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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구리 Nov 13. 2017

모슬포에서 곶자왈을 만나다

2014년 12월 20일 오름과 곶자왈을 돌다 새로운 제주를 알게됐다 

일주일 내내 비가 오거나 눈보라가 치거나 하는 날의 연속이고 다음 주에도 비는 계속 예정되어 있다.

예보상에는 유일하게 비가 오지 않는 날이 있다. 토요일. 휴~다행이다.

새벽까지 내리던 비가 그쳤다. 부지런 떨지는 않았지만 어디를 가야 할지 고민에 머리가 새겠다.

이번에는 서쪽으로 가자.

지난번에 가기를 멈춘 모슬포에서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가을날의 기억을 되새기며 모슬포항에 도착했다.

서귀포를 중심으로 남쪽을 걷던 기억이 멎었던 지역이라 아직도 생생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다행히 버스가 안덕면의 화순을 거쳐 모슬포까지 가고 있다.

시간이 1시다.

바삐 움직여야 한다.

항구를 빠져나온 올레길은 나를 바닷가로 이끌며 모슬포항과 대정읍을 여기저기로 이끈다. 이윽고 예상대로 군부대가 보이는 모슬포봉을 향해 천천히 언덕길을 오른다. 한참을 오르다 뒤를 돌아보니 바다와 대정읍이 한눈에 들어온다. 멋지구나 읍내와 바다가 한눈에 바라다보이는 이 느낌을 주기 위해 바다에서 여기로 이끌었나 싶다.


문제는 바람이다. 비록 제주도이기는 해도 한겨울 바람이 매섭다. 더구나 바람의 세기는 아무리 삼다도라 하지만 참 야속하게 심하게 분다. 쉬지 않고 계속 몰아붙이고 있다. 숲 속으로 들어가니 바람이 잠깐 잦아드는 듯싶지만 어떤 곳에서도 방심을 허용치 않는다. 얼굴이 차다. 언덕길을 오르면서 모자를 푹 뒤집어쓰고 걷는다. 오늘은 사진을 많이 찍기 힘들듯 싶다.

멋지구나 읍내와 바다가 한눈에 바라다보이는 이 느낌을 주기 위해 바다에서 여기로 이끌었나 싶다

모슬포를 뱅글뱅글 돌던 길은 곳곳에서 예상치 못한 제주도의 모습을 소개했다.


갑자기 낯선 봉우리가 바닷가에 보인다. 아이들 그림에나 나올법한 모양새다. 자세히 보니 송악산이다. 이중 화산 구조라는 게 저걸 말하는구나. 외부의 넓은 오름 안에 또 다른 봉우리가 솟아있다. 나지막한 언덕길이 보인다. 저기가 그 멋진 장소라는 생각을 하니 지난가을에 바람맞으며 허기진 상태로 올랐던 송악산과 마라도 형제봉 등의 모습이 눈에 떠오른다.

다시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산방산이다. 묘한 것은 그동안 산방산을 바다 쪽에서만 바라보았지 뒤편에 무엇이 있는지 한 번도 예상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마치 달의 뒷면을 결코 지구에 보여주지 않는 그 비밀이랄까.


산방산의 뒷모습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모습니다. 모슬봉의 공동묘지에서 보이는 산방산의 뒷모습은 화려함과 먼 환상의 세계 뒤편에 있는 죽음과 또 다른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느낌이다.


오늘 여기에 오기를 잘했다. 여전히 바람은 무섭다. 모슬봉의 한쪽 편 햇살 좋은 공동묘지 구역은 참 묘한 기분을 전해준다. 죽음의 기억이 이처럼 밝은 풍광을 가지고 있다면 여기 묻힌 사람들은 좋겠다는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운 모습인 것은 분명하다.


매섭고 추운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마지막 남은 곶자왈 지역을 향했다. 천연원시림의 느낌을 어떻게 전해줄지 궁금하다. 곶자왈은 겨울이라 그런지 풍부한 느낌보다는 단 하나 서양의 동화를 연상시켰다.

죽음의 기억이 이처럼 밝은 풍광을 가지고 있다면 여기 묻힌 사람들은 좋겠다는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나 물레로 올아버니들의 가시 옷을 짜고 있는 동화가 이 숲을 배경으로 한다면 너무나 딱 어울리는 숲 속이다. 단순히 나무가 많다거나 열대우림지역이거나 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느낌의 숲이다. 상록수와 난대림이 섞여있는 느낌. 혹은 가시나무가 곳곳에 넝쿨과 엉켜있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가시넝쿨이 점점 나를 옭아맬 것 같은 느낌이다.


여름 시즌에 다시 꼭 와봐야겠다.

곶자왈 지역의 느낌은 이러하다는 것을 기억해야겠다.

한 가지 이번 올레길을 걸으며 좋았던 점 중 하나는 이제는 길을 걸으며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이다.

그전에는 풍경을 머릿속에 담아 넣거나 사진에 담는 것에만 집중했었다면 이제는 걸으며 나 자신을 되새길 수 있게 됐다. 지금의 나는 어떠한지...

내일의 나를 어떻게 가져가야 할지를 생각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가시나무가 곳곳에 넝쿨과 엉켜있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가시넝쿨이 점점 나를 옭아맬 것 같은 느낌이다

곶자왈의 숲 속은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었다. 토요일 저녁이지만,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한겨울의 바람이 손을 곱게 하기에 충분히 기분 나쁘고 안 좋은 날씨였지만 몇몇 팀들이 이 곳을 찾아 걷고 있었다. 그만큼 숲은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주는 게 분명하다. 곶자왈 지역, 정확히는 신평 곶자왈을 뒤로하고 나오니 그 정도는 아니어도 약간의 수풀 길과 이윽고 무릉리의 밭들이 눈앞에 나온다. 


곧 목적지가 가깝다. 시간은 4시가 넘어간다. 동지가 낼모레인 관계로 해는 급히 달아날 기세다. 어두워지면 돌아가기 쉽지 않을 텐데 걱정이다.


부지런히 걸었다. 해가 지니 날씨가 더 차가워진다. 배도 고프고 하루 종일의 피로도 심해지고 있다. 그래도 목적지는 무릉2리 생태체험관이다. 그곳을 향해 밭 사이를 걷고 마을의 인가를 가로지르면 걷는다.


비닐하우스 사이에 난 리본을 따라 가보니 여기가 종점이란다. 학교의 공터에 선사시대의 유적지스러운 움막집들이 놓여있다. 생태학교. 스산함으로 휑하니 넓은 학교 건물과 교정이 바람에 더 슬프고 힘들어 보인다. 사실은 내 심정이 그렇다. 다행히 적힌 버스시간을 보니 5시에 모슬포로 가는 버스가 온단다. 이미 2분 전 5시다. 늦었다. 어찌할까 싶어  무작정 버스 정류소를 향해 걸었다.


스마트폰을 통해 본 버스정류장과 내가 걷는 길이 반대방향이다. 이쿠. 엉뚱한 길을 향해 걷고 있다. 다시 되돌아서서 부리나케 바삐 걷는다. 집에 매어진 진돗개 녀석이 나를 보고 마냥 짖어댄다.

"너와 실랑이를 벌일 만큼 나는 한가하지 않아!" 혼잣말을 하며 멀찍이 녀석의 눈길을 피해 정류소를 한껏 내달았다.

정류소에 오니 약간의 바람을 피할 수 있을 것 같다. 혹시 버스가 언제 오려나 버스시간표와 다가오는 차 중 버스가 없나 번갈아가면서 눈길을 반복한다.


차 한 대가 버스정류장 앞에 멎는다. 나에게 물어봐야 잘 알지도 못할 텐데...

의외로 어디를 가느냐고 묻는다. 버스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다. 일단은 타라고 손짓한다.

이건 뭐지? 낯선 반응이다. 에라 모르겠다 싶어 탔다. 최소한 모슬포나 신평리의 버스정류소까지는 얻어 탈 수 있겠다 싶었다.


제주시를 간다는 내 이야기에 나보고 차비를 많이 줘야 할 판이라며 농담을 건넨다.

순간 긴장한다. 나라시야? 그럴 리가 없다. 돈도 없는 나에게 무작정 태우며 나라시를 할 리도 없고 제주에 나라시가 있다는 말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자기 집이 무릉리라 부모님을 보고 제주시내로 들어가는 중이란다. 내가 선 곳에 버스가 자주 없어 오래 기다려야 하기에 가끔 사람들을 태워준다는 중년 운전자 설명이다. 이런 행운이...

돈도 없는 나에게 무작정 태우며 나라시를 할 리도 없고 제주에 나라시가 있다는 말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오늘 길 내내 편안한 마음으로 제주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한 시간여의 시간을 편하게 왔다. 집 앞에까지 내려주는 친절함에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함을 표한다. 좋은 사람이다. 제주에 대한 사랑과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히 이야기하는 중년의 운전자에게 감사함을 표해야 한다.


막판에 하루가 편해졌다. 그래서 저녁 약속시간도 늦지 않고 그전에 다른 일도 마칠 수 있었다. 다시 그곳에서 걷기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음에는 그곳에서 시작해서 서쪽의 항구로 끝맺음을 해야겠다. 서쪽을 돌고 애월까지 걸으면 다시 첫 시작의 동쪽으로 가련다.


좋은 추억과 무엇을 해야 할지를 생각게 해주는 하루를 보냈다. 내일은 걷지 않으련다. 비도 올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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