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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구리 Nov 29. 2017

가파도_ 혼자서 돌자 동네 한 바퀴

2015년 11월 5일 둘이어도 좋고

어제 하루 서귀포를 다녀오니 마치 오늘이 일요일 같은 느낌이다. 찬찬히 생각해보면 아직 토요일이기도 하고 오롯이 이틀을 어딘가 다녀올 수 있는 날씨다. 


아침 창을 열어보니 바람이 보통 거센 게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먼 바다를 나아가는 배는 위험스럽다. 추자도를 혼자서 헤매어볼까도 생각해봤지만 말 한마디 섞을 사람 없이 역시 1박 2일을 혼자 섬에 쳐박혀서 청승을 떠는 일이란 어지간한 우울함에 자신이 없는 한 선택할 경우는 아니다. 


그렇다고 그냥 주저앉아 있기는 싫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가파도다. 추자도를 대신해서 가보기로 하자. 마라도는 그다음에... 혹시 파도가 높아 결항이 되면 어쩌지. 섬에 갇히는 상황이 오지 않을까 걱정이 되긴 하지만 그래도 바깥 날씨를 고려해보니 이 정도 바람이면 배가 뜨기는 할 것 같다. 

주섬주섬 짐을 챙긴다. 모슬포항에서 2시 배다. 나오는 시간은 4시 30분 약 2시간의 산책시간이 있다. 숙소를 나선 게 12시 20분. 버스 타는 곳에 가서 기다리는 모슬포행이 40분에 도착한다. 1시간을 잡고 모슬포항 근처의 하모에 도착하면 걸어서 10분. 잘하면 탈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어 중간에 머뭇거리는 심사를 다시 다잡았다. 일단 가보자... 어떻게든 배를 잡아 타보자. 

섬에 갇히는 상황이 오지 않을까 걱정이 되긴 하지만 그래도 바깥 날씨를 고려해보니 이 정도 바람이면 배가 뜨기는 할 것 같다

제주 생활 1년에 나름 시간 스케줄을 잡을 수 있게 됐다. 예정대로 버스를 타고 종점에 도착하니 내가 탄 버스는 10여분을 걸어야 여객선 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다. 일반 버스정류장으로 4 정거장 거리다. 불아나케 걸었다. 하모 체육공원을 지나 끝자락에 가니 여객선 터미널이 보인다. 바람이 많이 거세다.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예상대로 마라도행 배는 결항이다. 오늘 들어가더라도 오늘 나올 수 있는 방법은 없을게다. 다행이다. 


티켓을 끈은 오늘 나올 거냐고 묻는다. 빨리 가란다. 시간을 보니 5분 남았다. 서둘러 배에 올랐다. 나보다 몇 사람 더 늦게 타는 사람들이 있고 곧 배가 문을 닫는다. 우도나 비양도의 도항선과 달리 이런 배들은 물이 들이치고 사고가 날 가능성이 높으니 안에서 문을 잠근다. 갑자기 세월호 생각이 났다. 생각하기도 싫다. 그래도 자꾸 생각이 난다. 순간 가슴이 먹먹하다. 


선착장 안의 바닷물결은 잔잔하다. 방파제가 파도를 막아주기 때문이다. 방파제를 나서기 시작하자 조금씩 파도가 높아지기 시작한다. 선장은 지금 바다의 파도 높이가 5m쯤 되고 속이 울렁일 수 있으니 조용히 앉아 있으란다. 

배안에는 사람들이 꽤 많다. 가파도는 역시 사람들이 많이 찾기도 하지만 마라도를 못 간 사람들도 꽤 많이 탄듯하다. 망망대해로 나서자 모슬포항이 서서히 멀어지는데 저 멀리 나지막한 섬이 보인다. 대한민국에서 표고가 가장 낮은 섬. 20m쯤 된다고 하니 산이고 뭐고가 없는 지형이다. 순간 바닷물이 불어나 해수면이 높아지면 이 섬은 제일 먼저 잠길 섬이라는 사실을 알겠다. 


배가 속도를 내자 배 창으로 바닷물이 튀기 시작한다. 역시 파도가 높아지니 배의 롤링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생각만큼 심하지는 않다. 다행이다. 이 정도면 배 멀리를 할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배가 파도에 튕기며 롤링을 하는 순간들이 나름 재미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파도의 높이와 색이 어릴 적 남도의 섬들로 여행을 가던 시절의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이런 기분으로 섬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닐까... 섬은 뭔가 모르게 낯선 이방인이라는 느낌과 묘한 이질감을 주는 기분이 있기 때문이다. 우도나 비양도처럼 간단히 도항하는 느낌과는 사뭇 다르다. 

섬은 뭔가 모르게 낯선 이방인이라는 느낌과 묘한 이질감을 주는 기분이 있기 때문이다. 우도나 비양도처럼 간단히 도항하는 느낌과는 사뭇 다르다

섬 여행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 봐야 25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앞에 냄비를 뒤집어 놓은 듯한 섬이 나타났다. 곧 경적을 울리며 배가 도착한다. 괜히 기대된다. 이곳에서 보는 제주도의 풍경은 어떨까. 지난번 비양도에서 본 제주도는 그냥 밋밋했다. 협재 바다와 금능 바다가 보이는 곳이기는 해도 멀리 한림항의 모습과 수많은 민가의 모습에서 그다지 감동을 받았던 기억은 없다. 물론 등대에 놀라 북쪽 바다를 바라봤을 때는 뭔가 탁 트인 시원한 느낌이 있었지만 이곳은 남지나해로 가는 망망대해 한가운데라는 생각을 하니 묘한 설렘이 남는다.


섬에서 내리며 뒤를 돌아보니 장관이다. 송악산과 산방산이 너무나 멋들어지게 보인다. 그 옆으로 형제 섬도 보이고 송악산 둘레를 걸으며 내려다보던 그 절벽들이 여기서는 아스라한 모형처럼 자태가 이쁘다. 


산방산이 멀리서 보면 저런 중압감이 있구나 싶다. 난 개인적으로 산방산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너무 위압스럽기도 하거니와 바위의 어두운 색깔이 늘 음울한 기분을 느끼게 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도 약간은 흐릿한 날씨에 송악산과 어우러져 마치 한 덩치인 듯 보이는 자태는  느끼기 힘든 풍광이다. 우도에서 일출봉을 볼 때의 느낌괴 비슷하다. 이래서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가 보다. 

배에서 내린 사람들은 우르르 한 곳을 향해 가더니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빌린다. 이 바람에 자전거를 탈 생각에 그다지 맘에 내키지 않는다. 내리는 순간부터 바람은 거칠데 없이 온몸을 향해 거세가 불어닥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멀리 보이는 풍력발전기는 거센 바람에도 돌지 않는다. 초속 5m가 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는다는 바람 개비지만 그래도 이 바람이면 당연히 돌아야 한다. 멀리 건물 사이에 올라와 있는 작은 바람개비 모양의 프로펠러만 하염없이 돌고 있다. 아마도 바람의 방향이 맞지 않아 돌지 않는 것은 아닌가.

 약간은 흐릿한 날씨에 송악산과 어우러져 마치 한 덩치인 듯 보이는 자태는  느끼기 힘든 풍광이다

안내판을 보니 산책코스 중 해안도로를 전부 돌면 1시간 30분. 올레길 표시만을 따라 돌아도 1시간 30분이다. 이왕이면 올레길을 따라 걷기로 했다. 그래 봐야 집집 사이로 난 기다란 해안길이 겹쳐 있고 다른 산책길과 겹쳐 있는 거라 어디를 걸어도 마찬가지이기는 하다. 

마을 입구로 들어서니 아이들이 할아버지를 부른다. "할아버지 이거 저희들이 잡았어요"

나도 괜스레 걷다 말고 옆으로 슬쩍 끼어들었다. "이거 너네들이 잡았냐?"

득의양양한 녀석들이 나에게 자신들이 잡았다면 으쓱대면 말한다.

"이거 그냥 손으로 잡았어요." 그리고는 페트병을 반쪽 오려낸 통에 담아왔다며 보여준다.

작은 물고기 10여 마리와 우럭으로 보이는 제법 큰 물고기 한 마리가 대야에 담겨 있다.

"대단하고 멋지다"라는 칭찬을 하고는 녀석들에게 멋진 포즈를 취해주고는 다시 길을 나섰다. 


집들 담벼락을 빠져나온 길은 다시 해안도로와 연결된다.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내 옆을 힘주며 지나간다. 걷는 나보다야 당연히 속도가 빠르겠지만 맞바람을 맞으며 애써 페달을 젓는 모습이 그다지 신나 보이지는 않는다. 아무렴 어떤가 싶게 너른 바다와 멀리 보이는 마라도를 향해 천천히 걷는다.  

 

순간순간 밭에 심어둔 콩과 억새가 눈에 들어오고 그 너머로 풍력발전기의 블레이드가 들어오는 게 영락없는 나우시카 마을이다. 이곳은 전기에너지만으로 다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제주도의 계획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 전기가 자급자족이 된다는 것인지 되게 하겠다는 것인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걷는 나보다야 당연히 속도가 빠르겠지만 맞바람을 맞으며 애써 페달을 젓는 모습이 그다지 신나 보이지는 않는다

해안도로를 걷던 발걸음은 약간의 언덕을 향해 오르게 되어있다. 멀리 정자가 보이는 곳이 있으니 저곳에서는 풍광이 더 좋으리라 싶어 올랐더니 가파도의 중심이 훤희 들어온다. 가파도에 산이 없다는 것을 순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이제부터는 여기가 곧 정상이자 평지이자 마을이자 보리밭이다.  


아... 이 너른 장소에 보리를 심으면 봄에는 청보리가 바람에 흩날리겠구나. 아스라한 그리움이 벌써부터 가슴에 와 닿는다. 봄에 이곳에 와야 할 이유가 생겼다. 지금도 이처럼 시원한데 청보리가 바람에 살랑거리면 얼마나 이쁘려나... 그러면 온 섬이 몸살을 앓을 것이고 수익도 꽤 오를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만큼 매력적인 평지와 다시 배를 내렸던 곳을 향해 내리막이 나타났다. 보리를 대신해 콩이 심어있지만 역시 그 보리밭 사이, 아니 콩밭 사이로 펼쳐진 바다와 멀리 송악산과 산방산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자태이자 그리움의 상징이 되기도 하리라. 

갑자기 다른 날 온전히 하루를 민박집에서 보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혹은 이곳에서 6개월 정도 머물고 싶다. 사람이 맑아지고 깨끗해지지 않을까 싶은 기대가 앞선다. 자꾸 시간을 뒤로 돌리는 일이 먼저 생각나는 걸 보니 나도 점점 늙어감을 느낀다.  그래도 젊은 시절 한 번쯤 해보고 싶었던 이벤트들이 머릿속에 먼저 생각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여유가 있으면 와이프와 적어도 한 달 정도는 있었으면 좋겠다. 일주일이라도 좋으니 말이다. 


보리를 대신해 콩이 심어있지만 역시 그 보리밭 사이, 아니 콩밭 사이로 펼쳐진 바다와 멀리 송악산과 산방산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자태이자 그리움의 상징이 되기도 하리라


산책로를 따라 콩 밭길을 걸으니 모든 풍경이 바다 건너 풍경과 함께 어우러져 눈에 들어온다. 이곳만의 풍경이래 봐야 중간 마을의 집들과 포구에 있는 몇몇 집들, 그리고 펜션이나 게스트하우스를 제외하고 무엇이 있을까 보냐...  


다시 길은 섬을 가로질러 반대편의 해안도로로 나를 이끈다. 그곳에 다달으니 많은 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고 있다. 해녀 한분이 등짐에 무언가를 잔뜩 지고 바다에서 나오고 계신다. 한 자루 가득인 걸 보니 뭔지는 몰라도 꽤 많은 것들에 대한 수확이 이루어진 모양이다. 아마도 전복이나 소라 등등이 포함되어 있겠지... 저 물건들은 어촌계에서 구매해 어디로 팔려가려나... 궁금하지만 물어볼만한 게재는 아니기에 멀직히 해녀 할머니를 보며 밋밋한 해안도로를 향해 걷는다. 

갑자기 다른 날 온전히 하루를 민박집에서 보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혹은 이곳에서 6개월 정도 머물고 싶다

반대쪽에 있는 폭낭에 거의 다달을 즈음. 뭔가 당같은게 보인다. 설명에는 마을의 안녕을 위해 7명이 남자들이 목욕재계를 하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란다. 당은 아니다. 유교식 마을제사인 모양이다. 당이라면 이름도 ~~ 당이라고 쓰여있을 텐데 아마도 유교식 포제의 형식을 띤 것이 아닐까 싶다. 나중에야 발견한 것이지만 선착장 맞은편에 해녀 할머니들을 위한 할머니당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름은 제단집.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기 위해 음력 2월을 기점으로 기일을 택일하여 남자 주민 대표 9명이 3박 4일 동안 몸을 정갈히 하고 정성껏 재물을 마련하여 하늘에 천재를 지내는 곳. 이것이 그 설명이다.

약간의 시간을 되돌리면 아까 지나온 길이다.

해안을 걷다 언덕으로 오른 가파도는 완만한 언덕 위에 펼쳐진 평야와 같은 느낌이다. 비록 아주 드넓은 평야는 아니지만 어디 한 군데 굴곡진 곳 없이 평평하고 완만하게 섬 아래쪽으로 이어져 있다. 


섬 전체를 종단하는 메인 도로가 하나 있다. 그 양 옆으로 보리밭 예정지와 콩밭이 펼쳐져 있는 모습은 역시 잠깐의 시간을 되돌리며 사진을 바라봐도 잊히기 쉽지 않은 풍경이다.  


제사집을 지나고 나니 가파도의 남쪽 끝자락이다. 벌써 끝에 와버리다니 북쪽은 여객선이 오고 가는 선착장이 있지만 남쪽은 어로를 할 수 있는 제반 시설과 사람들이 몰려 사는 제대로 된 마을이다. 중간쯤 섬의 언덕 위에 있는 각종 관공서들. 이를테면 보건지소와 초등학교 소방대 등등과 이어진 집들이 주를 이룬다면 남쪽은 말 그래도 집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는 느낌이 저절로 난다. 


멀찍이 그 마을을 바라보고 있으면 괜히 색깔을 다르지만 멋진 항구도시로 유명한 산토리니와 크로아티아의 해안도시를 생각나게 한다. 물론 그 무게감은 아니더라도 항구도시가 주는 공통의 연륜과 역사 그리고 아스라함이 한데 뭇어나오는 느낌이 있다.  

벌써 끝에 와버리다니 북쪽은 여객선이 오고 가는 선착장이 있지만 남쪽은 어로를 할 수 있는 제반 시설과 사람들이 몰려 사는 제대로 된 마을이다

남쪽 항의 끝자락을 찍고는 다시 북쪽 선착장을 향해 난 메인 길로 접어들었다. 이곳은 상당히 매력 있는 장소다. 옛날식 전통주택인데 아스라한 골목길이 주로다. 그 옆에 카페도 있고 식당도 있다. 곳곳이 민박집이다. 그 한 줄만 바깥으로 벗어나면 그곳은 다시 밭과 바다가 이어진다. 그 와중에도 고인돌의 무리가 발견된 곳이 있다. 옛적에도 이곳에 사람들이 살았다는 이야기다. 참  오래전 이야기다.


집들 하나하나를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맘이 콩딱이며 신이 난다. 어느 집은 식당이고 어느 집은 민박이다. 그럴듯한 집인가 보다 하니 소방서지대다. 앞쪽에 멀리 보이는 바다와 집들이 연이어 내 눈을 즐겁게 해준다.


가파도의 모든 주택은 다른 지역과 달리 파란색이 아닌 오렌지색을 택했다. 파란색이야 흔한 색인데 여기에 오렌지색을 택한 것은 잘한 것 같다. 오히려 좀 더 짙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오렌지 칼라를 무척이나 좋아하지만 그것과 달리 바다의 색, 그리고 밭의 색과 참 잘 어울린다는 감성이 드러난다.


그 섬의 수로를 걸으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걷는다. 얼마 남지 않은 미지의 공간이 끝을 다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것마저 후딱 지나쳐 버리는 일이 사뭇 아쉽고 안타깝기 그지없다.


처음에는 2시간 반 동안 이 코딱지만 한 섬에서 무얼 하고 있는가 싶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시간에 쫓기는 내가 싫다. 다시 한번 시간을 멈추거나 늦춰서 이 섬과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과 가까워지는 것도 즐거운 여행 혹은 삶의 여정이 아니겠는가...

얼마 남지 않은 미지의 공간이 끝을 다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것마저 후딱 지나쳐 버리는 일이 사뭇 아쉽고 안타깝기 그지없다

학교를 지나니 해수관음보살상이 있는 대원사 암자가 보인다. 이곳에는 교회도 있고 절도 있다. 종교의 힘이란 여러모로 무섭다. 제사집이라는 유교식 마을 제단도 있고 할머니 당도 있다. 자그마한 섬에 여러 가지가 있다. 그래서 더 정감이 가는지도 모른다.


이젠 어쩔 수 없이 서쪽에서 마을 중앙을 거쳐 동쪽 해안과 보리밭을 지나던 그 갈림길에 왔다. 다시 원위치된 느낌. 더 이상 가파도에 신비한 장소가 남아있지 않다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물론 발길이 닿지 않았던 길이 몇 군데 더 있겠지만 그것으로 인해 가파도의 신비감이 높아질 것 같지는 않다.


아까는 올레길로 조금 돌아서 갔다면 지금은 선착장을 향해 직진하는 길 밖에 없다. 저 아래 보이는 시작점이 아이들과 물고기 잡았다고 부러워하며 칭찬했던 그 장소다. 돌고 돌아보니 예상치도 못한 그곳에 벌써 와버렸다.아마 인생도 괜히 신비하고 긴듯해도 돌고 돌다 보면 예상치 못한 곳에서 종점일 것이 너무 자명해 보인다.

갑자기 맥이 빠진다.
 

초등학교를 정점으로 섬은 남북으로 기울어져 있다. 이곳이 나름 정상인 셈이다. 정겨운 집들 몇 채를 숨바꼭질하는 심정으로 기웃거리며 올라왔는데 어느새 벌써 섬의 정점을 지나고 보리밭과 함께 선착장이 있는 내리막길에 들어섰다. 이곳의 집들은 바다로 바로 난 집들이나 주도로 사이로 바다가 보인다. 진짜 이 섬에서 몇 개월 지내면서 글을 쓰면 좋겠다. 희망사항이다.


색 바랜 오렌지색 지붕으로 덮인 집들을 지나고 나니 다시 출발점이다. 이곳에서 남은 30분을 어찌 지내야 할 것인지 그것이 문제로다...

아마 인생도 괜히 신비하고 긴듯해도 돌고 돌다 보면 예상치 못한 곳에서 종점일 것이 너무 자명해 보인다

가파도를 한 바퀴 돌고 나니 30여분의 시간이 남았다. 선착장 주변의 느낌을 스케치로 표현할 밖에 없다.

바람이 점점 거세게 불어온다. 파도가 섬에 들어올 때와는 차원이 다르게 높다. 아마 내일은 가파도 들어오는 배가 결항될 것이 분명하다. 이 정도 파도라면... 


아마 들어와서 나가는 마지막 배도 섬에 있는 손님들이 섬에 발을 묶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들어오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러다 보니 선착장 주변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도 강한 바람에 몸을 숨기고 있다 어디선가 슬그머니 나타난다.

자전거를 타고 시간에 맞춰서 오는 사람, 대합실에서 앉아 넋 놓고 기다리는 사람. 그 사이에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 방파제에서 낚시하는 낚시꾼들 옆에서 시간을 때우며 구경하는 사람, 역시 시간 죽이는 일은 뭐든 집중하는 일이 필요하다. 


나 역시 무엇을 할 것인가 보다 해녀들이 물질 후 따온 수확물을 바닷물에 담가놓는 장면과 바닷가에 있는 할머니당을 둘러보는데 시간을 보낸다. 


"패총  가까운 해안 절벽 큰 바위에는 둥글게 돌담으로 울타리를 쌓은 뒤 가운데 작은 돌 2개를 받쳐놓고 크고 평평한 돌 하나를 얹은 제단이 있다. '춘포 제단'이다. 제주 민간 신앙에서 제단이 남자들이 주도하며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비는 축제 성격의 제사를 치러지는 곳이라면, '당'은 여자들이 주도하여 어부와 해녀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곳이다. 가파도 주민들은 당을 흔히 '할머니당'이라 부르는데 상동과 하동에 각기 하나씩 있다. 상동의 할머니당이 '매부리당' 하동의 할머니당은 '뒷 서낭당'이다. 바다에 깊이 기대어 사는 만큼 할머니당은 가파도 사람들에게 매우 소중한 공간이다." 


그래도 파도가 너무 높아 걱정이다. 저 멀리서 배가 출렁이며 보이기 시작하자 마음에 안도감이 슬며시 자리 잡는다. 배가 고동 소리를 낸다. 나 도착하고 있거든 하고 알리는 말소리 같다. 역시 돌아갈 때는 파도가 들어올 때와는 차원이 다르다. 출렁이는 시간이 짧으니 망정이지 한 시간 이상 지속된다면 결코 견딜 수 없는 파도의 높이가 되리라... 


아주 오래전 빈탄으로 신혼여행을  갔던 기억이 난다. 싱가포르에서 40여분 배를 타고 빈탄 섬에 들어갔는데 하도 출렁이는 높이가 심해 개고생 했던 기억이 난다. 아직 기억이 살아있음을 증명해 준다. 

파도를 사진으로 찍었더니 아무런 의미 없이 멋진 문양을 만들어 준다. 

하루가 이렇게 지났다. 버스를 타고 숙소에 도착하면 역시 저녁. 어두운 밤. 오늘 저녁은 무얼 먹을지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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