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우리가 일으키는 폭발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면 언제나 그림을 그린다. 생각을 담아 머리로 구도를 잡고, 마주하는 눈으로 상(像)을 좇아서, 속삭임이 젖어드는 귀로 색을 골라, 향이 흘러드는 코로 물감을 찍고, 달콤함을 머금은 입술로 호흡을 가다듬은 뒤, 두근거림을 느끼며 마음으로 붓을 잡고, 따스함이 닿는 손으로 첫 선을 긋는다. 그렇게 수많은 감정들을 쌓으며 붓질을 얹어 그림을 완성해나간다.
더불어 이 그리기는 결코 일방적인 행위가 아니다. 내가 너를 보고 그림을 그리듯이, 너 역시 나를 보고 그림을 그린다. 내가 너의 행동과 말투, 습관을 기록하며 뿌듯함에 잠겨 있을 때, 너 역시 나의 것들을 습득하며 흐뭇함에 깨어있다. 화폭과 화풍은 다를지언정, 한 명은 붓을 잡고 다른 한 명은 의자에 앉아있을지언정,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은 그 어떤 것보다 명확하다.
우리는 서로의 주체다. 관습과 통념의 전복이라는 그 깨부숨의 희열을 덧칠하고, 살아오면서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에게 너의 존재로 응수한다. 이러한 역습이 우리의 사랑이다. 단 하나의 의미로만 귀결될 수 없을 사랑의 갈래에 우리의 정의를 추가한다. 아울러 마지막의 짧은 포옹을 긴 시선으로 이어 붙이며, 소망한다. 음악이 끝나지 않기를. 당신이 뒤돌아보기를. 이 그리기가 멈추지 않기를.
영화는 철저히 마리안느의 시선을 따른다. 준(準) 전지적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지만, 엘로이즈는 물론이고 소피 역시 마리안느를 거치지 않고서는 단독으로 바라볼 수조차 없다. 피사체로서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마리안느가 ‘제목’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부터, 우리는 온전히 그녀에게 이입되어 타오르는 여정에 오른다.
캔버스를 건지기 위해 직접 바다에 뛰어들고, 무거운 짐을 가득 들고 언덕에 발을 디디는 데서 일단 마리안느에 대한 기본적인 탐색을 마칠 수 있다. 특히 젖은 캔버스를 곁에 두고 젖은 몸을 말리는 장면에선, 그녀 자신이 캔버스를 상징하며 다른 누군가는 그 하얀 바탕 위에 수놓아질 그림을 상징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레 새겨진다.
엘로이즈의 어머니로부터 ‘미션’을 내려받은 후에는 혹시 들키지 않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을 함께 부여잡게 되고, 바람 때문에 얼굴을 가리고 나온 엘로이즈를 마주할 때는 저 얼굴을 어떻게 드러내게 만들지 같이 고민하는 시간도 가진다.
엘로이즈가 마리안느의 첫 초상화에 비수를 꽂는 순간엔,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스크래치는 어쩔 수 없는 자존심의 상처에 애써 부들거림을 감춘다.
점점 둘의 관계가 깊어지면서부턴 수놓아지는 그림의 채도를 만끽하며 그 주어진 시간을 나노 단위로 쪼개어 하나하나 감정의 방점을 찍는다. 허나 끝은 오기 마련이고, 결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들과 우리는 가파르게 그 신화를 재현한다.
물론 그렇다고 바로 여정을 마칠 수는 없다. 아무리 단단한 사회적 방탄유리가 가로막더라도, 아직 두 발 남았다. 페이지를 확인하는 그림으로 한 발, 건너편의 실존으로 또 한 발. 저 멀리 엘로이즈를 바라본다. 그녀는 이쪽을 돌아보지 않겠지만, 혹시나 하는 여지를 간절히 바라면서.
그러다가, 어느새 우리는 마리안느를 떠나 처음으로 엘로이즈의 안으로 들어간다. 이어 서서히, 휘몰아치는 감정의 격동을 고스란히 분출한다. 그리고 소망한다. 음악이 끝나지 않기를. 거슬러 올라가서, 뒤돌아봐주기를. 더 거슬러 올라가서, 이 그리기가 멈추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