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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구리 Jul 16. 2016

여름 제주의 저녁 순간

탑동의 바다를 바라보다 문뜩 여름임을 알게 해 주는 해 질 녘

추적이는 빗줄기와 폭우가 번갈아 가며 날씨를 장악해버린 제주.


아침에 눈을 뜨니 언제 그랬냐 싶게 하늘이 바뀌어 있다.   이 변덕이 싫기는커녕 너무나 반가운 손님과 같다. 또한 망각의 동물임을 확신케 한다. 이전의 날씨를 모두 잊어버렸다.


날씨가 좋은 줄 알면서도 하루 종일 사무실 앉았거나 혹은 동분서주 하다보면 잊고 지내는 순간들이다. 그저 이 순간이 영원할 줄 아는지 얼마나 소중한 순간들인지 생각을 않고는 흘려보낸다.


저녁 무렵까지 탑동의 원도심에서 서성이며 일을 마쳤다. 이른 저녁을 마치고 나와보니 하늘은 여전히 파랗다.  드높은 기운과 청명함을 동시에 간직한 채 두둥실 제멋대로의 색과 날개를 세상으로 내보내고 있다.


이대로 집으로 들어가 버리면 바로 파묻힐 듯한 분위기. 이 날씨를 그냥 보내기에는 아직 조금은 감성이 남아있다. 바닷가로 나섰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며 서성이는데 비행기는 30초 간격으로 끊임없이 제주공항을 향해 내려앉기를 시도한다. 비행기 내려앉는 모습을 구경하는 게 싫지 않다. 

이 날씨를 그냥 보내기에는 아직 조금은 감성이 남아있다. 바닷가로 나섰다

한 가지 신기한 것은 비행기마다 착륙하는 항로가 다 같지 않다는 점이다. 착륙을 위해서는 동일한 궤적을 그릴 것 같은데 어느 비행기는 멀리서 내려가는 모습이고 어떤 것은 바로 코앞처럼 가깝게 공항 활주로를 향해 내려가고 있다.  궤도는 엇비슷해도 기장마다 착륙하는 길이 다른가. 똑같이 움직이는 것은 어려운 일인 모양이다.

비행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이 바다의 느낌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저 하늘에서 보이는 바다와 노을은 어떤 색깔과 느낌일까. 먼 나라 사람의 이야기를 담으려는 아득함으로 포장하는 나 자신을 느낀다. 비행기 타고 먼 곳이라도 가고 싶은가. 며칠 전 제주행 비행기 타는 일이 무서워하던 기억을 벌써 잊었다.


비행기 내려가는 궤적을 따라가다 보니 서쪽 바다가 노을을 준비하고 있다. 서서히 붉어오는 게 예사롭지 않다. 단순히 맑은 하늘이거나 구름이 잔뜩 끼었다는 말로는 성이 차지 않는다. 온갖 형상과 순간을 한 풍경에 담으려는 듯 다채로움의 노력이 역력하다. 

온갖 형상과 순간을 한 풍경에 담으려는 듯 다채로움의 노력이 역력하다

하늘도 오늘은 여러모로 작심을 한 모양이다. 비행기가 내려오는 동쪽 하늘은 새파란데 서쪽 비행장을 향해 내릴 때가 되면 점점 노을 진 태양 안으로 빨려들며 억지스러운 빛을 내며 태양을 벗어나는 모양새다. 그래도 인력은 비행기를 자꾸 태양과 공항을 향해 이끌고 있다. 매 30초마다 같은 일들이 반복된다. 태양이 비행기를 끌어들이거나 비행기가 마지못해 미지의 중력을 동체로 받아들이는 모양새다.


이를 아는 듯 모르는 듯 남쪽 하늘에는 하얀 달님만 덩그러니 혼자서 대기 중이다. 오션 스위츠 호텔을 벗 삼으려나. 고즈넉이 건물 사이서 기다리고 있다. '아직은 나의 시간이 아니니 해가 넘어가는 것을 기다리며 조용히 관조 중이다.' 

또 다른 비행기가 태양을 향해 돌진한다. 이번에는 비행기보다 구름이 먼저 눈에 띈다. 노을을 맞이하는 서쪽 하늘이 뭔가 못마땅한 것일까. 한참을 그리다 제 뜻대로 되지 않자 회색 물감을 붓에 칠해 온 화폭을 휘저어놓은 듯 하늘은 원래의 낙조와 이를 엉키게 만드는 회색 구름으로 뒤섞여있다. 보기 드문 모습이다. 층층의 여러 사진을 겹쳐놓은 모양이다. 


비행기는 아랑곳 않고 불빛을 반짝이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아직은 나의 시간이 아니니 해가 넘어가는 것을 기다리며 조용히 관조 중이다.' 

잠시 잠깐 태양이 구름 사이로 가리어진 사이 하늘은 마지막 불꽃을 구름 사이로 내비치며 온갖 불만과 하루의 힘든 여정을 내뿜어대고 있다. 그 하늘을 놓치기 싫다. 일그러지 태양의 잔영이 구름과 바다 사이로 붉게 비춘다. 끝을 향해 가고 있는데 더 이상 끝을 보고 싶지는 않다. 여기까지 제주 여름 바다는 새로운 신선함을 보여준다. 내일이면 다시 비가 온다고 한다. 그 날씨를 맞기 전 휴지기에만 보여줄 수 있는 신선놀음이다.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를 판이다. 시간이 가는 줄 모른 채 해가 뉘엿거리는 탑동의 거리는 제주의 하루를 또한 수놓았다.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집을 향해 나섰다. 왠지 나이든 감성도 소중한 순간일 것이다. 그 고리타분한 감성마저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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