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시작을 알리다
[편집자 주] 제주에 내려온 지 3년이 됐다. 3년이 지나도록 숨 가쁘게 달려오면서 스스로 제주에 적응할 수 있게 해 준 가장 큰 힘은 역시 제주의 자연일 수밖에 없다. 처음 내려오면서부터 지내온 제주의 자연 이야기와 생활을 다시 들춰본다. 처음에는 어찌 기록해야 할지도 모른 채 무턱대고 다녀온 이야기를 적었다. 그 3년 전부터 지내온 이야기를 이제 다시 꺼낸다.
2014년 10월 1일
첫 출근이다. 긴장된다. 얼마만의 일인가. 보도자료 하나를 작성하는데도 끙끙거린다. 아직 너무나 낯설다. 20여 년이 지났다. 순수한 의미의 기사 작성이 여전히 어색하기 짝이 없다. 기사 작성의 순간은 언제든 긴장되는 시간이다.
전화로 취재하기에도 여의치 않다. 이게 무슨 기사 작성인가 싶다. 보도자료에 다 있는 내용을 옮겨 적는 게 아닌지 싶다. 그래도 힘들다. 삶의 구력이라는 것은 여전히 어느 구석에나 유효하다.
내가 앞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그것은 예전에 했던 경험이 아직 내게 영향을 미침이 아니겠는가 싶다.
숙소를 아직 마련하지 못하고 사무실에서 자기로 결심했다. 사무실에서 잠자는 일이야 하루 이틀의 일도 아니고. 최근 들어서도 수도 없이 했던 일이지만 심정적으로 내가 갈 곳이 없다는 사실은 여전히 마음을 불안하게 만든다. 혼자서 이렇게 넓은 공간을 다 차지할 수 있는 둘도 없는 기회인데 말이다. 그래도 이번 주말만큼은 어디를 다녀와야겠다. 저 멀리를 한껏 달려보는 것도 필요하지 싶다. 지금처럼 사무실에 있어서는 내가 제주에 내려왔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할 테니.
암튼 어디든 처음은 어려운 법이다. 제주에서의 첫날도 우울했지만 사무실의 첫 출근도 쉽지 않다. 상대편들은 나를 어찌 느끼든 그들에게는 하늘 같은 경험자라고 여겨질 테고 나는 그저 예전의 기억을 대뇌이며 소란스럽게 가끔은 뻥도 쳐가며 내 자리를 증명해야 하는 사람인 것을.
사실 오랫동안 사업이나 비즈니스를 해가면서 주말의 개념을 업무와 연계시킨 적이 없다. 그런데 20대의 주말 없음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 됐다. 일이 있으면 주말은 없는 것이 맞지만 심정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느낌은 어쩔 수 없다.
천천히 가자고 한다. 나 역시 서둘 생각은 조금도 없지만 천천히 간다는 것이 무지몽매하게 지낸다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칫 그것과 동일시하는 느낌을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관성 때문이리라. 관성조차도 너무나 부러운 시간이다. 관성이 네트워크에도 존재한다면 그 관성을 한껏 끌어안고 지내고 싶다.
청산주의의 경험이 내게는 무엇이든 있지만 인적관계의 청산은 여전히 어려운 점이다. 인적관계는 내게 있어 단절의 상징에 불과한 것 들이었다. 이제 얼마나 많은 인간들을 내 인간관계의 기억에서 지워내야 하는 것인가. 숫자를 세어보자. 그래도 청산은 옳지 않다. 인생은 어디에서 어떻게 다시 만나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5년의 경험에서 얻어낸 사람들조차 지금은 그 관성이 부담스러우니 일단은 잊는데 주력하고자 한다. 문뜩 그들로부터 메시지가 오거나 전화라도 오게 되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그들에게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았는데 그들이 현재의 나를 부담스럽게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판단을 무의식 중에 내리고 있어 나 자신도 모르게 이를 깨달을 때마다 섬뜩섬뜩 놀라게 된다.
제주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제주의 사람들을 만날 시간들이지 않은가. 누구부터 할지가 문제겠지만.
하나씩 찾아보자. 역시 모르는 사람을 만나야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래서 새로움도 남아있는 것이고. 그래도 첫날이 이 정도면 그다지 나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뭐 그다지 큰 억울함도 낯섦도 없이 지내고 있고 저녁시간은 온전히 내 뜻대로 보내고 있지 않은가.
내가 바라던 것이 이런 것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면 뭔가가 나오지 싶었다. 금이 나오든 허무가 나오든 회한이 나오든 이제는 늦기 전에 뽑아내야 할 시간이라는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쉽게 가자. 뭐 더 이상 미련이 남아있을게 뭐가 있다고 초초하고 가슴 조이며 지내려 하는지. 허허.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이 되니 서울에서 연습하던 트럼펫이 더욱 그리워진다. 트럼펫을 위해 들었던 드보르작도 생각나고, 하이든도 생각난다. 하루 만에 그 생각에 잠겨있으면 적응은 그다지 나쁘지 않은 것 같다. 그럼 아마도 다음번에는 다른 생각이 나지 않을까. 서울에서 아무런 생각 없이 지나치던 것들이…
그리고 하루빨리 트럼펫을 가져와야지. 이곳에서 아마추어 동호회를 찾아봐야겠다. 나도 이미 이점에서는 늙었다. 혼자됨의 자유보다는 외로움이 먼저 찾아오는 것을 보니.
출처: http://nugul2.tistory.com/entry/제주의-첫-출근 [너구리의 제주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