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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담하는 쏘쏘엄마 Jun 01. 2022

당신은 우울할 수 있는 능력이 있나요?

당신은 언제, 무슨 상황에서
나의 한계를 마주했나요?

가족?  외모?  공부?   대인관계?  일?  돈?  육아?......


인생이 쉽지 않은 이유는

우리의 앞에 놓인 크고 작은 한계를 계속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

내 한계를 마주한다는 건 결코 유쾌한 경험은 아니다.


나는 언제 한계를 마주했더라 떠올려 볼 때, 생생하게 기억나는 두 개의 에피소드.



첫째 딸로 태어난 나는 집안에서 공주와 같은 대우를 받았다. 아니 공주였다. 부모님은 나를 진심으로 세상에서 가장 예뻐했다. 나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분명 거울이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랬던 나는 한계에 부딪혔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만났던 내 단짝은 우리 학교에서 제일 예쁜 애였다. 6년 내내 붙어 다니면서 나는 깨달았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예쁘지 않구나, 나는 그냥 평범한 여자아이였구나. 난 공주가 아니구나"


내가 좋아했던 남자애가 내 단짝을 좋아한다는 걸 알았을 때의 그 엄청난 실망감은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 뒤로 안타깝게도(?) 청소년기 내내 이상하게 내 주변에는 진짜 예쁜 애들이 가득했다. 짜증 나지만 친한데 어떡해....


사춘기의 기간 동안 지겹도록 나는 매일 내 한계에 부딪혔다.


외모뿐이었을까, 나는 내가 굉장히 똑똑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공부를 안 해도)  

초등학교 2학년, 수학 시험을 봤고 선생님이 성적 순대로 시험지를 나눠주는데 나는 반에서 제일 마지막에 시험지를 받았다. 그때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지금도 생생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 어린아이가 무기력해졌다. 생각보다 나는 별 볼일 없겠다는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는 게 지금도 기억난다.


이밖에 크고 작게 마주하는 한계 상황에서, 나는 열등감을 선물 받았지만 (예전에도 말한 적이 있듯이) 그 열등감을 나름 성장의 기회로 잘 삼아 꽤나 바람직하게 극복해왔다. 뭐... 타고난 건 어찌할 수 없지만 말이다.


여하튼 그래서 지금은?

인생이 참 그렇다. 하나 넘어가면 또 하나가 있고... 특히, 살며 받았던 상처와 버무려진 어떤 지점은 넘어가지 못하고 내 안에 고여 안팎에서 지속적으로 날 괴롭힌다.


그렇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매일 한계에 마주한다. 체력의 한계, 대인관계에서의 한계, 성격의 한계, 시간의 한계, 외모의 한계, 언어능력의 한계, 집안일의 한계, 엄마로서의 한계..............

아니 극복해도 극복해도 또 다가오는 한계 상황에서 나는 또 너무 힘들어진다.  



한계에 맞닥뜨리면 마음이 땅으로 꺼진다.

그래도.. 이 포인트에서는 내가 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사실 내 착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 세상이 흑백으로 바뀌면서 마음에 껌껌한 어둠이 가득 들어서는 느낌이다.

가만히 그 어둠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우울감에 끌려들어 가 허덕이게 될 때도 있다.


그리고 나는 며칠 전 지나칠법한 아주 사소한 사건 하나에서 나의 한계를 또 마주했고,

나는 정말 우울해졌다. 드러난 내 한계에 계속 주목이 가고, 두렵고, 막막함에 휩싸였다. 근데 이번에는 화가 나거나 억울하기보단 우울했다.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지 않고 그냥 나를 한 번 제대로 마주하고 싶어졌다.

이 지점은 정말 많이 피해 다니고 현실을 부정해왔는데 그냥 이제는 마주하고 싶어졌다.

설사 이것이 내게 엄청난 상실과 우울을 가져올지라도. 자유롭고 편해지고 싶다.


이번에 나는 "우울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우울적 자리"로 들어갈 수 있었다.






우울의 자리를 지나야만 성장할 수 있다.  


그렇다면, 태어나 우리가 가장 처음 마주하는 한계는 무엇일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기는 좋은 것(good)과 나쁜 것(bad)를 통합하지 못한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아기는 나를 실망시키고 화나게 하는 엄마가 사실은 나를 사랑해 주고 잘해주는 좋은 엄마와 동일 인물이라는 느낌을 유지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엄마가 나를 만족시켜줄 때면 우리 엄마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정말 엄청난, 완벽한 존재이다. 그런데 이 엄마가 나를 좌절시키기라도 하면 아기는 마치 엄마를 잃은 것처럼 엄청나게 울고 떼를 쓴다. "엄마가 지금은 나를 화나게 했어도 대체로 엄마는 내게 잘 대해줬잖아? 그러니 한 번만 참자"라고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아기에겐 없다. 그냥 지금 이 순간에는 완벽하고 좋은 내 엄마가 사라지는 것이다.


멜라인 클라인은 이러한 현상을 편집-분열의 자리(paranoid-schizoid position)이라고 명명한다. (아마도 아직 어린 아기가 분열된 포지션을 갖게 되는 심리학적 이유는 분명 있을 것이다. 아기는 너무 연약하기에 나쁜 것을 바로 내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이런 것들을 다 같이 볼 수 있을만한 인지 발달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니까.) 아기는 분열의 자리에서 엄마라는 한 대상에 대해서, 다 좋거나 다 나쁜 상태를 왔다 갔다 하며 경험한다. 그러니 세상 최고로 행복했다가도 금세 견딜 수 없는 분노로 휩싸이기도 한다.


어느 정도 통합이 가능해진 어른이 된 엄마로서는 아기가 보이는 이런 분열의 모습은 상당히 미성숙하게 느껴진다.  얘 왜 이래..?


그렇지 않은가.

좋을 때는 나쁠 때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나쁠 때는 좋을 때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데 이것이 어떻게 성숙하다고 볼 수 있겠나. 자연스럽게 아이가 성장하면서 따르는 성숙에는 이 두 개를 통합하는 능력이 요구된다. 너무 나쁘고 좌절스러울 때 좋은 걸 볼 수 있는 능력, 너무 좋을 때도 조심하고 대비할 수 있는 능력, 이것은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성숙한 태도이다. 통합이 되는 사람은 일관성이 있으며, 여유롭고, 용기 있다.  


그런데... 분열적 자리에서 통합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성숙의 자리까지 나아가기 위해 중간에 반드시 꼭 거쳐야 되는 한 단계가 있다. 멜라인 클라인은 모두 좋고 (All good) 모두 나쁜 (All bad) 단계에서 발달되고 발전하면, 그다음에 찾아오는 단계는 "통합"이 아니라 "우울"이라고 말한다.


왜 그럴까?


아기는 현실을 알아버린 거다.

엄마가 100% 좋을 수만은 없다는 걸. 엄마가 완벽하지 않다는 걸.

아기에게는 전적으로 100% 좋은 대상을 상실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울하다.


멜라인 클라인은 이것을 우울의 자리(depressive position)이라고 불렀다.



다행히 모든 면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다.

우울한 자리에서 얻을 수 있는 엄청난 성장의 포인트가 있는데 바로

100% 좋은 대상(자기)은 상실했을지라도, 100% 나쁜 대상(자기)도 없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통합되고 여물어진다.






우울의 자리에서
 우울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그러니 "우울할 수 있는 능력"은 성숙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걸지도 모른다. (적당해야겠지만)  

문제와 어려움을 회피하거나 억압하지 않고 마주하면 우울할 수밖에 없지만, 우울해 봐야 놓아줄 수 있고 지나갈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지나다 보면 나의 어떠한 모습이라도 용기 있게 마주할 수 있는 때가 또 온다.



내가 생각한 것만큼 내가.... 하지 않더라도,

그걸 마주하고, 직면하고, 너무 싫지만 인정하게 되더라도,

내가 예상했던 것만큼 내가 무너지거나 큰일이 나지 않는다는 것.

내 생각만큼 두렵고 무서운 일들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배워간다.


이 우울의 자리를 견디고 마주가다 보면,

실망스러울 순 있지만 이만하면 살기 괜찮은 현실적인 나의 세상을 만난다.

돌아보니 또 그렇게 살아왔다. 내가 공주가 아니라서 마주했던 우울함도, 내가 생각보다 똑똑하지 않아서 마주했던 우울함도 힘들었지만, 무기력하고 우울함을 넘어 현실적인 이만하면 괜찮은 나를 만나왔다.


그러니 지금도 우울하면 마음껏 우울해 봐도 괜찮은 거 같다.

불쾌하고, 더럽고, 좌절되고, 화나고, 실망스럽고, 짜증 나는, 이 온갖 감정이 뒤섞여 결국 나에 대한 자책과 연민으로 이어질지라도 그냥 꾹 참고 내 감정을 직시하고 견딘다면,

이다음에 찾아오는 것이 바로 "통합"의 자리일 테니까.

(이거 진짜 힘들다. 안다. 그래서 스스로 안되면 상담자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그래도.. 엄청나게 흔들리고, 휘청거리고, 위험하다고 느낄지라도 꾹 참고 이 자리를 버티다 보면 진짜 찐 성장이 찾아올 것임을 믿는다.


그래서 나는 지금 우울하지만 성장통이라고 여기며 감사하기로 했다.

지금껏처럼 이 모든 시간들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을 기대하기로 했다.


이번에 한 번 내 한계에 제대로 직면하고 마주해보자! 맘껏 우울해져 보자!

내가 너무 보잘것없이 느껴지고, 불쌍하고, 우울해져도 맘껏 머물러보자.

잘 마주해보자. 아픔과 고통을 환영하자. 잘 견뎌보자.

인생이 다 이런 거 아니겠는가.


인생이 꽃밭만은 아니라는 것, 잘 알지만 새삼스레 알 때마다 참.. 그렇다.

그래도 어딘가에서 나와 같은 경험을 겪고 있는 누군가에게,

이 글이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되길 간절히 바란다.


우리 같이 힘내 봐요

저도 당신도 응원합니다.







ps.

늘 내 글은 좀 희망적으로 끝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기도의 자리에서 하나님은 내게 늘 희망을 주신다.

또한 내가 생각하는 삶이 그렇다. 희망이 우리를 자라며 살게 한다고 믿는다. 물론 너무 고통스러우면 희망이고 뭐고 다 던져버리고 숨어버리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럴지언정 어디 저 구석에라도 희망은 있다. 먼지 한 톨의 희망이라도 발견하면 또 거기서 시작해서 나름대로 살아갈 수 있다. 그러니.. 고통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은 자원이며, 그 자체로도 너무 값지다고 생각한다. 아마 앞으로도 나는 어둠 속에 한 톨의 빛이라도 계속 찾아보고 나누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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