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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구리 Oct 22. 2017

제주를 걷다 5_늦을 무렵 남원 가는 길

2014년 10월 20일_황혼과 함께 하는 걸음 올레 4코스



점심을 먹고 난 후 도로를 따라 다시 발길을 옮긴다. 횡단보도를 건너자 마을과 봉우리 쪽으로 이어진 이정표가 길을 인도한다. 앞에 보이는 오름을 오르라는 모양이다. 길 방향을 보니 이 올레길을 낸 사람의 의도가 읽힌다.


마침 바다가 너무 잔잔해 지루함이 다가오려는 순간이었으니 다행이다 싶다. 오름을 향해 횡단보도를 건너 마을을 지나 과수원을 지나게 되었다. 오름까지 가는 길목은 온통 과수원다. 오렌지색 감귤밭의 감귤나무들이 탐스럽게 주렁주렁 열매를 맺고 '이제 가을이야. 곧 겨울이 올 테니 준비해라. 대신 그전에 싱그러운 가을의 정취를 느껴보는 것은 어때?'하고 이야기다. 사실이 그게 아니면 어떠하리. 걸음은 아주 조금씩 마을을 굽이돌며 오름을 향해 가고 있었다. 조금씩 표고가 높아지는 느낌. 물론 살짝 살짝  언덕지만 지금 시간에는 그것도 꽤나 벅찬 일이다.


"이쯤에서 오름을 포기하고 행길을 따라나설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어차피 오름에서 보게 되는 것은 여태 보던 잔잔한 바다가 아니겠는가. 바닷가에서 보나 약간 높은 데서 보나 무슨 의미가 있지?" 나를 시험하듯 스스로의 게으름이 나에게 찾아왔다. 역시 걷는 게 힘든 모양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몸이 지쳐있다 방증이다. 그래도 가던 길을 가야지. 내가 이 오름을 안 오른 들 누가 나를 탓할 것이며 그게 뭐 그리 대겠는가 마는 오늘 4코스를 걷기로 약속한 스스로에게 찜찜함이 남는다는 사실과 떳떳하지 못한 스스로를 보여주는 자신을 생각하니 '참 없는 녀석이로군'이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머리와 등에서 내리기 시작한 땀은 휴식시간에 물과 빵을 먹으며 채웠던 허기를 금세 잊히게 하고 지친 모습으로 나를  다시 되돌렸다.

어차피 오름에서 보게 되는 것은 여태 보던 잔잔한 바다가 아니겠는가. 바닷가에서 보나 약간 높은 데서 보나 무슨 의미가 있지?" 나를 시험하듯 스스로의 게으름이 나에게 찾아왔다

"아, 얼마나 돌려가며 길을 비비 꼬으려나?"싶은 순간에 왼쪽으로 꺾어지라는 이정표가 나온다. 본격적으로 오 오르는 길이다. 이제야 등산이구나. 어찌 보면 동네 뒷산을 오르는 산책길이겠으나 해안선을 한참 걷다 다시 오름을 오르는 일은 전체적으로 힘들다는  생각을 전해준다. 가벼운 동네 뒷산과는 다른 느낌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오름을 오르는 동안은 바닥이 시멘트 콘크리트가 아니라는 사실. 아스팔트 위를 걷는 것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힘들고 괴로운 일이다. 등산을 하게 되면 아픈 은 결국 무릎이다. 위를 오르거나 내려올 때 수없이 많이 힘을 주며 무릎을 펴고 접기 때문에 무릎관절에 무리가 간다.

하지만 평지의 아스팔트를 걷는 일은 결국 발바닥과의 싸움이다. 발바닥이 몹시 아파오기 시작했다. 지난주 내내 술자리를 계속한 때문인가. 몸의 피로도가 높다. 오름 오르는 길바닥에 새끼줄 꼬은 듯한 매트를 깔아놓은 덕에 발바닥의 쿠션감이 비교적 부드러워졌다. 아스팔트가 아니라는 게 이렇게 까지 좋은 일이라니...


정상에 올랐다. 아니 정상이라기보다는 낡고 허름한 전망대다. 바닷가도 아주 잘 보이거나 하기보다는 그냥 바다가 보인다. 하지만 정상이라는 기분을 맘껏 즐기리라. 모자를 벗고 의자에 앉아 한참을 쉬었다. 엄청 높은 산 정상에 오른 것으로 하자. 몸의 피곤도는 그 정도에 준하기에 그런 기분을 몸에 전해 주는 게 좋다. 한참을 쉬다 보니 즐거운 생각이 났다. 아 이제 내려가는 길이구나. 비교적 쉽겠는데. 내려 보니 거슨새미라는 곳이 나온다. 물이 거꾸로 흘러 붙여진 이름이라며 샘이 덩그러니 나왔고 표지판에 쓰여있다.


갈 길이 궁금해졌다. 아직도 반 정도밖에 못 왔다는 표지판이 나온다. 뭐야 거의 다 도착해도 시원찮을 거리인데 아직 반 정도밖에 못 왔다고. 지도를 펴서 나의 위치를 살펴본다. 주변에 특색을 느끼기에는 감귤농장밖에 없는지라 정처 없이 걷는다. 이윽고 큰 도로다.


순간, 아차 다. 이정표를 놓쳤다. 오는 길 어디선가 옆으로 꼬부라지라는 표시가 있었을 텐데 지도를 보며 터덜터덜 걷다 보니 그 이정표를 놓친 게다. 마침 길 입구의 큰 바위에 영천사 방향이 표시되어 있다. 내가 가야 할 곳이 영천사인데 표시판은 내가 온 길을 되돌아가라는 표시다. 아, 제길 그렇지 않아도 힘들어 죽겠는데 온 길을 되돌아 가라고... 순간 망설였다. 이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어딘가에 올레길 표시가 나올 게다. 올레길은 안쪽의 오름을 돌아가기 위해 내부로 길을 돌렸기 때문에 다시 해안으로 길을 안내하려면 이 도로를 꼭 만나게 된다. 사실이 그랬다. 그렇다면 이 도로를 따라가면 되지 않을까. 역시 몸이 힘드니 계속해서 게으른 생각이 넘쳐난다. 망설임의 시간이다. 오름을 오르기로 결심하기 전의 망설임과 같다.


그래도 영천사가 궁금했다. 제주도 안의 이 한적한 곳에 있는 절은 어떤 느낌일까. 사람들이나 있을까. 연천사처럼 큰 절도 아닐 텐데 그래도 그 절을 둘러서 가라고 올레길을 돌려놓은 저의가 궁금했다. 내려온 길을 다시 되돌아 가기 시작했다. 꽤 멀리 왔다. 한참을 가다 보니 과연 올레길 표시가 옆으로 꺾어지라는 안내를 하고 있다. "이 길 일 줄 알았어."혼자 뇌까리며 민가 사이를 투덜 되면 걸었다. 이 안쪽에 무슨 집을 짓는지 공사가 한창이다. 공사인부 아저씨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저 양반은 나를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도시에서 온 세월 좋고 여유 있는 놈이라고 생각할까 아님 참 부질없는 짓거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까. 모를 일이다. 나는 역으로 저 집은 이 한적한 동네에서 무슨 역할을 하려고 짓고 있는 것일까 궁금해했다. 작은 건물 여러 채 만드는 것으로 보아 단순한 살림집을 아닐 테고 펜션이나 게스트 하우스려나? 그러기에는 위치가 도무지 아닌데...


역시 몸이 힘드니 계속해서 게으른 생각이 넘쳐난다. 망설임의 시간이다. 오름을 오르기로 결심하기 전의 망설임과 같다

 그러는 사이 영천사가 아담하게 내 앞에 나타났다. 조경이 잘되어있는 절이다. 서울 근교에 저 정도 조망과 조경이라면 꽤나 사랑받을 절이다. 앞에 일주문 없이 사천왕상이 바로 시작된다. 비탈진 계단길을 가운데 두고 양 옆에 연못이 나뉘어 있다. 참 고요하고 정감이 간다. 합장을 했다. 연못 위에 떠있는 연잎이 바짝 말라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말라있는 모습이 한적한 이 절의 처지를 알려주는 것 같았다. 일단 대웅전에 가보자. 아무도 없다. 인기척도 없고 대웅전도 굳게 닫혀있다. 워낙에 사람이 없으니 예불할 때만 열리는가. 대웅전 앞이 아니라 옆으로 둘러봐도 꼭꼭 잠겨있는 문을 열기가 영 내키지 않는다. 온 김에 30배는 아니라도 3배 정도만 하고 가면 좋으련만. 문을 잡아당겨도 열리지 않는다. 열려는 의지가 없으니 열리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한적한 절에서 두리번거리다 발길을 돌렸다. 절이 마음에 드는데 사람이 없구나. 사람이 없으면 절은 한편 스산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괜히 나중에 이 절을 배경으로 약간의 이야기를 만들어 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다음에 와서는 꼭 대웅전에 가서 절을 해보고 싶어 졌다.

시간을 한참 허비했다. 아직 10여 킬로가 더 남았다. 이제부터는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한참을 걷다 보니 다시 바닷가로 나왔다. 해가 뉘엿뉘엿 하루의 역할을 다해가고 있었다. 아직은 중천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태양빛의 색깔이 조금씩 변해가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이제부터가 고민이다. 오늘 남원항에서 자고 갈까 아니면 좀 더 가서 편안한 내일을 위해 좀 더 가다 중간에 있는 게스트하우스를 찾아볼까. 걷는 내내 게스트하우스가 바로 항구 앞에 있다는 안내가 나온다. 숙박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항구 바로 앞이라는 점이 별로 맘에 들지는 않는다. 일단은 결론을 내리지 말고 가는 만큼 가보도록 하자. 정 안되면 제주시로 돌아오면 될 일이고... 

내 목표가 오늘 하루의 목표지인 남원항에 빨리 도착하는 게 아니지 않던가. 그러려면 버스를 타고 가면 10분도 안 걸릴 거리를 왜 이리 힘들게 걸어 간단 말인가

태양이 뉘엿거리며 제갈길을 가는 모습을 보며 계속 걷는다. 오름과 영천사를 지나 다시 바닷가로 향한다. 멀고 지루한 길이다. 이 길이 어디서 끝나게 될는지 궁금해하며 오후 느즈막을 열심히 걷는다. 복병이 생겼다. 발에 심한 통증이 온다. 지난 한 주간의 술독에서 헤매던 체력이 이를 버티지 못하는 것 같다. 막상 발에 물집이 생긴다고 생각하니 너무 힘들고 아프다. 돌아가는 언덕길이나 숲길이 나오면 피하고 싶다. 왜 이리 돌아가는 길을 만들어 놓은 걸까. 하지만 생각해보니 내 목표가 오늘 하루의 목표지인 남원항에 빨리 도착하는 게 아니지 않던가. 그러려면 버스를 타고 가면 10분도 안 걸릴 거리를 왜 이리 힘들게 걸어 간단 말인가. 나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다시 한번 놀라며 아픈 발걸음을 내디뎠다.


태양이 저 멀리 도망간다. 나의 바람과 애원을 멀리한 채 다른 바쁜 일을 재촉하듯 산너머로 휘리릭 자쭈자꾸 멀어진다. 하지만 이곳에 와서 낙조의 분위기를 느끼지는 못했던 것 같다. 해 질 녘의 제주 바다는 또 다른 묘한 기분을 준다. 마냥 슬프지만도 않다. 남도의 서해 바닷가와는 사뭇 다르다. 서해 바닷가의 낙조가 우울감이 강하다면 이곳의 낙조는 조금은 더 이국적이고 낭만적인 요소가 짙다. 분위기 잡기 좋은 저녁이다. 좋은 사람과 차 한잔이 그리운 시간이다.

저녁이 지는 제주바다는 가슴 아린 추억도 생각나게 하고 머나먼 미래를 꿈꾸게도 하는 이중적인 현상을 지녔다

 갈대숲을 지나 낙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길을 걷자니 마음이 벅차다. 저녁의 올레길은 이렇구나가 아니라 저녁이 지는 제주바다는 가슴 아린 추억도 생각나게 하고 머나먼 미래를 꿈꾸게도 하는 이중적인 현상을 지녔다. 과거를 회상하는 우울함만을 느끼고 싶지 않은데 제주의 바다는 과거만을 주지 않는다. 미래의 안식과 기대도 함께 준다. 그 차이를 오늘 느끼게 해준다. 나의 과거를 무엇으로 규정하든 나의 미래는 아직 낙조 같은 시간의 뒤울녘이 아니라 그 안에서 형용색색의 화려함을 뽐내는 자태를 지녔다. 나의 미래 역시 주저앉고 말지 않을 것 같다는 기대를 갖게 해준다. 이 낙조가 마음에 든다.


본격적인 낙조가 시작됐다. 해가 갯바위들 사이 너머로 계속해서 나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나의 하루는 이렇게 저물겠지만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는 스칼렛 오하라가 있지 않던가. 미련을 버리고자 함이나 희망의 끈을 놓고 싶지 않은 마음도 함께 있으니 걷고자 하는 길의 의미가 조금은 깊어진 마음으로 남는다.

너무나 아픈 발바닥을 내딛으며 용기를 내본다. 곧 목적지에 다다르겠지만 그 목적지가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어도 상관없겠다는 생각이다. 그곳에서 쉬면 나는 다시 내일을 향해 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오래지 않은 제주 생활이지만 아는 지인들이 없어도 가끔은 행복한 순간들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남원항에 도착할 무렵 해가 지고 말았다. 도착하고 말았나 싶게 눈앞에 크지 않은 항구가 나타난다. 아 여기서 숙소를 잡아야 하나 아니면 오늘은 그냥 포기하고 제주시로 돌아갈까 고민을 하게 된다.


어두워지고 갈길을 생각하니 여기서 그만 쉬라고 한다. 핸드폰을 들고 몇 km 앞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우습게도 자신은 더 이상 게스트하우스를 하지 않으며 중국에 와있노라는 옛 주인장의 답변이 들려왔다. 허걱... 이 당혹스러움을 어찌하랴.


항구 앞을 서성이며 전화를 끊으니 나이 든 아저씨 한분이 나를 보고 웃는다. 게스트하우스를 찾느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하니 자신을 따라오란다. 전화를 거는 걸 보니 게스트하우스를 찾는 줄 알았단다. 원래 최후의 보루로 생각해둔 쉼터라는 게스트하우스로 간다. 이곳 주인장인가 싶지만 묻기에 그렇다.  연방 웃음기를 잊지 않는다. 참 편안한 표정을 가진 양반이다 싶다.


이층으로 올라가며 xx야~손님 왔다며 부른다. 무뚝뚝한 아저씨 한 명이 나를 맞는다. 참으로 남자들은 무뚝뚝하다. 이리오나 저리오나 지 손님인데 왜 이리 나를 무뚝뚝하게 대할까 싶다. 잠시 여기저기를 둘러보더니 방을 아직 안 치웠으니 잠시만 기다리란다.

1000만 명이 넘는 제주 관광객들은 다 어디를 간 단말인가 알아봐야겠다. 궁금해졌다. 그들의 행보가...

그사이 나를 데려온 아저씨가 나에 대해 몇 마디 묻는다. 어디서 왔느냐. 올레길을 걷느냐 등등. 그러는 사이에 본인이 조금 전 배를 몰고 나가 황돔을 잡아왔으니 저녁시간에 식사하면서 소주나 한잔 하잖다. 속으로 '앗싸'하는 쾌재를 불렀다. 사실 게스트하우스에 묵으면 제일 걱정이 혼자서 밥 먹는 일이다. 그래서 여행자들은 어떻게든 핑계를 삼아 바비큐 파티를 하기도 하고 회를 떠서 함께 소주를 먹기도 하고 하지 않던가.


사실 쉼터의 시설들은 맘에 들지 않았지만 갓 잡은 황돔을 먹으며 식사와 술자리를 해결하는 일은 굉장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게눈 감추듯 황돔과 술을 마신 후 텅 빈 방 안에 앉아 이것저것을 적어본다. 내일은 아침 일찍 떠나 길을 가리라. 다행히 내일의 길이는 오늘 길이의 3분의 2에 불과했다.


아픈 발바닥을 쳐다보니 물집이 잡히기 바로 직전이었다. 내일은 어찌 됐든 물집이 잡히겠구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요즘 게스트하우스에는 사람들이 거의 눈에 띠지 않는다. 올레길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올레길을 더 이상 걷지 않는 것 같다. 유행이 지난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조금은 아쉬운 생각이 든다. 그렇담 1000만 명이 넘는 제주 관광객들은 다 어디를 간 단말인가 알아봐야겠다. 궁금해졌다. 그들의 행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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