쏘쏘엄마, 너무나도 미운 사람이 생겼어요. 그 사람을 생각하면 숨이 막히고 미칠 것 같아요. 안 볼 수도 없고.. 저한테 좀 도움 될만한 이야기가 있을까요?
상담에서 한 아이가 찾아왔다.
친구들의 비위를 맞추느라 단 한 번도 자기 의견을 낸 적이 없었다는 아이.
친구들의 무리한 부탁도 다 들어주고,
혹여나 다른 친구들 기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늘 맞춰주려 애를 써왔으며,
먹고 싶은 메뉴가 있어도 친구에게 먼저 묻고 늘 친구의 의견을 따라왔다.
이 아이는 그렇게 모두에게 "착한 친구, 사람 좋은 친구"가 되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말 너무나도 불편하고 싫은 친구가 나타났다. 너무 미워 죽겠다.
수업 시간에 퍼질러 자놓고 나한테 와서 필기를 보여달라고 부탁하고,
다른 친구들 기분과 상관없이 자기 하고 싶은 말만 내뱉고,
자기가 먹고 싶은 곳만 매일 가자고 한다.
난 이 아이가 너무 싫고 불편한데, 같이 노는 친구들은 유쾌하고 재밌다며 좋아한다.
어떻게 이렇게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애를 좋아할 수가 있지?
더 화가 난다. 내 필기를 아무렇지 않게 가져가는 저 애가.. 정말.... 미워 죽을 것 같다.
아이를 상담하며 이 아이의 마음이 헤아려졌다. 정말 공감이 된다.
그런데 한 편으로 이 둘은 정말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아마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는 이들의 닮은 점을 발견했을지도 모르겠다.)
너무 한쪽만 드러나느라, 다른 한쪽은 아예 깊숙한 곳으로 묻어두었다는 점이.
한쪽만 너무 많이 신경 쓰느라, 다른 쪽은 전혀 신경 쓰지 못한다는 점이 많이 닮았다.
극단적으로 남들만을 맞추고 존중했던 이 아이 내면의 깊은 무의식 속에는 극단적으로 정반대의 면인 "내 멋대로, 이기적으로 살고 싶다"라는그림자의 자기가 있었다. 이런 이기적인 모습이 너무 싫고 혐오스러워서 내 무의식 저변에 넣어둔 것일 뿐.
그런데 내가 혐오해서 내 마음 깊숙한 곳에 묻어둔 그 모습을 갖고 온 저 친구가 얼마나 밉겠나.
페르소나와 그림자
분석심리학자 칼 융에 따르면 모든 사람에게는 페르소나와 그림자가 있다고 한다.
페르소나는 "가면"이다. 사회적인 가면. 그러니까 페르소나는 나의 사회적 자아다.
사회적으로 바람직하다고 요구되는 어떤 "역할"이나 "행동".
우리는 사회적인 가면을 써야 사회적 활동을 적절하게 해낼 수 있다. 그래야 직장 상사가 나를 지적하고 화나게 했어도, 같이 욕하고 직장을 박차 나오지 않을 수 있다. 그래야 친구가 나를 좀 불편하게 했어도, 온갖 신경질을 다 내기보다는 적당한 말로 내 마음을 표현해 볼 수 있다.
페르소나는 좀 더 "타인에게 보이는 나"에 가깝고 사회적으로 닿아있는 "나"의 한 부분이다.
그런데 가면이 있으면 그 밑의 민낯이 있기 마련이다. 그 민낯 중에서도 완전 초초초초 민낯.
보이는 페르소나와는 완전히 반대로 아예 가려 숨겨져 있는 나의 어떤 모습, 이를 융은 "그림자"라고 지칭한다.그림자는 완전히 무의식적이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 안에 그림자가 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그림자는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허용되지 않는 어떤 것, 나쁘고, 열등하고, 성적이고, 싫은 것들이 다 포함된 아주 어둡고 개인적인 것들의 집합소이다. 이렇게 어둡고 나쁘지 않더라도 내 입장에서 너무 싫은 어떤 모습도 내겐 그림자가 될 수 있다. 그러니 불편해서 저 무의식의 깊숙한 곳에 숨겨놓는 것이다. 마치 "내"가 아닌 것처럼" (그림자가 그림자가 된 데에는 분명 내가 살아온 어떤 환경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남겨두고..)
사회적 장면에서 페르소나가 많이 쓰이고 유용하다고 해서 그림자인 내가 필요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이 두 가지는 모두 필요하다.
항상 모범적이고, 성실하고, 아주 선하고 좋다고, 평가받는 사람은 자신의 열등한 모습인 그림자를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는 때가 많다.(물론 상대방도) 하지만 우리 안에는 선과 악이 모두 존재한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다. 그림자도 "나"인데, 나의 그림자를 전혀 바라보지 못하고 치워두려고 하면 할수록 그림자는 더 짙어져 언젠가 말썽을 일으킨다.
극단적인 예지만 극악무도한 범죄를 일으킨 범죄자를 잡고 보면, 아주 지극히 정상적으로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던 사람이라서 놀랄 때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의 그림자 직면하기 : 내가 너무 싫은 그 사람에게 힌트가 있다.
아니.. 근데 그림자를 안 본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범죄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그림자, 굳이 꼭 봐야 하나?
안 보고도 살 수 있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네 인생사.. 살다 보면 진짜 나를 힘들고 미칠 것 같게 만드는 인간을 마주한다. (나 역시 그렇고...)
저 사람이 이상하니까, 저 사람 때문이야!라고 탓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근데 사사건건 부딪히고, 만나야만 하는 사람이라면..?
못 넘어간다. 매 순간 걸리고, 걸리고, 또 걸려서 넘어진다. 싫어졌다, 미워졌다, 증오했다, 혐오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미워 죽겠는 사람이 생긴 이때야말로
내가 내 그림자를 직시하고 마주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이다.
그렇다. 저 싫어 죽겠는 인간은... 내가 너무 싫어 죽겠는 저 사람이 가진 두드러진 특징은 내 그림자일 확률이 높다. 만약 이유 없이 싫다면 더더욱 내 그림자일 확률이 높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다 : 통합을 향하여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다. 그림자가 있으면 빛이 있다.
둘 중에 하나만 있을 순 없다는 것은 진리다.
어떤 면이 좋다면, 그 좋은 것 때문에 또 힘들 수도 있다.
어떤 면이 싫은데, 그 싫은 것 때문에 또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정말 인간의 모든 면은 드러나는 빛이 있다면 이면의 그림자가 있다. 이 두 가지를 모두 봐주는 것. 융은 이것을 통합이라고 불렀는데,통합이야말로 성숙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차원적인 정신적인 활동이다.
이것을 알고, 나뿐 아니라 타인에 대해서도 통합적인 시선에서 바라봐 주는 것.
정말 어렵지만 정말 성숙한 태도이다.
아까 그 사례로 돌아가 보자.
너무 남만 잘 챙기던 내 내담자 아이는 '페르소나'만 신경 쓰며 한쪽의 극단으로 치우쳐져 있었다.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며 좋은 평가를 받는다는 "빛"이 있으나, 자신을 전혀 바라보고 돌봐주지 못해 어딘가 우울하고 억눌렸던 "그림자"가 있었다.
반면 너무 싫은 저 친구는 자기만 너무 잘 챙기느라, 남을 전혀 바라보고 존중하지 못하는 "그림자"가 있지만, 본인은 자유하고 유쾌하다는 "빛"이 있었다.
내 입장에서 거슬리고 싫다고 "쟤"가 저렇게 사는 것에 대해서 내가 어찌할 순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나는 이 미워 죽겠는 경험을 통해 한 단계 더 성숙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나는 왜 이렇게 저 친구가 싫지? 밉지?"
"막상 크게 피해를 입은 것도 없는데... 나는 왜 저 친구의 행동이 이렇게까지 거슬리지?"
"나는 왜 쟤가 싫어 죽겠는데도, 거절을 못하는 거지?"
저 친구를 통해 역으로 내 모습을 비춰보고,
내가 억눌러왔던 내 그림자를 마주해보며,
마침내 이 그림자를 발견해보자.
그리고 어떤 모습을 발견했든지 이 역시 나의 한 측면이라는 것을 기꺼이 끌어안고 수용해 보자.
그렇다고 내가 완전 반대의 모습으로 살게 될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내 안에 내가 몰랐던 모습을 직면하고, 인정하고, 수용해 보면서 너무 극단적으로 치우쳐 살고 있던 내가 조금은 더 진정한 나를 위한 삶으로 한 단계 더 자라날 수 있게 된다.
내가 너무 남만 챙기느라 스스로를 억압해 오기만 했다면 반대로
친구들 사이에서 내가 먹고 싶은 것, 내가 가고 싶은 곳도 표현해 보고,
남들 얘기를 듣기만 해 보는 게 아니라 내 생각과 내 주장도 용기 내서 이야기해 보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나도 받아들여진다는 걸 체험해 보면서,
그렇게 그림자를 통해 진정한 나를 또 찾아가 보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나 스스로에 대해서도 더 자유롭게 되지만, 신기하게도 내가 미워 죽겠는 저 친구도 수용까지는 아니더라도 지금 이 정도로 미워지지는 않게 되며 미움에서 좀 더 자유해질 수 있다.
미워 죽겠는 저 인간의 어떠한 면을 통해 내 그림자를 마주하고 인정해 보면서
나뿐 아니라 타인에 대해서도, 그리고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도 통합적인 관점과 함께 더 넉넉하고 너그러운 태도를 갖게 되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