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죽음, 욕망과 두려움에 대한 솔직한 고백
빈에서 우리가 찾은 세 번째 궁전은 벨베데레였다. 이름 그대로 이탈리어로 ‘벨’은 아름다움, ‘베데레’는 전망을 뜻한다. 전망이 아름다운 궁전이라는 이름처럼 풍경이 예뻤다. 2층 마블 홀 창가에 서자, 상궁과 하궁이 서로 마주 서 있고, 그 사이로 잔디와 나무, 분수로 잘 다듬어진 파르테논 정원이 길게 뻗어 있었다. 멀리 슈테판 대성당의 첨탑이 아련히 솟아 있는 풍경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붉은 대리석과 황금 장식이 화려한 이 마블 홀은 과거 마리 앙투아네트의 결혼 기념 파티가 열렸고, 1955년 오스트리아의 독립이 선언이 낭독된 역사적인 공간이다. 그 웅장한 무대가 지금은 미술관이라니 신기하고도 과분한 듯 어색했다.
이곳에선 빈을 대표하는 두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쉴레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부지런히 클림트의 황금빛 <키스>를 찾아 섰다.
“이 그림! 지난번 도서관에서 본 거 맞지?”
“옷에 나무랑 꽃 그림이 있어. 신기해.”
“근데 이거 진짜 금일까? 진짜 비싸겠다.”
아이들의 감상은 솔직하고도 발랄했다. 자세히 봤다. 금박 장식과 자잘한 꽃, 덩굴무늬, 동그라미와 네모가 조화를 이루며 인물과 풍경을 수놓고 있었다. 붓질이라기보다 정성스레 새겨 넣은 듯한 세공의 느낌이었다. 그는 금 세공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금박 장식을 회화에 도입했다. 독창적이고 화려한 그의 화풍은 대중의 환영을 받았고 그는 실내 장식을 의뢰받아 명성과 부를 쌓았다.
클림트는 자화상을 그리지 않은 화가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키스> 속의 남성은 클림트 자신이고, 여성은 그의 연인이었던 에밀리 플뢰게라는 이야기가 정설처럼 전해진다. 소문난 카사노바였던 클림트가 진정으로 사랑한 단 한 사람, 에밀리 플뢰게와의 관계는 깊고도 단단했다.
그림을 한참 보던 온유가 말했다.
“엄마, 여자가 잘못하다간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아.”
다시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신기하게도 두 연인이 서 있는 곳은 절벽 끝이었다. 황홀한 사랑의 달콤함이 아슬아슬한 불안으로도 느껴지는 순간. 아마도 클림트는 사랑의 두 얼굴인 기쁨과 두려움을 동시에 말하려던 것이 아닐까. 에로틱하게만 보였던 <키스>에 사랑의 본질이 숨어 있음을 새삼 알았다.
다음으로 본 작품은 <유디트>다. 유디트는 이스라엘을 위협하던 아시리아 장군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하고 술에 취하게 한 뒤, 목을 베어 나라를 구한 영웅이다. 그러나 클림트의 붓끝에서 그녀의 성녀가 아닌 매혹적인 팜므파탈로 변신했다. 나체는 눈부시게 빛났고, 반쯤 풀린 눈과 몽롱한 표정은 쾌락을 암시했다. 유심히 보니, 여느 유디트 그림처럼 목이 잘린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도 들고 있었다. 성녀를 퇴폐적으로 묘사했다는 이유로 거센 지탄을 받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계속 욕망과 에로티시즘을 솔직하게 드러내며 자기 길을 걸어갔다.
에곤 쉴레의 작품은 같은 나체라 해도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앙상하게 뒤틀린 몸, 생기를 잃은 듯한 눈빛. 온유는 그림을 보며 말했다.
“엄마, 그림이 좀 이상해. 사람들이 다 불쌍해”
쉴레는 인간의 몸을 아름답게 치장하지 않았다. 날카롭고 불편한 선으로 불안과 외로움, 죽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것이야말로 진짜 인간의 모습이 아니냐고 묻는 듯했다. 그의 대표작인 <죽음과 소녀>에는 남자에게 매달리는 한 여인과 한 손으로는 여자를 밀어내면서도 다른 손으로는 그녀를 쓰다듬고 있는 남성이 등장한다. 그 여인은 쉴레를 헌신적으로 사랑했지만 끝내 버림받은 여인, 발리였다.
쉴레는 잠깐의 감옥살이를 거친 뒤, 안정된 삶을 갈망하게 되었고, 결국 발리를 떠나 부유한 가문의 여성 에디트와 결혼했다. 하지만 운명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결혼 후 삼 년만에 그는 스페인 독감으로 아내와 뱃속의 아이를 잃고, 불과 사흘 뒤 자신도 세상을 떠났다. 스물 여덟, 인생이 막 꽃을 피우려던 순간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의 스승이자 동지였던 클림트 역시 같은 해, 오십오 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다.
쉴레의 <가족> 앞에 섰다. 화폭에는 어린 아이와 여성, 남성이 일렬로 앉아 있었다.
“아빠, 가족들이 왜 또 옷을 다 벗고 있어?”
예전에 비해 통통하게 살이 올랐으나 그들의 표정은 여전히 불안해 보였다. 있는 그대로의 인간, 사랑과 두려움은 어디서나 공존했다.
클림트와 쉴레는 닮은 점이 많다. 그들은 빈 분리파를 결성해 당시 오스트리아의 교훈적이고 이상적인 화풍을 거부했다. ‘예술은 시대와 함께 살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관습적인 미의 기준을 뒤집고 욕망과 죽음, 존재의 불안을 가감 없이 표현했다. 그러나 그 정직함은 외설과 퇴폐라는 낙인을 불러왔고 정부의 검열과 탄압으로 이어졌다.
벨베데르 정원에서 포즈를 취하는 아이들을 카메라에 담으며, 두 화가의 삶을 곱씹었다.
화려하지만 덧없는 욕망, 뒤틀려 있지만 감추지 않았던 삶의 진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드러내려 했던 솔직한 용기.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과연 나는 얼마나 세상 앞에, 또 내 자신에게 솔직할 수 있을까.
세상의 시선에 갇히지 않고 내 안의 진실을 선택하는 용기를 낼 수 있을까.
그리고 아이들에 얼마만큼 솔직하라고 가르칠 수 있을까.
세상과 다르더라도 박해를 받더라도, 소신껏 네 길을 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직업병 때문인지 늘 높은 기준과 자기 검열 속에 스스로를 가두는 나.
그래서인지, 두 화가가 남긴 황금빛과 거친 선의 자유로움이 무척이나 부럽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