간 모드를 켜고 연신 셔트를 눌러댔다. 하지만 이 화려한 건물에도 ‘속단’의 슬픈 역사가 숨어 있었다. 1861년, 아우구스트 시카르드 폰 시카르스부르크와 에두아르트 판 데르 뉠이 설계해 착공한 이 건물은, 완공도 되기 전에 조롱을 받았다. 도로보다 낮게 지어진 탓에 “땅에 꺼진 상자 같다”는 혹평이 쏟아졌고, 황제 프란츠 요제프조차 그렇게 말했다. 그 비난을 견디지 못한 판 데르 뉠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친구를 잃은 시카르스부르크도 충격으로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1869년,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로 개관하자 세상은 오페라하우스의 진가를 알아보았다. 네오 르네상스 양식의 당당한 외관, 화려한 내부, 그리고 완벽에 가까운 음향은 사람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이야기를 들은 아이들은 ‘건축가들이 일 년만 더 참고 기다렸다면 좋았을 텐데...’라며 아쉬워했다. 속단은 언제나 진실을 가린다. 그럼에도 나 또한 아이들을 속단할 때가 많다. 우리 부부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을 엄마나 아빠의 복제본이거나 둘을 섞어놓은 존재로 규정할 때가 많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 경험과 기준을 들이밀며 아이들을 훈계하고 방향을 제시하곤 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부모의 닮은꼴이 아니다. 유전, 가정 및 사회적 환경, 개인적 경험, 시대의 변화가 함께 빚어낸 새로운 존재인 것이다.

빈 국립 오페라하우스의 낮과 밤

AI와 로봇이 이미 우리의 일자리를 바꾸고 있고, 기후 위기와 글로벌 네트워크는 삶의 무대를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좋은 대학, 안정적인 직업’만을 답안처럼 내미는 것은 기성세대의 또 다른 속단일지 모른다. 이제 필요한 것은 간판이 아닌 변화에 적응하는 힘, 남의 마음을 헤아리고 함께 살아갈 공감력, 그리고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들어내는 창의성이 아닐까? 어렵지만 간절히 바란다. 아이의 모습과 가능성을 속단하지 않고, 끝까지 믿고 지켜봐주는 부모가 되길 말이다. 빈의 오페라하우스가 한때는 ‘가라앉은 상자’라 불리다 지금은 예술의 상징이 된 것처럼, 우리 아이들도 저마다의 속도로 빛을 드러낼 날이 올 테니까.


결국 빈이 내게 가르쳐준 건 이 한마디였다.

“나를 속단하지 말라, 난 겹겹이 깊다.”

웅장한 호프부르크왕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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