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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구리 Sep 23. 2017

뜻밖의 여정_큰지그리, 족은지그리와 바농오름

큰지그리의 전망대를 뒤로 하고 하산길에 오른다. 길은 매우 가파른 내리막으로 숲 사이를 직활강하듯이 내려가도록 되어있다. 아래의 삼나무 숲 출발점 뒤편 어딘가 나올 것이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올라오는 길의 허리를 끊 듯 중간에서 길과 만난다. 곧 출발점이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를 한참을 뺑돌아 온 셈이다. 아쉽고 어이없다. 그래도 완만하게 오름의 기분을 느낄 수 있었으니 무엇이 억울하리오.

말이라도 타고 돌아다녔다면 초원을 달려가겠지만 걷는 길에서는 정해진 탐방로가 나에게는 안정적인 퇴로인 셈이다

오름에서 내려온 사람들과 이제 막 곶자왈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잠시 교차하는 사이 사람들은 제갈길로 간다. 그 사이 남들과 다른 길로 살짝 발길을 옮긴다. 마치 몰래 도망치듯 걷는데 탐방로는 잘 나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족적이 만들어낸 길이리라. 이곳으로 가면 족은지그리로 가는 길인 듯싶다. 


중간에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있어 살짝 나가보니 숲 밖의 세상으로 인도한다. 너른 들판에 초원이 가득한 모양이다. 너무나 멋지고 시원한 풍경이다. 목장 어디쯤인가 싶은데 어디인지 앞뒤를 알 길이 없다. 말이라도 타고 돌아다녔다면 초원을 달려가겠지만 걷는 길에서는 정해진 탐방로가 나에게는 안정적인 퇴로인 셈이다.

길은 분명 이어져있는데 철조망이 둘러져 있다. 누군가 이 길을 수도 없이 다녔듯 철조망 한가운데가 잘려 있다. 많이 다니는 길을 교래곶자왈의 경계로 담을 쳐 놓은 듯 하지만 트래킹 하는 이들에게는 장벽 아닌 장벽일 수밖에 없을 터이다. 오름 아래쪽 길을 하염 없이 걷다 보니 이제 그만 숲 밖으로 나가고픈 생각이 든다. 숲으로 나서자 아까 잠시 나왔던 초원이 계속 이어지는 데다 숲 입구가 을씬년스럽고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숲에서 나오는 것은 괜찮지만 숲으로 들어가는 것은 왠지 모를 두려움을 준다.

큰지그리오름에서 나왔던 출구.다시 들어가기에는 왠지 모를 숲의 두려움이 느껴진다.
큰지그림오름을 나서며 본 모습
조근지그리로 향하는 목장길. 시원스러운 길과 옆으로 줄을 선 나무들이 나그네길의 즐거움을 북돋는다.
족은지그리를 가다 너른목장길을 걸으며 뒤돌아 선 모습.

이제부터는 초원을 걷는 즐거운 길이다. 예상치도 못한 목초지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단지 오름 사이에 밭이 있거나 아니면 덤불로 덮인 숲길이 이어지며 족은지그리로 이어질 줄 알았다. 그 사이에 이토록 멋진 목장길이 뻗어 있다니 여기는 꼭 다시 한번 찾아와 보리라. 걸어도 걸어도 기분 좋은 길이다. 


앞에 나지막이 펼쳐진 족은지그리를 바라보며 목장길을 걷다 보니 그 끝이 보인다. 어디선가 나갈 길을 찾아야 할 터인데 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사람들 심정은 비슷한 것이다. 이쯤에서 누군가도 출구를 찾았을 것이고 그에 맞게 출구가 있다. 이 철조망을 넘으면 또 다른 초원이다. 여기서부터는 누군가의 초원이고 어떤 경계인지는 모르겠으나 괜히 족은지그리와 큰지그리의 경계가 아닐까 하는 인위적인 상상을 해본다. 철조망을 지난 초원은 계속 이어져 족은지그리의 숲 밑에까지 이어져 있다. 그리고는 오름이 끝나버릴 모양이다. 

그 사이에 이토록 멋진 목장길이 뻗어 있다니 여기는 꼭 다시 한번 찾아와 보리라. 걸어도 걸어도 기분 좋은 길이다

한참을 걷다 보니 이리되면 족은지그리를 올라갈 일이 없어지고 그냥 초원으로 나가는 길인 셈이다. 수차례의 고민 끝에 원래의 출발점으로 돌아온다. 다시 철망을 넘어야 하는 장소가 예상한 곳에 떡하니 나를 반기고 있다. 다시 한번 내 예상대로 사람들이 트래킹을 하고 있는 모습이 상상된다. 내 머리가 오소독스 하던가 아닌 추론을 잘하던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후자라고 우기기로 했다.

앞오름이 족은지그리의 모습 그 뒤가 바농오름이다
족은지그리 가까이로 다가간 초원의 모습
족은지그리 등산로입구

잡목과 풀들로 우거진 족은지그리오름은 그 생김새와 마찬가지로 주변의 경치를 볼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 언뜻언뜻 옆 오름의 모습을 보일 때조차 숲으로 덮인 모습뿐이니 특별할 경치랄 게 없는 셈이다.  이미 예상은 했던바 이곳을 지나쳐 정상을 찍고 내려갔다는 경험만 추가하리라고 생각한다.


역시 정상의 위치조차 제대로 되어있지 않다. 여기 어디쯤이 정상일 것이라는 상상만이 가능하다. 


어느새 내 관심은 정상의 경치에 머물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이 오름에는 어떤 풀들과 나무들이 서식하는지 천천히 걸으며 살펴보면 될 일이다. 굳이 멋지 풍광을 생각지도 않았는데 그 경치를 내어주지 않는다고 이 오름을 탓할 이유야 전혀 없는 일이다.


몇몇 풀들이 눈에 들어온다. 빨간 열매가 보이고 소나무도 보이고 다양한 형태의 잡목이 보인다. 오름의 식생은 곶자왈까지 참으로 많이 다르다. 역으로 곶자왈의 생동감이 굉장히 특이하고 멋진 것이라는 점을 새삼 느끼게 된다.

정상 부근임을 확인하고 몇 걸음 옮긴다. 바로 내리막이다. 갑자기 어두운 숲이 눈앞에 펼쳐진다. 조림한 숲임을 알 수 있게 일정한 간격이 유지되어 있다. 정상 부근의 잡목들과는 확연히 다른 어두운 분위기다. 저 아래로 내려가면 바로 초원이 펼쳐질 것을 알겠다. 너무나 싱겁다. 그 싱거움에 대한 반항이랄까 갑자기 다른 길을 찾아 내려가 보자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똑같은 지도라도 N사의 맵에는 오름에서의 탐방로가 표시되어 있다. 갑자기 그 지도를 펼쳐보니 내가 내려가는 길 말고 옆으로 조금 구불구불한 길 표시가 되어있다. 혹시 지도에 나타난 탐방로는 어떤 상태일까 궁금해졌다. 

그 싱거움에 대한 반항이랄까 갑자기 다른 길을 찾아 내려가 보자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지도의 위치서비스가 정확히 얼마나 일치하는지는 모르겠으나 GPS 위치에 맞도록 길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웬걸... 그 위치에는 도저히 길이랄 게 전혀 없다. 그냥 잡목과 수풀이 우거진 모습일 뿐 아무리 우겨 길이라고 해도 잡목이 허리 부근으로 엉켜있으니 앞으로 나아가기가 도저히 어려운 지경이다. 어렵게 어렵게 아래로 뚫고 내려가는데 땀이 나면서 도저히 속도가 나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길이 아닌 숲을 그냥 온몸으로 밀고 내려가지 속도가 날 리가 없는 일이다. 


어렴풋이 보이는 목장의 초원까지는 20m 정도가 남았다. 거의 온몸을 구부리다시피 하며 나무를 제치고 내려가는 찰나. 내가 오름 탐방을 하면서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뒤쪽 어디선가 들개의 맹렬한 울부짖음이 들리기 시작한다. 순간 예전에 오름을 다니며 심리적으로 쫓기던 생각이 나기 시작한다. 발걸음을 빨리 옮기려 하지만 이놈의 잡목 엉킨 숲이 나에게 길을 내어줄 리가 없다. 속도는 안 나고 마음은 바쁘다 보니 제대로 길을 만들기보다 막무가내로 수풀 속을 헤치며 내려가기 시작한다.


더욱 무서운 것은 들개의 울부짖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개짖는 소리가 점차 가까워진다는 사실을 느끼자 순간적으로 저 개가 나를 공격할 경우 방어할 만한 막대기가 없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젠장 이곳에는 쓸만한 나무도 없네'

속도는 안 나고 마음은 바쁘다 보니 제대로 길을 만들기보다 막무가내로 수풀 속을 헤치며 내려가기 시작한다

순간 다리가 후들거리고 뒷목과 등판에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초원에 빨리 가는 길이 최선이라는 생각에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수풀을 헤쳐나가기 시작한다. 먼 거리가 아니었던지라 머지않아 내 몸은 숲은 빠져나왔다. 밖에는 너른 들판에 푸르른 초원이 한적함을 무기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순간 '살았다'는 말이 입가에 맴돈다. 여전히 들개의 울부짖는 소리가 계속되지만 나는 잰걸음으로 이 숲을 벗어나서 초원을 걷기만 하면 될 일이다. '짖을 테면 짖어봐라' 발걸음이 빨라졌다.

초원을 걸어가면서 마음이 다시 상쾌함과 시원함으로 포장되기 시작하며 안정감을 되찾는다. 그 사이 한쌍의 남녀가 경치를 보며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안녕하세요' 간단한 목례로 인사를 나누는 사이 그들은 나와 반대의 목장길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나도 이 목장길을 쭉 걸어왔으면 될 일인데 괜히 사서 고생을 했다. 암튼 다음에는 이 목장길을 걸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찾고 싶은 곳으로 찜하기를 해두었다.


목장의 정체는 모를 일이지만 한가운데 연못이 보인다. 보기 드문 장소다. 말이나 소의 물을 먹이기 위한 장소일 터지만 그들 대신에 까마귀들의 오아시스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다. 보기 드문 풍경인지라 한참을 쳐다보며 길을 재촉한다.

중간에 출구로 나오는 길목에 여기서부터 족은지그리 입구라는 푯말이 보인다. 어이가 없다. 여기서부터 얼마나 오래 가야 족은지그리가 나오는데 숲 비슷한 장소 입구에 푯말을세워놓다니...어디 한번 골탕을 먹어보라는 뜻인가. 암튼 나름 혼자서 비웃음을 보이며 다음 목적지인 바농오름으로 향한다.


바농오름에 도착하기 전 내가 열심히 걸었던 이 목장이 조천관광목장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 사실만으로도 분명 큰 성과인셈이다. 


교래 곶자왈과 큰지그리, 족은지그리에 힘을 다 뺏겨버린 덕인지 바농오름에는 커다란 기대를 하기가 쉽지 않다. 원래대로였으면 이 오름부터 오른 후 족은지그리를 갔어야 했지만 나는 반대의 길을 택했다. 

속으로 하나, 둘, 셋. 삽십이나 오십까지를 세고는 잠시 멈춰 서고 다시 걷고 그러다 보니 정상이 내 발밑에 와있다

바농오름 역시 오름 전체가 조림목으로 둘러싸여 있는 때문인지 큰 특색을 찾기가 쉽지 않다. 힘겹게 오르면서 무리를 할 수가 없으니 조금 걷다 쉬고 걷고를 반복할 뿐이다. 한 중간에 나이 든 어르신 한분이 예초기를 들고 내려오며 나와 마주친다.

"얼마 안 남았으니 힘내요"

내가 오르는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격려의 말을 하고는 빙긋이 웃고 내려간다. 말 그대로 얼마 남지 않았으면 좋겠다. 평상시 같으면 별거 아니었을 몇십 미터의 길이가 이날은 왜 이리 길게 느껴지는지... 속으로 하나, 둘, 셋. 삽십이나 오십까지를 세고는 잠시 멈춰 서고 다시 걷고 그러다 보니 정상이 내 발밑에 와있다.


그제야 아까 만난 어르신이 한 일을 알겠다. 정상 주변의 벤치와 부근의 풀들을 깔끔하게 깎은 후 내려가는 길이었던 것이다. 이 오름을 지키는 분인지 아님 자원봉사인지는 모르겠으나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덕분에 시원한 정상의 풍경을 통해 교뢔부근의 풍광을 다시 한번 구경하고는 마음을 내려앉힌다. 오늘 하루 즐겁고 역동적인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남은 것은 교래휴양림의 주차장까지 걸어가는 길이다.


평지를 걷는 길은 어렵지 않지만 속도를 내는 차도를 걷는 일은 사실 유쾌하지 않은 일이다. 그렇게 주차장에 도착한 후 남은 물을 남김없이 먹은 나는 스스로에게 이야기한다.

'오늘도 수고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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