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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구리 Apr 30. 2017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싶은 '알진오름'

송당 한쪽 켠에 자리한 나지막한 부드러움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님과

한평생 살고 싶어


1970년대의 유명 가수인 남진의 <저 푸른 초원 위에>라는 노래의 가사말.


어린 시절 이 같은 가사를 들으며 그냥 꿈속에서만 그려보던 상황이 생각난다.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혹은 집을 짓고 싶은 수준의 그 그림 같은 초원은 어떤 모습일까를 생각했었다.


이 가사말과 참 잘 어울리는 초원을 발견했다.

송당 한켠에 슬그머니 자리를 잡은'알진오름'.  제주도에 가장 흔한 이정표이기도 하거니와 이제는 가장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대상, 오름. 그 자체가 작은 분화구인 오름 중에서도 별로 특색 있거나 이정표가 될만한 장소도 아닌 오름이 부지기수다. 그저 동네 뒷산, 아니 동산일 뿐이다.


지인이 그 앞에 밭을 사고 유기농 당근 농사를 짓는다. 최근 들어 아주 튼튼하게 창고를 지었다. 유기농 당근 농사를 하는 귀농인의 생활모습을 확인할 겸 앞으로 지을 집에 대한 궁금증과 가슴속을 꽉 채운 질투심을 억누르며 창고를 찾는다. 또 말이 창고지 그 안에 나무로 잘 짜 맞춘 휴식공간과 명상하기 좋은 공간을 보며 부러움은 '나도 언젠가는...'이라는 결기를 세우기도 한다.

그저 동네 뒷산, 아니 동산일 뿐이다

갈 때마다 그 집 뒤편에 나지막이 이어져있는 작은 동산이 눈에 들어온다. 참 누구네 동산인지 좋은 장소에 자리를 잡았네 하는 생각이 늘 마음한켠에 자리 잡도록 하는 곳이다. 분명 개인 땅이다. 철망도 쳐져 있다.

지인의 설명을 듣고 다시 그곳을 바라본다. '알진오름'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단다. 오름의 주인이 창고를 지은 자신들의 생활을 보기 위해 간간히 찾아들었고 그리하여 이제는 친하게 지내는 사이가 됐다는 설명 사이에 알게 된 오름이다. 결코 주 목적지로 삼을 만한 이정표도 없는 곳이다.


서울서 내려온 아내와 함께 맛난 커피를 얻어마시고 달콤한 과자까지 얻어먹고 난 후에 창고 주인은 알진오름을 올라가 보기를 권한다. 결코 후회하지 않을 만큼 단아하게 이쁜 장소라는 추천을 덧붙이며 두 사람의 발길을 붙잡았다. 손해 볼 일은 없으니 산책하듯 걸어보기로 하고는 인사를 나누었다.

그 부드러운 두 개의 곡선이 오름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더 정겹다

높지도 않고 거리도 창고 바로 눈앞에 놓인 곳이기에 주저함이 없다. 그림 같은 집을 지을 초원은 이리 생겼겠네. 어린 시절의 미국 드라마인 '초원의 집'에서 시골에서 뛰어놀던 미 서부의 딸들이 깔깔거리던 그 초원만 있는 줄 알았더랬는데 제주의 내가 아는 장소에도 이런 곳이 있다는 게 놀랍기만 하다.


살며시 사유지임을 알리는 철망을 사뿐히 지르밟고는 경계 안으로 들어갔다. 발목까지 닿는 풀이 한참을 펼쳐져 있다. 그 사이에 피어난 유채꽃. 그리고 이와 대조되는 꽃까지. 초원에는 나 이쁘지 하는 부드러움을 안겨주려는 꽃밭이 펼쳐진다. 깔깔거리며 젊은 연인들은 저절로 뛰어다닐 수 있는 충분한 곳이다. '나 잡아봐라~'하는 낯 뜨거운 커플놀이를 하기에 딱 어울리는 곳이다. 일반적으로 목장지역에 펼쳐진 넓은 들판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제주에는 다양한 초지가 널려있다. 대부분 말을 기르기에 어울리는 초지다. 곳곳에 퍼져있는 목장들과 알진오름의 나지막한 동산의 느낌은 참 다르다. 그 부드러운 두 개의 곡선이 오름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더 정겹다.

풀밭 사이를 천천 걸으며 정상같지 않은 정상으로 오른다. 가벼운 산책길도 이보다는 무겁고 힘들었으리라.

서천꽃밭의 초입 같은 장소를 뒤로하며 언덕을 오른다. 이번에서 시야가 반대다. 아래쪽 창고에서 바라보는 오름의 곡선이 이뻤다면 이제는 그 곡선을 벗 삼아 이어지는 옆 지역의 초지와 멀리 보이는 창고 그리고 그 너머로 이어지는 오름군락이 만들어내는 굴곡이 눈에 들어온다. 둘 다 버리기 아까우리만큼 이쁘다.


왕복 10여분이면 족한 오름을 오르내리며 그림 같은 집은 이런 곳에 지어야 한다는 아쉬움과 이런 곳에는 왠지 그림을 그리고 있는 소녀 혹은 젊은 여성과 이젤이 서 있어야 너무나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벼운 산책길도 이보다는 무겁고 힘들었으리라

그런 사람이 이곳에 홀로 그림을 그리고 서있기에는 청승맞을 듯 하기는 하다. 아니다. 그러다 보면 괜히 마차를 타고 곁을 지나는 젊은 남자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영국의 근대 소설과 영화의 장면이 눈에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어린 시절 무엇을 보고 읽었는가는 이래서 중요하다.  낮고 완만한 곡선의 오름은 아무리 봐도 많은 매력을 지녔다.


소설 같은 이야기를 상상하든 말든 부드러움의 곡선을 오름에서 읽어가며 걷는 가벼운 걸음은 우중충한 날씨에도 펼쳐진 젊음의 미소를 연상케 하는 순간이다. 기분 좋은 산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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