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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구리 Nov 29. 2017

흐리고 비 오는 날의 비양도

2015년 9월 5일

지난주에도 그랬고 그 전주에도 휴가라는 이름으로 주말 걷기를 제대로 못했다.


한 주일이 많이 피곤하다. 새벽 일찍 비행기를 타고 내려오느라 잠을 못 잔 덕인지 하루 종일 병든 닭처럼 졸더니 그날 밤 새벽 5시까지 지인들과의 이야기 자리로 잠을 또 못 잤다. 연속되는 약속으로 주말이 되니 몸에서 이상 반응이 일어난다. 이러다가는 그냥 폭삭 늙어버리겠다.

비교적 가까우면서도 어렵지 않은 곳... 이곳저곳을 찾아보다 비양도를 선택했다

비교적 가까우면서도 어렵지 않은 곳... 이곳저곳을 찾아보다 비양도를 선택했다. 한림항까지 버스 기다리는 시간까지 합치면 1시간 20여분이면 갈 수 있을 것 같다. 이미 12시라는 배 시간을 알고 있는 데다 돌아오는 배편은 3시. 2시간 반이면 충분히 돌아볼 수 있다는 사실을 여기저기서 듣고 다녀온 지인에게도 들었던 지라  딱 좋은 워밍업 코스다.

금요일 저녁의 불금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고 술 없는 주말을 맞았다. 그동안 못 잔 잠도 보충할 겸 일찍 잠들어야지 했는데 역시 잠자는 시간은 거의 비슷하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9시가 다됐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가방을 싸고 오일장 버스정류장까지 걸었다. 이미 익숙한 길이라 중간에 김밥을 사는 곳까지 코스가 정해져 있다.


다행히 10분이 채 안돼 버스가 왔다. 배편을 끈으러 매표소에 가니 10분 후에 바로 출발하는 도항선이 있단다. 11시 20분에 출발한다고 빨리 가보란다. 40분을 절약하게 생겼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도항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미리온 사람들을 먼저 태우고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12시 배편에 다시 가는 구조다. 사실상 한 번의 도항 횟수가 늘어난 셈이다. 비공식적으로...


큰 섬인 제주에서 다시 섬을 향해 가는 게 영 낯설다. 인천이나 군산, 목포 등 서해안에서 보거나 느끼던 감정이 예스러운 정취와 함께 솟아난다.

한림항을 보면 배는 천천히 뒤돌아 비양도를 향했다. 사실 그다지 큰 기대를 할 필요도 없이 15분만에 도착하는 눈앞의 섬인지라 아무 생각 없이 배에 올랐다. 혼자서 비양도를 향해 떠나는 관광객인지 새로 내려온 정착민인지 잘 모를 사람들 몇 명이 눈에 띈다. 저들의 사연을 알 수는 없겠지만 저들도 역시 나처럼 주말에 어딘가를 가고자 생각 끝에 이곳에 왔으리라...


망망대해도 아닌 제주 앞바다를 건너니 주변에 고깃배들이 띄엄띄엄 눈에 띈다. 밤이 되면 저 배들은 환하게 불을 밝힐 것이다.

저들의 사연을 알 수는 없겠지만 저들도 역시 나처럼 주말에 어딘가를 가고자 생각 끝에 이곳에 왔으리라...

이미 익숙한 관광지가 된 섬이라 민박과 식당 그리고 탐방코스가 눈에 띈다. 배에 내리게 무섭게 일단의 사람들이 무리 지어 가는 듯했는데 이내 흔적이 없다. 30-4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다 어디로 숨어버린 것일까. 잠시 섬에 대한 설명과 지도를 보다 보니 5~6명이 내 눈앞에 보인다. 그들을 따라 섬을 한 바퀴 돌기로 했다. 총총하게 걷다 보니 나 혼자 먼저 앞서 걷는다. 역시 얼마 되지 않아 혼자서 아무도 없는 섬 둘레길을 걷고 있다. 뛰어난 풍광을 자랑하지도 비오기 직전의 날씨에 덧붙여 심란한 마음을 가라앉게 만든다. 그래도 이런 섬에 유유자적하며 혼자 올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다른 사람들이 그토록 부러워하던 모습인데... 나는 여전히 외롭게 홀로 여행을 다니고 있다.

어느새 후드득 빗방울이 볼과 팔에 느껴진다. 지난번 태풍 치던 날  이호태우에서부터 애월까지 걸으며 사두었던 우비가 아주 요긴한 게 아니다. 3500원을 주고 하귀농협에서 샀던 기억과 그날 동행했던 일행이 생각난다. 연락이 못한지 오래됐지만 처음 함께 걷자고 한 날이 태풍 치던 날이었던 게 우습기도 했던 흔적이다.

그래도 이런 섬에 유유자적하며 혼자 올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다른 사람들이 그토록 부러워하던 모습인데... 나는 여전히 외롭게 홀로 여행을 다니고 있다

멀리 건너편에 한림항과 협재해변 그리고 금능해변이 빤히 들여다 보인다. 해가 쨍쨍 내리쬐는 날이면 참 좋은 느낌을 줄 수 있겠지만 비가 오는 날 그 같은 기대는 여지없이 실망으로 남게 마련이다. 30여분을 혼자 걷다 보니 다시 원위치다. 이렇게 빨리 끝나버리면 안 되는데 싶지만 속도를 줄이기가 쉽지 않다. 


등대가 있는 비양봉 꼭대기를 향했다. 그제야 알겠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사람들의 선택은 섬 한 바퀴가 우선이 아니라 비양봉 꼭대기에서 전망을 감상한 후 다시 섬 한 바퀴를 돌거나 점심을 먹고 걷거나이다. 다행이다.

그리 어렵지 않게 정상에 오르니 2팀 정도 외에는 사람들이 없다. 고즈넉한 분위기에서 망망대해와 멀리 육지를 바라볼 수 있는 기회다. 가방 안에 있던 등산 방석을 꺼내 등대 기둥 옆에 깔고 앉았다. 아무런 생각 없이 바라보고 있는 게 이런 즐거움이다.


멀리 배들도 보이지만 아무것도 안 보이는 바다에 구름이 짙어지다 옅어지는 변화를 차분히 앉아 감상한다. 갑자기 배가 고프다. 아침에 샀던 김밥 한 줄을 꺼냈다. 한 줄은 도착 후 연못에서 쉴 때 먹었다. 김밥 사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이런 곳에 나와서 혼자서 식당 밥을 먹기가 여간 싫지 않다. 평상시에 밥을 먹는 일도 귀찮거니와 여행이라고 트래킹 와서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밥을 시켜먹는 일이 왠지 잘 내키지 않는 것은 나뿐의 게으름은 아닐 것이다.

가방 안에 있던 등산 방석을 꺼내 등대 기둥 옆에 깔고 앉았다. 아무런 생각 없이 바라보고 있는 게 이런 즐거움이다

30여분을 앉아있어보니 나 혼자뿐이다. 이런 횡재가 있나. 혼자서 이 풍경을 즐길 수 있다니... 아직 돌아갈 배편이 오려면 한시 간 이상이 남았다. 그래서 혼자 앉아있으면 좋으면서도 괜한 초조함이 생긴다. 이게 아직도 혼자 제대로 여행을 즐길 줄 모르는 초짜의 심리인 셈이다.


주섬주섬 일어서서 봉우리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중간에 섬을 돌 다온 사람들이 봉우리로 꾸역꾸역 올라오고 있다. 제대로 타이밍을 잘 맞췄다.


선착장 근처 팔각정에 앉아 서울에 있는 와이프에게 전화를 건다. 새로 입주하는 집의 부엌문제로 여간 고민스러워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도와주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말이라도 들어주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역할이다. 인생의 중년에 내가 가족에게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이것밖에 없다는 게 참 씁쓸하다. 그래도 버티고 볼 일이다.

선착장에서 사람들이 일찌감치 서있다. 아니다 다를까 올 때와 같이 배가 40여분 먼저 도착했다. 한번 싣고 가면 한림항에서 3시 출발 배가 될 시간이다. 결국 왕복 2편이 늘어난 셈이다. 또다시 40여분을 절약할 수 있었다. 배에 서서 뻔히 바다를 바라보다 보니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또 헷갈리기 시작한다.


내년쯤에는 어디 다른 나라의 모르는 장소였으면 좋겠다.


다행히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던 염소똥의 냄새는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내 코가 둔감한 모양이다. 선착장에서 뱃시간에 앞서 이곳저곳에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묘한 느낌이 전달된다. 각자의 사연을 이 배에 싣고 움직이는 사람들... 그중에서도 낚시를 위해 막배를 타고 도착하는 사람들과 한림에 나가 무언가 잔뜩 들고 돌아가는 할머니...

배에 서서 뻔히 바다를 바라보다 보니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또 헷갈리기 시작한다.내년쯤에는 어디 다른 나라의 모르는 장소였으면 좋겠다

그와 달리 얼마 전 오픈한 카페에서 안내 표지판으로 쓰기 위해 드럼통을 카페 입구에 내놨더니 하루 사이에 민원이 2건이나 들어왔다며 투덜대는 카페 주인장의 모습도 눈에 선하다. 인천의 연안부두나 군산항에서 가까운 섬을 다녀온 느낌이다. 뭐가 다를 일이야 없는 게 아니겠는가. 다음에는 추자도에 가서 하루를 지내고 육지로 넘어가 봐야겠다.


올레길을 걸으면서 백년초가 특산물인 동네인 월령리... 그곳에서 바라보며 걷던 비양도의 모습을 알게 된 게 어쩌면 더 서운한 느낌이 난다. 금능과 협재를 지나 한림까지 걷던 올레길에서 보이는 비양도는 여러모로 멋졌던 기억이 강한데 막상 이곳에 와 보니 그 신비감이 온데간데없고 생활의 깊숙한 한 복판으로 쑥 빨려온 느낌이 훨씬 강하게 들었다.


그래도 맞은편에 협재와 금능이 보이는 것은 참 기분 좋은 장면이다. 이곳에 계속 지내라 하면 아마도 정신이 어찌 되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낚시를 배우고 싶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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