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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구리 Oct 17. 2017

제주를 걷다 4_올레길 4코스 표선에서 남원을 향해

2014년 10월 25일

어디를 갈지 목요일 저녁부터 고민이다. 어느 코스를 선택할지 다양한 변수를 상정한다. 2주 전에 마친 10코스에 이어 11코스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동쪽의 걷다만 코스 혹은 성산 일출봉부터 시작할까. 여러 가지 고민을 하다가  표선이라는 지명에 집착하기로 했다.


표선의 항구는 어떤 모양일까 혹은 그 앞바다는 어떨까 여러 가지 상상을 하면서 귀차니즘을 극복하기 위해 잠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제저녁 1시가 넘도록 술자리에 끌려(?) 다닌 덕에 집에 와서 주섬주섬 가방을 싸고 머리를 다시 밀고 샤워를 하고 나니 2시 30분이 넘었다. 내일 아침은 참으로 힘겨운 선택이 되겠구나 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어김없이 7시 30분에 알람이 울리고 한 번의 선택을 더해 잠이 깨어보니 9시가 다 되었다. 일어나기 싫다. 오늘은 건너 띠고 쉴까. 근데 쉬면 뭘 하지. 보나 마나 11시가 넘어서면 할 일이 없어 괜히 안 간 사실에 후회할 텐데... 오만가지 생각을 하다가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일단은 출발하자는 생각. 


하늘이 쾌청하다. 나서길 잘했다. ATM기도 둘러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니 10시 26분. 여전히 늦는구나 오늘도 허기진 하루가 되겠다 싶었다. 오늘은 점심을 건너뗘야 겠다. 후반에는 힘들겠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에너지 소비보다 일주일간 축적된 술과 과영양이 내 몸에서 빠져나갈 기회를 잡지 못한다. 오늘 점심은 에너지바와 집에서 준비해 간 롤케이크 조각이다. 힘들겠지만 참아보자.

다양한 해안의 모습과 해변의 모습이 내 시야를 사로잡았지만 금세 다른 모습이 이전을 모습을 지워지게 한다. 그래서 사진이라는 게 필요한 모양이다

버스는 한 시간이 넘도록 이곳저곳을 다 서면서 한참을 간다. 많은 사람들이 가득한 버스가 이윽고 성읍 민속마을을 지나니 텅 비기 시작했다. 표선사거리에서 나머지 한 명이 내렸다. 이제 버스에는 운전수와 나 혼자다. 하긴 지금 이 시간에 민속박물관을 가기 위해 버스를 타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하다. 더구나 이 시간에 올레길을 걷자고 표선으로 가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쯤이면 반절 이상을 지나 점심을 먹을 곳을 찾아야 정상일 테니. 그렇게 늦었다. 내리니 11시 50분. 밥을 먹고 출발하고픈 욕구가 일지만 오늘 점심을 굶기로 하지 않았던가.


해비치리조트는 참 좋아 보인다. 나는 저런 곳에서 지낼 일이 없다. 아쉽다. 여기까지 오는데도 차를 타고 오면 쉽게 올 수 있으련만 2번의 버스를 타고 시외버스 시간에 맞춰 기다리다 투덜투덜 내리니 이 길이 너무 멀고 낯설기 그지없다. 렌터카보다는 남들이 타는 스쿠터를 빌려 타고 싶은 맘도 있는데 아직은... 그럼 자전거는 언제 가지고 내려온단 말인가. 


표선을 뒤로한 채 한없이 걸었다. 다양한 해안의 모습과 해변의 모습이 내 시야를 사로잡았지만 금세 다른 모습이 이전을 모습을 지워지게 한다. 그래서 사진이라는 게 필요한 모양이다. 사진이 없으면 인상적인 장면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내가 어디를 지나왔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시 사진을 찬찬히 보면아 이곳도 지나왔구나, 그곳도 참 멋지고 괜찮았는데 싶다. 근데 내 기억 속에는 왜 남아있지 않는 걸까. 잔잔하고 고요한 바다. 그 바다를 보는 내 시야가 벌써 매너리즘에 빠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과 5시간 정도 걸었다고 다리가 이렇게까지 반발한단 말인가.  나의 체력의 버팀목은 이제 다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제주 올레길이 생각보다 재미있는 길은 아니다. 바다도 똑같은 장소를 계속해서 바라보면 지루하기 그지없다. 더구나 올레길을 걷는다는 것이 거의 대부분 아스팔트를 걷게 되는 해안도로는 사실 발바닥에 굉장한 무리를 주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등산이 무릎에 무리를 주는 걷기 운동이라면 평지의 아스팔트와 현무암의 돌덩이를 걷는 일은 무엇보다도 발 바다에 무리를 가한다. 나 역시 이 무리에서 자유로울리가 없다. 오후 5시가 넘어서자 발바닥에 불이나다 못해 쓰리고 아프기 시작했다. 혹시 물집이 잡힌 것일까. 이렇게까지 쓰리고 아픈 경우는 발바닥에 물집이 잡혀서 겉껍질이 벗겨진 경우가 아니면 잘 없을 것 같다. 불과 5시간 정도 걸었다고 다리가 이렇게까지 반발한단 말인가.  나의 체력의 버팀목은 이제 다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표선항은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작고 초라했다. 제주의 항구는 인위적인 방파제가 아니면 결코 성립될 수 없을 만큼 주변은 현무암 해안이 거칠게 널브러져 있다. 마치 현무암 덩어리를 잘게 부숴 하늘에서 흩뿌린 느낌이다. 표선 앞바다와 해변에 대한 첫인상은 이 같았다. 예전에는 이곳 해안은 참으로 척박했었겠구나. 그리고 경치 측면에서 봐도 중문과 송악산 자락에 비하면 특별한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역시 주 관광지가 되기에는 무엇이 부족한 느낌이다. 이곳이 아닌 중문을 선택한 이유를 알듯 싶었다.


하지만 바다의 현무암 해변을 걷는 기분은 참 묘한 도전정신을 준다. 낯설고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이라고 할까. 그렇게 표선의 앞바다는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로 인함인지 올레길 역시 첫 시작은 해안의 돌길을 걷는 것으로 시작했다. 살짝살짝 돌의 뾰족한 부분을 피해가며 해안가를 걷노라면 내가 마치 이 해변의 오랜 친구처럼 정다움을 느끼게 된다. 이 길을 만든 이의 의도는 일단 성공한 기분이다.


그러나 오늘 하루 종일 해안에서 보이는 느낌이 지금 이상으로 좋았던 경우가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그 순간에는 알지 못했다. 계속되는 잔잔한 파도와 특색 없는 해안선의 연속. 4코스의 해안선에 대한 총평이다. 아마도 특별한 기대감 없이 이곳을 처음 찾았다면 이 바닷가 역시 굉장한 매력을 발산했겠지만 화려한 바닷가를 이미 맛봐버린 상황에서 검은색 돌무더기들이 흩뿌려진 바닷가의 모습과 그 옆을 지나 아스트의 무미건조함은 올레길의 의미를 다소 퇴색시켜 버리기도 했다. 

살짝살짝 돌의 뾰족한 부분을 피해가며 해안가를 걷노라면 내가 마치 이 해변의 오랜 친구처럼 정다움을 느끼게 된다. 이 길을 만든 이의 의도는 일단 성공한 기분이다

하물며 그 이후에 나타나는 항구들에도 특색이 없다. 이후 대정항이나 화순항과 같은 자체만의 매력과 법환포구 등의 묘한 특색이 표선에서는  확인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해안의 아스팔트 길은 정처 없이 나의 발길을 재촉했다. 완만한 바닷길을 걷다가 가끔 나오는 숲길은 또 다른 휴식을 준다. 비록 계속 걷기는 하지만 바다에 시야가 다소 단조로워져 식상할라치면 어김없이 숲으로 난 길이 나온다. 그런 점에서 제주의 올레길은 미워하기에는 어려운 매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곳곳에 숲으로 난 길을 걷다 노란색 꽃과 빨간 열매를 만난다. 무슨 꽃이며 무슨 열매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꽃과 열매의 화려한 색깔은 걷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아, 길가에 핀 꽃들, 숲 속에 피어있는 꽃들이 이리 아름다운 것이로구나 싶다. 그럴 때마다 나도 모르게 셀카봉을 늘여 나 자신의 모습을 이 배경과 함께 남기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참 우습다. 무욕을 배우고 느끼려 하는데 순간순간 욕심을 내고 있다. 그래서 더 열심히 걸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혼자일 때 무수히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생각에 외부의 자극이 닿으면 생각의 크기는 한없이 커져만 간다.

숲과 바다가 이어지는 길들은 나의 마음을  재촉하고 동시에 나의 괴로움을 살며시 잊게도 한다. 나는 오늘 여기를 왜 걷고 있는가를 생각해 본다. 무엇을 위해서 걷는가. 제주 바다의 잔잔함은 참 사람을 무료하게 할 수도 있겠구나 싶다. 지지난주 그 험난한 파랑주의보와 바람으로 성난 모습을 거침없이 보여주더니 오늘은 아무런 미련도 없이 나태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모든 바다는 다 마찬가지려나 그때그때 느끼는 순간을 위해 날씨가 보조를 해 준다. 너무나 이기적인 분석이나 묘사일까나. 암튼 이날의 제주는 며칠 안된 제주에서 가장 온화한 바다를 보여주고 있었다. 표선에서 남원까지의 해안길이 커다란 암벽이나 절벽이 없이 자잘한 현무암 해안으로 이루어진 것을 보면 어쩌면 특색을 없애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표선에서 남원까지 길은 멀다. 안내표시를 보니 23.1km였다. 이것이 얼마나 긴 거리일까.  나는 지난번에 얼마나 긴 길을 걸었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지난주는 토요일에 일이 있었으니 일요일 오전 오후 3시간 정도를 걸었던 기억이 난다. 불과 6km 정도를 걷지 않았던가. 앞으로 얼마나 남아있지 표지판에 대략 17km 정도가 남았다. 엄청 많이 걸었다 싶었는데 아직도 1/4밖에 걷지 않았다. 이러다 오늘 안에 도착할 수 있으려나.


지난주부터 나는 입장을 바꿔 걸음 중간에 쉬면서 가겠노라고 다짐했다. 또 웬만하면 점심을 간단하게 걸러 한 주일 동안 몸에 쌓여있던 독소와 지방 등을 불태우는 걸음을 걷겠노라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마냥 굶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적절한 요깃거리를 소지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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