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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rmit Trucker Dec 29. 2022

30번 국도 뽀개기

크리티컬 이벤트 발생

12월 28일

30번 국도 뽀개기

어제 156달러 들인 트럭 세차 효과는 하루를 못 갔다. 펜실베이니아 서부로 오니 다시 소금물이 튀었다. 그나마 날씨가 조금 풀려 워셔액이 잘 나와 운전 중에도 앞 유리창을 닦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오늘 점심 경 주유한 트럭스탑에서 샤워를 했다. 며칠 만인가? 기억도 가물하다. 지난 주 혹한에 빙판길 주행으로 정신이 없었고, 월요일 회사 터미널에서 빨래와 샤워 둘 다 하려던 계획도 무산됐다. 어제는 트럭스탑까지 갈 시간이 부족해 못 했다. 샤워는 기회 있을 때 해야 된다.

한국에서는 일명 요소수라고 불리는 DEF(Diesel exhaust fluid)도 기회 있을 때 넣는 게 좋다. DEF는 디젤 배출 가스를 정화하는 역할을 한다. DEF가 부족하면 엔진 출력이 떨어지다가 나중에는 멈춘다. DEF는 디젤 연료만큼 빨리 닳지는 않아서 주유 서너 번 할 때 한 번 정도 꼴로 넣으면 된다. 하지만 겨울에는 항상 채워두거나 적어도 절반 이하로 떨어지기 전에 보충해야 한다. 날씨가 추워지면 DEF 펌프가 얼어서 작동 안 하는 곳도 더러 있다. 벌크 DEF가 없으면 트럭스탑에서 통에 넣어서 파는 DEF를 사야 하는데 훨씬 비싸다.

프라임에는 macro 27이라는 명령어가 있는데, 목적지까지 가장 비용이 적게 드는 경로를 알려준다. 여기에는 주유소 디젤유 가격과 톨비도 포함된다. 나는 보통은 네비게이션이 알려주는 경로를 따른다. 그런데 이번에는 톨비가 100달러 차이가 났다. 80번 인터스테이트 하이웨이 대신에 30번 국도를 타고 수백 마일을 가야 했다. 시간 여유도 있어 한번 가보기로 했다. 평소 다니던 길과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피츠버그에서부터 30번 국도로 들어섰다. 곧바로 후회했다. 왕복 2차선 산길에 경사도 심했다. 제설이 끝났으니 망정이지 눈 올 때는 피해야 할 길이다. 속도도 연비도 안 좋다. 이런 길로 수백 마일을 간다고? 오하이오에 들어오니 평지에 왕복 4차선으로 넓어졌다. 여느 하이웨이와 다를 바 없다. 갑자기 전방에 신호등이 나타나거나, 가끔 마을을 지나는 것을 제외한다면.

직선 언덕길 내리막에서 모멘텀을 받아 오르막을 오르려고 엔진 브레이크를 걸지 않고 내려갔다. 언덕 아래  부분이 약간 곡선인데다 바닥도 좌우가 균일하지 않아 트럭이 기우뚱했다. 브레이크를 밟아 차체는 제어했지만 이미 늦었다. 삐빅 경고음과 함께 critiacal event가 발생했다. 젠장. 복귀 후 2주만에 크리티컬 이벤트라니. 괜히 30번 국도를 탔나.  

Critical event는 한국말로는 중대한 사건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다. 프라임에서는 사고에 준하는 위험신호로 여긴다. 크리티컬 이벤트가 많은 드라이버는 그만큼 사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6개월 사이에 크리티컬 이벤트가 2회 이상 발생하면 안전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 크리티컬 이벤트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다. over speed, hard braking, stability control, forward collision warning 등이다. 나는 stability control event에 해당한다. 차체가 균형을 잃고 전복 위험에 처했다는 뜻이다.

회사 안전 담당 부서에서 전화가 왔다. 담당자는 직선 도로에서 안정성 제어 경고가 떴는데 무슨 상황이냐고 물었다. 보통은 곡선길에서 발생하는 경고다. 나는 상황을 설명했다. 당시 속도가 65마일이었다는 얘기에 나는 순순히 내가 조금 과속했다고 시인했다. 그 국도의 제한속도는 시속 55마일이었다. 담당자는 내게 몇 번이고 고맙다고 말했다. 이해해줘서 고맙다고. 내가 실수한 건데 고맙다니? 나는 앞으로 더 주의하겠다고 말하고 훈훈한 분위기로 끊었다.

크리티컬 이벤트는 자신에게 불이익이 되기 때문에 대게 변명을 하거나 심지어 화를 내는 드라이버까지 있다. 자기 잘못이 아니고 빌어 먹을 센서가 예민해서 그랬다면서. 센서 오작동인 경우도 있다.. 전방 충돌 위험 경고는 자주 오작동한다. 그래서 회사에서도 상황만 잘 설명하면 별로 문제 삼지 않는다. 급제동의 경우에도 사고를 피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을 해명하면 된다. 그 이외의 경우는 운전자 잘못이 맞다. 회사 안전 담당자는 나의 안전과 회사의 재산 보호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다. 그를 감시인으로 여기고 화를 내는 것은 엉뚱한 곳에 화풀이하는 격이다.

나도 초기에는 크리티컬 이벤트가 잦았다. 그것 때문에 컴퍼니 드라이버에서 리즈로 옮기려던 계획이 무산된 적도 있다. 이후로 많이 조심해서 크리티컬 이벤트가 어지간해서는 발생하지 않았다. 오늘 블루버드의 안정성 제어 경고 임계점을 알았다.

국도길은 인터스테이트 하이웨이에 비해 휴게소나 트럭스탑이 적다. 그러니 트립플랜을 잘 세워야 한다. 얼마만큼 가서 어디서 쉴 것인지. 초보자와 경력자의 차이가 여기서 난다. 초보자라도 꼼꼼한 사람은 잘한다. 나는 꼼꼼하지는 않아도 짬밥이 있어서 대충이라도 계획은 세워 다닌다. 항상 플랜B도 있다. 예상치 못한 사고나 교통 정체로 계획대로 안 되는 경우도 있으니까.

국도길 운전은 하이웨이와는 다른 감흥을 안겨준다. 좀 더 사람들의 일상에 접근한 느낌이랄까. 나 같은 OTR 드라이버가 국도나 지방도로를 많이 알아둬서 나쁠 건 없다. 지도로만 아는 것과 한번이라도 직접 달려본 것은 다르다. 도로가 막혔을 경우 우회로로 삼을 수 있는 지 판단의 기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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