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의 짧은 불꽃이 들려준 이야기
음악의 도시 빈, 모차르트는 이곳에서 오페라의 황금시대를 열었고, 베토벤은 청력 상실 속에서도 인류의 교향곡을 완성했다. 요한 슈트라우스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는 지금도 빈의 숨결 속에 흐른다. 빈의 거리와 광장, 건물과 카페마다 거장들의 발자취가 보였고, 도시 중심에는 빈의 심장이라 불리는 슈테판 대성당이 우뚝 있었다.
대성당의 외관은 장엄했다. 노아의 방주 길이와 같게 지어진 남쪽 첨탑은 하늘을 찌를 듯했고, 지붕에 수 놓인 23만 장의 모자이크 타일은 거대한 직조물처럼 반짝였다. 입구에 박힌 두 개의 쇠막대기는 옷감 길이를 재던 ‘표준 잣대’로서 성당 주변이 오랫동안 장터였음을 말해 줬다. 내부로 들어서자, 아치형 천장이 세월의 갈비뼈처럼 얽혀 하늘을 떠받치고 있었다. 성당 속 기둥들은 가느다란 직선들이 서로 어깨를 맞대듯 모여 하나를 이뤘다. 성전 내 조각상들은 역사의 숨결을 품은 채 인간의 섬세함과 신앙의 화려함을 동시에 증언했다.
제단 중앙에 초대교회의 첫 순교자인 성 슈테판의 성화가 있었다. 돌팔매질을 받으면서도“주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라고 기도하던 얼굴이 고요하게 빛났다. 아이들은 왼쪽 기둥에 새겨진 이 성당의 건축가 안톤 필그람의 조각상 앞에서 키득키득 웃었다. 그는 단발머리에 빵 모자를 쓰고, 오른손에는 컴퍼스를 든 채 거대한 오르간 장식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다. 장난기 어린 표정과 알록달록한 색감이 숨바꼭질을 하는 어린아이처럼 생동감 있어 보였다.
이곳은 모차르트는 결혼식과 장례식을 올린 장소로 알려져 있다. 모차르트는 1782년 여름, 아버지의 반대 속에서도 콘스탄체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아홉 해 뒤, 같은 성당의 작은 십자가 예배당에서 초촐한 장례를 치렀다. 빚이 많아 그의 장례는 소박했고, 하객은 몇몇 가까운 제자와 지인들에 불과했다. 심지어 아내조차 참석하지 않았다. 그의 시신은 당시 검소한 장례 풍습대로 공동 매장지인 성마르크스 묘지로 옮겨져 많은 이들과 함께 땅속에 묻혔기에 그의 시신은 지금까지 찾을 수 없다. 이렇게 천재의 삶은 35세라는 젊은 나이로 허망한 마침표를 찍었다. 같은 지붕 아래에서 맞이한 결혼 종소리와 장례의 진혼곡이라니, 그의 삶이 얼마나 드라마틱했는지를 보여준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빈이라는 도시와 닮았다. 경쾌하게 우아하고 동시에 장엄하게 아름답다. 귀족의 후원을 받으면서도 평민들의 정서를 노래했던 그의 음악은 화려한 왕궁과 자유로운 시민 문화가 공존하던 빈의 독특한 분위기를 담고 있다. ‘교향곡 41번 주피터’는 황금빛 샹들리에 아래의 궁중 무도회를 떠올리게 하고, ‘피가로의 결혼 속 아리아’는 풍자와 웃음으로 가득한 살롱 귀족들의 수다와 닮았다. ‘작은 밤의 음악’은 여름밤 정원에서 들려오는 바람처럼 시원하고, ‘터키 행진곡’은 동양 문화를 동경하는 유럽의 시선을 역동적으로 담아냈다. 음악이 흘러나오면 아이들마저 “엄마, 나 이 곡 알아! 음악 시간에 배웠어.”라며 흥얼거릴 정도로 그의 음악은 사람들의 일상 속에 스며 있다.
자연스럽게 우린 ‘모차르트 하우스’로 향했다. 생각보다 그의 집은 무척 소박했다. 방 네 개가 달린 아파트였다. 정원도 없었고, 창밖 풍경은 건물과 골목길에 막혀 답답했다. 그러나 이곳은 모차르트가 빈에 살았던 집 중 가장 오래 살았고, '피가로의 결혼'을 작곡했던 장소다. 그래서 ‘피가로의 집’이라고도 불린다. 유리 진열장 안에는 그의 친필 악보가 빼곡했고, 직접 사용하던 바이올린 그리고 피아노도 있었다. 그가 생전에 사용하던 당구대와 약장, 의자 같은 일상적 물건들이 그 시대의 공기를 고스란히 전해주었다. 또 당시의 오페라 광고지와 포스터가 벽을 가득 채우고 있었는데, 그것만으로도 18세기 빈의 활기 넘치는 공연 문화를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모차르트의 이름에는 언제나 ‘천재’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하지만 그 빛나는 영광 뒤에는 교육 전문가였던 아버지 레오폴트의 교육열과 어린 아들을 향한 야망이 숨어 있었다. 세 살에 누나의 건반 연주를 흉내 내고, 다섯 살에 첫 작곡을 했다는 사실은 분명 놀랍다. 또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 함께 유럽 전역을 돌며 연주를 다녔다. 하지만 마차로 수천 킬로미터를 다니며 추위와 열악한 환경을 견디기에 모차르트는 너무 어렸었다. 어린 시절의 고행은 평생 그를 병약하게 했으리라. 결국 신장질환이나 류머티즘열로 추정되는 병마가 체력을 갉아먹어 삼십오 세라는 짧은 생애를 살고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가 가족이나 친구에게 쓴 친필 편지 속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똥 이야기’는 천재의 기이한 농담이자 제대로 웃고 뛰어놀지 못한 아이의 흔적이 남아 있는지 모른다.
또 그는 젊은 시절 사치와 향락에 빠져 언제나 빚에 시달렸다. 고급 벨벳 코트와 화려한 레이스 셔츠를 사 입기 위해 많은 곡을 썼고, 한밤중에는 도박판에 앉아 피아노 대신 주사위를 굴렸다. 오늘날로 치면 ‘프리랜서 유명 음악가’였지만, 생활은 언제나 ‘카드값에 쫓기는 월급쟁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천재의 삶은 극적이지만, 동시에 안타깝다. 박수와 환호 뒤에는 빚과 사치, 향락, 건강 악화가 따라붙었다. 모차르트의 생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이른 성공과 과한 기대 속에서 성공을 향해 질주하는 삶.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그의 천재성은 인류에겐 선물이었지만, 정작 그 자신에게는 과연 축복이었을까?
어쩌면 모차르트 자신에게는 나이에 맞는 배움과 놀이, 건강을 돌보며 자족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더 많은 곡을 쓰고 유명해지는 것보다 중요하지 않았을까. 그가 더 오래 천천히 머물며 곡을 썼더라면 인류도 그의 익살스럽고도 사랑스러운 음악을 더 풍성하게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너무 일찍 꺼져버린 천재의 불꽃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빛나는 재능보다 더 중요한 건, 갈수록 성숙한 열매를 빚게 만드는 건강한 오늘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