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너구리 Nov 29. 2017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 영실에 오르다

2015년 10월 3일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

송창식의 노랫말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이 저절로 입에서 맴도는 아침이다"

올레길을 1코스부터 다시 돌아볼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창문을 열고 하늘을 바라보고는 다른 고민 없이 영실을 오르기로 결심했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어차피 점심을 못 먹을 것을 생각하니 아침이라도 든든히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열심히 챙겨 먹고는 버스시간을 확인했다.  정류장에 가면 5분 정도의 여유가 있을 시간이다. 차가 제대로 오기만 한다면 말이다.


740번 버스는 한대로 제주시 터미널과 중문을 오가는 차인지라 버스 간격이 거의 1시간 이상이고 하절기임에도 불구하고 5시 30이면 영실에서 차가 끊긴다.

제주생활 1년을 맞은 첫 번째 주말이다. 지난해 10월 1일부터 제주에 내려왔으니 1년 하고 이틀이 지났다.

제주에 와서 첫 주말에 간 곳이 올레 7코스인 외돌개와 강정이라 그곳을 갈까도 생각해봤지만 이미 외돌개와 강정은 여러 차례 거쳐간 곳이라 선뜻 내키지가 않는다.


그때는 모든 것이 낯설었고 지금은 일년 안에 올레길을 다 돌았고(가파도와 마라ㄷ,추자도 제외) 어디를 가야 할지 고를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불행히 아직까지 자동차를 장만하지 못한 때문인지라 오름을 다니기에는 너무나 불편해서 갈 수가 없다. 내년 초쯤에나 중고차를 하나 장만해서 본격적으로 숨겨진 곳들을 찾아 나설 생각이다.


한두 번 와봤다고 영실도 익숙하다. 버스에서 내려 머뭇거림 없이 등산길로 고고씽. 차를 가져올 수 있었더라면 주차장 입구까지 올라갈 텐데 2.5km를 여지없이 걸어야 했다


추석 명절과 다른 일들이 겹치면서 주말을 서울서 보낸 덕인지 주중에 체력이 달리는 느낌이 완연하다. 하루를 피곤하게 열심히 걷다 보면 주중에 그나마 견딜만하다 싶어 이번 주말은 작심을 하고 나서기로 했다. 그래도 여러 사람의 조언과 지난번의 어리목을 다녀온 경험을 고려해볼 때 숲 속을 지루하게 걷는 한라산 정상 등반코스는 겨울철로 연기했다.


역시 경치 구경하는 기쁨을 놓칠 수야 없지 않은가.


한두 번 와봤다고 영실도 익숙하다. 버스에서 내려 머뭇거림 없이 등산길로 고고씽. 차를 가져올 수 있었더라면 주차장 입구까지 올라갈 텐데 2.5km를 여지없이 걸어야 했다. 식식거리면서 주차장까지 걸으니 역시 차들로 인산인해. 많은 사람들이 이미 내려오는 시간이다. 2시가 등반허가시간. 주차장을 떠난 것이 1시 11분 빠듯하게 등산로로 접어들었다.

초입이야 여지없이 숲 속을 걷지만 한참을 오르면 멋진 경치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투덜거림 없이 걸을 수 있다.


내려오거나 올라가는 사람들 중 3분의 2가 중국인들이다. 제주의 어디를 가나 관광지에는 중국인들로 넘쳐난다. 단순히 중국인들이 넘쳐나는 거야 관광객이 1천만 명이 넘고 중국인들도 2백만 명을 넘겼을 테니 당연히 많을 테지만 문제는 그네들은 어딜 가나 시끄럽다는 사실이다.

매번 느끼는 것이고 중국에 가서도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너무 시끄럽고 무례하다

쉼 없이 오르다 전망대에 앉아 쉬고 있는데 중국인 가족들이 나타났다. 내 앞의 시야를 가리는 것은 물론이고 사방에 흩어져서는 계속해서 서로에게 큰소리로 이야기한다. 매번 느끼는 것이고 중국에 가서도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너무 시끄럽고 무례하다.


과연 저 사람들은 타인에 대한 예의를 언제쯤 배울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 나뿐 아니라 다른 한국인들도 너무 시끄럽다며 자리를 벗어난다. 나 역시 이들과 같이 간다는 것이 맘에 안 내켜 먼저 종종걸음으로 나섰다. 문뜩문뜩 뒤를 돌아보면 제주 서쪽과 남쪽 그리고 병풍바위와 오백장군 바위들이 모든 시름을 잊게 해 주려는 듯 시원한 풍광을 전해준다.


이 풍경을 잊을 수 없다. 이맛에 오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쉽게도 서귀포 쪽에 구름이 끼어 명쾌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탁 트인 이 기분을 이어가는 데는 그다지 방해가 되는 수준은 아니다. 하늘은 여전히 푸르르고 새록새록 다짐을 하기에는 좋은 날씨다.


가지만 남아있는 구상나무 군락지를 지나면 또 다른 느낌을 준다. 숲을 지나면 저 멀리서 백록담이 위용을 뽐내며 너를 들판에 우뚝 서있다. 산꼭대기에 이런 너른 들판과 조릿대가 펼쳐져 있는 모습은 역시 또 다른 장관이다.

문뜩문뜩 뒤를 돌아보면 제주 서쪽과 남쪽 그리고 병풍바위와 오백장군 바위들이 모든 시름을 잊게 해 주려는 듯 시원한 풍광을 전해준다


왼쪽에 족은 위세 오름 꼭대기에 설치 해둔 전망대 가는 길이 있지만 다시 똑같은 길을 내려와야 한다는 아쉬움으로 전망대는 포기했다.


저 앞에만 가면 물을 마실 수 있는 노루샘이 있다. 혹시나 싶었는데 수질검사 결과 음용수로 부적합 판단을 받았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위세오름 산장으로 내달려 한 걸음에 걸었다. 혹시나 시간이 되면 작심하고 돈내코 코스로 내려가 볼까 생각을 하면서 산장에 도착해보니 돈내코 코스는 이미 1시 30분부터 막혀있다. 아침 일찍 올라오리 않으면 돈내코 코스로는 갈 수가 없다. 이제야 알았다. 내려가는 시간만 3시간 이상 걸린다 하니 불의의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취해진 등반금지 시간이야 지켜야 할 수밖에... 혹시 이리로 내려가서 서귀포로 가려는 내 계획은 한 번에 뒤틀렸다. 다시 오던 길을 가는 수밖에 없다.

급하게 핸드폰을 꺼내 버스시간표를 확인해 본다. 중문행 버스의 막차는 4시 50분. 이 버스가 중문에서 턴해 다시 제주시로 가는 것이 막차인 셈이다. 그래도 4시 50분이 막차라는 것은 너무 심하다. 윗세오름 산장에서 시간을 보니 3시 20분이다. 한 시간 반 만에 매표소까지 가면 이 마지막 버스를 탈 수 있다. 서둘러 보기로 했다. 빠듯할 것 같기는 하지만 올라온 시간을 언뜬 계산해 보니 2시간 남짓이다. 그나마 올라오는 길이기도 하거니와 쉬엄쉬엄 올랐으니 서둘러 내려가면 충분히 닿을 수 있는 시간인 듯싶다.

그나마 올라오는 길이기도 하거니와 쉬엄쉬엄 올랐으니 서둘러 내려가면 충분히 닿을 수 있는 시간인 듯싶다

사정없이 종종걸음으로 하산길을 재촉하고 나섰다. 이미 하산길에는 거의 사람들이 없어 한결 한적하고 경치 구경에 더 좋은 순간들이 계속된다. 너무 일찍 올라오는 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닌 듯싶다. 이 한적한 맛을 느낄 수 없으니 말이다.


주차장에 도착할 무렵 서귀포의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시 막걸리나 한잔 해볼 테냐고 물었더니 그 양반 이미 낮술에 퍼져서 집에 누워있단다. 계획이 또 틀어졌다. 천천히 가자.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다. 지금 가봐야 5시 30여분. 버스를 기다려야 한다.

갑자기 발걸음의 속도를 늦췄다. 그래 봐야 2.5km 길이나 10분이나 늦어질까 싶다. 내려가는 길에 외국인 젊은이 남녀 한쌍이 히치하이킹을 작심한 듯 내려가는 차들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내민다. 안쓰럽다. 한국인들이 히치하이킹에 잘 서주지 않는 점을 알고 있기에 내가 보기에도 안쓰럽다. 그들을 마주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웃으면 한마디 했다. "keep trying" 젊은 남자애가 'thank you"하며 답을 한다.

하산길에는 거의 사람들이 없어 한결 한적하고 경치 구경에 더 좋은 순간들이 계속된다. 너무 일찍 올라오는 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닌 듯싶다. 이 한적한 맛을 느낄 수 없으니 말이다

진심으로 저들이 히치하이킹에 성공하기를 빈다. 저들이 성공했으면 아래의 버스정류장에서 만나지 않을 것이고 실패한다면 결국 버스정류장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들을 더 이상 만나지 못했다. 그들의 성공을 축하한다.


30분 먼저 내려와 정류장에서 기다리는데 사람들이 속속 몰려들기 시작한다. 버스 타기 5분 전이 되자 20여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또다시 시끄럽다. 노인네 2명을 빼고는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중국인이다. 빨리 버스가 오기를 기다릴밖에. 다행히 오래지 않아 버스는 도착했고 나는 뒷자리에 홀로 앉아 노형로터리에 도착하기 전까지 꾸벅꾸벅 졸 수 있었다.

한국인들이 히치하이킹에 잘 서주지 않는 점을 알고 있기에 내가 보기에도 안쓰럽다

피곤한 하루지만 흐뭇하기도 하다. 하늘이 도와주려는 듯 너무가 맑았고 1년의 시간이 자꾸 내 머릿속을 맴돈다.  


제주에서의 1년 무엇이 바뀌었는지... 상황은 전혀 변한 것이 없는데 말이다. 그래도 이제는 내가 제주에 산다는 게 실감이 나는 정도라고나 할까...

매거진의 이전글 흐리고 비 오는 날의 비양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