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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구리 Oct 11. 2016

동부오름군의 숨은 신비_비치미오름과 돌리미오름

흔치 않은 오름길(장문이니 주의 요망, 대충 보고 넘어 가시길...)

수분은 가득 차다 못해 넘쳐흘렀다. 빗물이 넘쳐흐른 곳은 창가의 벽이었다.

벽에는 곰팡이가 번지고 그 곰팡이의 냄새에 코가 마비돼 고약한 냄새도 맡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아침이 되자 곰팡이의 퀴퀴한 냄새에서 벗어나려는지 열린 창밖으로 서늘한 기운이 들어왔다. 그래도 춥다는 느낌은 아직이다.


멀리 한라산 쪽으로 검은 구름이 몰려든다. 이곳은 멀쩡하니 조금씩 햇볕도 비추는데 그 볕이 저곳까지 가기에는 아직 먼 모양이다. 속도가 느리다. 가보지 않을 곳을 염려할 일은 아니다. 그곳도 여전히 비와는 상관없겠거니 차를 타고 나섰다. 딱히 목표를 정하지는 못했지만 간단하게 갈 수 있는 곳은 동쪽의 오름군락이다. 지난번 백약이 오름에 올라 서쪽을 바라보다 벙거지 모자를 뒤집어쓴 개오름과 입구에서 팻말을 보았던 민오름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그 가운데 애매한 위치에 애매한 높이로 이어져 있는 오름을 잘 모르겠다. 무시할 의사는 없지만 특징을 딱 잡아서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지도를 열고 위치를 확인했다. 이름은 조금 더 크고 번영로 쪽에서 가까운 것이 비치미오름이고 금백조로에 가까운 것이 돌리미 오름이다. 꽤나 특색 있는 이름 같지만 사실 오름의 형상이나 이미지를 전혀 알 수 없는 이름일 뿐이다.

무시할 의사는 없지만 특징을 딱 잡아서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차를 몰고 민오름을 거쳐 이승만 별장을 가보려 입구에 도착했지만 방역문제로 출입을 삼간다는 팻말이 괜히 입구에서 방문자의 의욕을 떨어뜨린다. 다시 비치미쪽을 향해 간다. 개오름은 언제든 갈 수 있지만 비치미는 쉽지 않을 듯하다. 표선 방향으로 달리다 성불오름을 우측에 두고는 잠시 후 U턴을 했다. 다시 돌아오다 보니 큰길가에 팻말이 하나 섰다. 비치미 오름. 이날 본 오름에 대한 설명은 이것이 전부다.

입구를 지나고 작은 개울을 건너자 차가 다닐 수 있는 다리가 나오고 정처 없는 목장이다. 사유지 목장 너머로 완만한 능선의 오름이 눈에 들어온다. 삼나무로 온통 뒤덮인 비치미 오름은 바라보기만 할 뿐 어디로든 들어가는 길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목장 너머의 저 오름 역시 사유지인 모양이다.

삼나무로 온통 뒤덮인 비치미 오름은 바라보기만 할 뿐 어디로든 들어가는 길이 보이지 않는다

혹시나 하는 기대로 목장을 따라 길을 걷는다. 농사를 짓기 위해 차들은 드나들만한 곳이지만 사람들이 지나칠 만한 흔적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은 채 어느새 가을임을 알리려는 듯 억새가 허리 이상으로 높이 자랐다. 조금씩 가을 억새가 갈색을 띠기 시작했다.

목장의 담장이 끝나는 곳 너머로 돌담이 쌓여있고 철망이 둘러져 있다. 돌담이 다소 허술해 보인다. 더 이상 걸어 들어가면 입구를 찾을 수 없을 뿐더러 정상과도 멀어지지 않을까 하는 초조함이 무작정 발길을 담장으로 이끈다.


주인장의 허락 없이 수많은 월담객들이 있었는지 새로운 철망이 옛 철망과 뒤엉켜 있다.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다. 살짝 철망을 제치고 담장을 넘는다. 바지 곳곳이 철망에 걸려 찢기지만 탈옥하는 기분으로 마음 급히 담을 넘는다.

삼나무 숲으로 들어서자 밖에서 보던 이상으로 많이 어둡다. 이러다가는 공포에 질려 죽겠다. 마음을 가다듬는다. 어디로 갈 것인가? 차분히 길을 바라보며 사람들이 다녔던 흔적을 찾아본다. 이곳에 등산길 리본이 걸려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정상을 향해 천천히 길인 듯 싶은 곳을 찾아 나선다.

집채만 한 황소가 중턱에 앉아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놀란 것은 내가 아니라 저 녀석일 터다

중간쯤 오르다 보니 인기척으로 깜짝 놀란다. 돌아보니 인기척이 아니다. 집채만 한 황소가 중턱에 앉아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놀란 것은 내가 아니라 저 녀석일 터다. 자신의 생활 근거지를 누군가 무단으로 침입해 자신을 깨웠으니 말이다. 정체불명의 인간이 경고도 없이 불쑥 들어왔으니 놀랄 만도 하다.


이곳이 아주 오지는 아니라는 안도감으로 걷지만 아무런 인기척도 없이 어두움과 스산함을 함께 하는 숲을 걷는 일은 참으로 싫은 일이다. 내가 이곳을 왜 왔던가. 매번 이런 인기척 없는 오름을 올 때마다 이 음산함에 소름 돋으며 후회를 하지만 다음 주가 되면 여전히 좀 더 음산하고 인기척이 없는 오름을 찾아 나선다. 이쯤 되면 중독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길이 막혔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게 가시덤불이 길을 막아서고 삼나무 군락도 서서히 끝을 보인다. 길을 찾아 서서히 옆으로 돌아가 본다. 올라갈 수 있을 듯한 길스러운 곳이 보인다. 어렵게 그곳을 통과하고 뒤를 돌아보니 누군가 리본을 묶어두었다. 내가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은 아닐 뿐더러 내 앞의 누군가가 다음 사람을 위해 이 같은 배려를 해 두었다는 점에서 감사한 마음이 든다. 무엇보다 음산한 숲 속을 벗어난 점에서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이제부터는 어두운 숲이 아니라 너른 초지가 길을 형성하고 숲은 피해갈 수 있다. 앞쪽에 비치미오름의 정상 같은 곳이 보인다. 옆에는 숲으로 이뤄졌지만 그 가는 길은 목초지로 길이 이어져 있다.

내가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은 아닐 뿐더러 내 앞의 누군가가 다음 사람을 위해 이 같은 배려를 해 두었다는 점에서 감사한 마음이 든다

모든 길이 지뢰밭이다. 소 인듯 싶은 배설물이 한걸음 앞마다 모든 길에 널려있다. 조심스럽게 걷지 않으면 낭패를 볼 일이다. 이날의 걸음을 막아서는 2가지 장애물이 앞으로 계속해서 이어져 있다.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고 방목된 소들만이 뛰어노는 이곳에는 앞에서 언급했던 소똥의 장애물을 피하느라 하늘을 쳐다보기가 쉽지 않다. 잠깐 동안의 한눈팔이는 물컹하고 미끈한 느낌과 함께 신발 바닥의 불쾌함을 하루 종일 달고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길로 나있는 곳을 소똥이 죄다 장악했지만 그 옆을 걸어도 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만큼 한가한 목초지가 정상까지 이어져 있다. 길을 잃을 일이 없다. 정상에 다가서자 앞뒤로  동부 오름 군락이 서서히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는 보기 드문 풍경이다. 그동안 이 오름은 언제나 배경으로 역할이 한정되어 있었다. 동쪽에 늘어서 있는 백약이 오름이나 좌보미 오름에서 보면 서쪽의 눈을 건너뛸 수 있는 징검다리와 같은 역할을 할 뿐 특별한 눈길을 받을 오름이 아다. 서 멀리 한라산과 그 언저리의 오름들이 크게 눈에 띈다. 서쪽의 큰길 건너편에 성불오름과 영주산이 아주 가깝게 보인다. 차를 타면서 눈에 쉽게 들어오는 오름이지만 막상 목적지로 삼기 쉽지 않은 오름들이다.  크나큰 영감을 받기에는 쉽지 않은 구조인지라 사실 다녀왔다는 기억 외에는 많이 남아있지 않다.


아마도 이 오름이 성불오름이 아닐까 싶다.
 잠깐 동안의 한눈팔이는 물컹하고 미끈한 느낌과 함께 신발 바닥의 불쾌함을 하루 종일 달고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정상이다.  이미 숲 속의 음산한 공포는 초원과 억새가 나타나자 언제 그랬냐는  사라져 버린다. 비치미 오름은 말발굽형 오름이다. 온전한 분화구 대신 한쪽이 트인 오름인 관계로 한 바퀴를 돌아 제자리로 오는 능선 걸음걸이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능선은 풀밭이 지속되는 가운데 끝머리에서 갑자기 아래로 내려가는 비탈길이 나온다. 오름 능선의 하강길이자 옆에 있는 돌리미 오름으로 연결된 길이다.

능선을 걸어가는 앞쪽이 오름이 봉긋한 모양새를 하며 연이어 이어져 있다. 이제 구분이 된다. 앞에 보이는 것이 백약이 오름이고 뒤편이 좌보미오름이고 백약이오름 왼쪽 뒤편이 동검은이 오름이다. 이쯤 되면 이쪽 오름의 모양새를 조금씩 익혀가는 기분이 든다.

반복학습의 효과가 분명하다. 여러 번 올라 다양한 모습을 눈에 담으니 그 모양새가 점차 익숙해져 간다.


반복학습의 효과가 분명하다. 여러 번 올라 다양한 모습을 눈에 담으니 그 모양새가 점차 익숙해져 간다

반대편을 뒤돌아보니 성불오름과 영주산이 보인다. 조만간 성불오름에서 바라보는 개오름과 비치미등의 모습이 궁금하다. 사실 오름의 모양새는 그 모양이 다 그 모양이다.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이 뭐라 하겠지만 어느덧 오름의 풍경이 익숙해지고 가끔 친구들이나 지인들이 설악산이나 지리산을 올라 감회를 적어놓은 글을 보고 사진을 보게 되면 "아! 육지의 산이 여기와 달랐는데 내가 어느덧 잊어가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인 셈이다.

민오름의 모습이 삼나무에 가득 덮힌채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승만별장 입구가 막혀있어 출입이 안되는 듯 싶었지만 다음에는 갈 수 있지 싶다.
비치미오름의 말굽형 분화구의 모습

이제부터는 능선을 내려가 건너편 숲 속에 가리어진 돌리미 오름을 가는 길에 들어섰다. 비치미는 이대로 마치고 저 먼 곳으로 가자. 근데 중간에 보이는 목초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삼림으로 가득 차 있다. 저기를 또 지나야 하는구나는 생각이 드니 갑자기 짜증이 앞선다. 왜일까. 아까 올라오면서 숲의 음산함이 몸에 배어있는 모양이다. 다시 그곳을 지나고 싶지 않다.

아까 올라오면서숲의 음산함이 몸에 배어있는 모양이다. 다시 그곳을 지나고 싶지 않다

며칠 동안 비가 내린 때문인지 흙은 화산석(스코리아)의 전형적인 색을 보이면서 깊은 골이 패어있다. 골을 피하면서 내려가다 보반대편 돌리미의 운치를 제대로 느낄 겨를이 없다. 내 발길은 점점 숲 속을 향해간다. 다행히 길이라고 여겨지는 흔적이  명확하다. 이쯤이면 문제 될 것이 없다.


흙 중간에 피어있는 민들레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 척박한 흙에서도 민들레는 민초의 삶처럼 처절하게 자신의 생명을 꽃피우고 있다. 그냥 지나기 쉽지 않다. 약간의 경의를 표하며 밟지 않으려 조심스레 발길을 옮긴다.

숲이 그다지 어둡거나 힘들지 않다. 패어있는 길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탁 트인 목초지가 나왔다. 설마 이곳까지 소들이 풀을 많이 뜯으러 왔을까 싶지만 그 설마는 나만의 가정이고 여기도 여전히 발길 밑에는 배설물이 가득하다.

돌리미를 올라가면서 내려온 비치미의 모습이 궁금해진다. 소돔과 고모라가 억지로 뒤를 돌아보듯 바라보다 걸음이 저절로 멈춰진다. 결과는 비치미를 담으려 하니 점점 높아져 가는 모습에 가슴이 답답해진다. 저기를 다시 올라가서 원래대로 음산한 숲과 소와 기싸움을 한 후 담장을 넘고 왔던 길을 되돌아 가는 상상 괜스레 싫어진다. 다른 방법이 없을까? 돌리미 정상을 올라가는 순간부터 새로운 방법을 찾게 된다. 다분히 나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갑자기 힘이 솟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길이 없는 곳을 찾아 나서는 용기가 다시 샘솟았다. 그래 이번에는 새로운 길을 개척해보자는 욕구가 서서히 솟아오른다.

반지의 제왕에서 프로도처럼 거미에 칭칭 감겨 거미 밥이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앞선다

몸은 서서히 돌리미를 향해 가는데 불현듯 발길이 멈춰진다. 발길을 멈추는 것이 이번 한 번이 아니다. 사람은 누군가 감이 있고 순간적 위기감으로 발길을 멈춘다. 아무런 생각 없이 벼랑을 걷다가도 벼랑 앞에서 본능적으로 발길을 멈추기 십상이다. 오름길을 걸으면서도 마찬가지고 돌리미를 걸으면서 수도 없이 발길을 갑자기 멈출일이 생긴다. 사람들이 자주 다니지 않으니 나무와 나무 사이에 엄청 커다란 거미줄과 거미가 딱 버티고 서있다. 돌리미를 올라가는 와중에도 수차례 발길이 멈춘다. 커다란 거미가 오름 정상으로 가는 길을 거미줄로 막고 있다. 하마터면 반지의 제왕에서 프로도처럼 거미에 칭칭 감겨 거미 밥이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앞선다.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거미의 크기와 색깔을 고려하면 무섭다.

돌리미에서 바라본 비치미 오름 정상
왼편의 개오름과 오른편의 비치미 오름.
돌리미 정상 부근에서 바라본 개오름의 모습 개오름의 개는 멍멍이가 아니라 뚜껑이라는 의미의 제주어인 모양이다.
백약이 오름의 모습이 괜히 아련하게 보인다.
돌리미 오름에 오르기전 마지막 갈림길의 모습


여라차례 나를 멈춰서게 만든 거미와 거미줄. 이날 하루종일 나는 거미줄과 혈투를 벌여야 했다.

돌리미 오름 정상에서 주변 풍경에 대한 흥취를 한껏 높이는데 서서히 해가 질 기미가 보인다. 해가 진다기보다는 먹구름이 몰려올 기미다. 천천히 온 길을 되돌아가면서 이미 내려와 버린 비치미 오름을  바라본다. 다시 저곳을, 올라왔던 길을 되돌아 가면 문제는 전혀 없을 터이다. 사람의 마음, 특히 내 마음은 그렇지 않다. 스마트폰을 열어 지도를 살핀다. 독도법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이쯤이 계곡을 뜻하거나 이곳이 완만하다는 정도는 읽을 수 있다.


처음 목장의 입구에서부터 이어져온 도로가 돌리미 오름 아랫까지 이어져 있다. 그 도로를 목표로 내려가면 나머지는 편안한 길로 원래 출발지를 찾아갈 수 있을 듯싶다. 돌리미 오름 정상을 내려가면서 왼쪽으로 난 길과 비슷한 흔적을 찾으며 계속 간다. 돌리미와 비치미의 경계에 이르렀을 때 왼쪽으로 난 흔적이 보인다. 용기를 내어 그곳을 따라가다 보니 길이 막혔다. 비탈이 깊은 계곡이 나타난다. 이곳을 계속 갈 수는 없다. 잠시 자리에 앉아 내가 걸어온 길을 되새겨본다. 어디서부터 길을 잘못 들었을까. 분명 시작은 확실이 맞은 듯싶다. 쭈그리고 앉아 한참을 고민하다 다시 되짚어가며 오던 길을 간다. 순간 길이 보인다. 비탈진 계곡이 시작되기 전 반대편으로 이어진 길이 보인다. 그렇구나 내가 무심했음을 알게 된다. 다시 활기를

더하며 길을 채촉한다. 완만한 능선만 계속 내려가면 길은 나오게 되어 있다. 여기는 곶자왈처럼 우거진 숲 속도 아니고 한라산 자락의 오름들처럼 아주 오지도 아니다. 다만 사람들의 인적이 드문 곳일 뿐이다.


내려가면서 끊임없이 발길을 멈춘다. 거미가 내 길을 막아선다. 다시 조심스레 돌아갈 길을 찾다 불가피할 경우 나뭇가지로 거미줄을 걷어가며 길을 재촉한다.

모자와 머리 그리고 온몸에 거미줄이 칭칭 감긴다. 기분이 좋지 않다. 길은 분명히 계속 이어지는데 거미줄 역시 끊이지 않는다. 사람이 다닌 흔적은 있지만 사람들이 다니는 길은 아니다.

여기는 곶자왈처럼 우거진 숲 속도 아니고 한라산 자락의 오름들처럼 아주 오지도 아니다. 다만 사람들의 인적이 드문 곳일 뿐이다

어느 지점에 이르자 갑자기 산담 즉, 묘지들이 즐비하게 나타난다. 이곳도 터가 좋은 모양이다. 다양한 묘비와 다양한 성씨가 나타난다. 그렇다면 성묘하기 위해 자손들이 드나드는 길이 있을 것이고 길은 곧 이어질 것이다.

오름에 처음 들어오면서 만났던 철조망이 눈에 띈다. 곧, 출구가 나올 것을 믿기에 철망을 따라 걷는다. 길의 흔적이 철망을 따라 나있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 철망에 난 길은 어쩌면 철조망을 치기 위해 만들어진 길일 뿐 길이 아닐 수도 있다. 어이없는 판단이다.

한참을 걸어도 철망만 이어질 뿐 밖으로 이어지는 출구가 없다. 그렇다면 어느 순간부터 내가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참 전부터 지도를 펴본 결과 지도에 표시된 길이 바로 아래 있는데 내가 선 현 위치는 그곳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평행선을 그으면 걷고 있는 것이다. 순간 알아버렸다. 저 철조망 밖이 바로 길이라는 것을. 나는 제대로 된 길을 코앞에 두고 철조망 안쪽을 걷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순간 용기를 내어 철조망을 다시 넘는다. 그 철조망 너머로 수기의 산담이 줄을 서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무덤가를 지나니 낯익은 길이 보인다. 저 앞쪽으로 밭에 농약을 치기 위한 트럭과 농약 탱크가 눈앞에 보인다. 사람이 느껴진다. 이제야 나는 길에 나왔다. 기분 좋은 발걸음으로 원래 출발점을 향한다. 이곳을 계속 걸으면 원래의 출발점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농약을 치던 농부는 갑자기 예상치 않은 곳에서 등산객이 나타나니 의아한 표정이다.


육지 같았으면 영락없는 무장공비인 셈인데 제주에 그런 인물이 존재할 리는 없고 그 농부는 여전히 내가 어디서 나타났는지 참으로 할 일 없는 인사라고 생각할 것이다.


출발지로 돌아가며 철망 안의 길을 다시 쳐다본다. 철망 안쪽 길은 연이어 계속되더니 내가 처음 철조망을 넘었던 곳까지 연결되어 있다. 원위치는 여기나 거기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래도 커다란 길로 걷는 것이 남의 사유지로 포함된 오름의 언저리 혹은 둘레길을 걷는 것보다는 마음이 편한 일이다.


돌아오는 길 오늘도 어이없는 오름 나들이를 한 기분이 즐거우면서도 숲 속의 음산한 기분은 여전히 깊은 공포로 남는다.


다음에는 어느 오름으로 갈길을 정할는지.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사람이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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