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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구리 Apr 08. 2018

지방에서 살아간다는 것

[수필시대] 혹은 제주에서 살아간다는 것

[수필시대] 2018년 봄호 수록



어느덧 지방에서 살아가기 시작한 지 4년이 되어간다.  서울 소재의 대학을 가고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했던 시간들. 그렇게 서울에서  30년을 살고 불현듯 지방으로 이주를 했다. 어린 시절까지 거슬러가면  수도권을 벗어나는 일은 늘 이상하고 비정상적이었던 상황으로 여겨졌다. 


'지방이 어때서?'라고 발끈하는 분들은 정당한 흥분이다. 그럼에도 어떤 이유로든 서울과 지방을 나누는 것이 이상하지 않도록 교육을 받았고 그것이 자연스럽도록 생활의 중심이 서울로 향하던 시간들이었다.


그런 사람이 철저한 계획하에 귀농을 준비함 없이 혹은 전원생활을 꿈꾸지도 않은 채 지방행을 택했다. 어느 날 아무 준비 없이 쫓기듯 트렁크 하나 들고 남들이 사회적 트렌드처럼 여기며 부러워하는 제주행 비행기를 탔다. 


어느덧 생존과 적응이라는 절체절명의 순간들이 벗어난 듯한 여유도 생긴다. 물론 4년이 지난 이 순간이 이전보다 결코 나아졌다는 데는 동의하지 않는다. 단 한 가지 지역 내 알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어느 철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 대충의 감을 잡을 수 있게 됐다. 생존의 옵션이 많아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주말을 보내며 오랜만에 집 주변을 어슬렁거릴 기회가 생겼다. 몇 달 동안 못 가봄직한 바닷가도 서성이고 마을 사업하는 현장에 가서 지인과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도 한다. 해녀가 오르는 바닷가에 판석을 깔아 놓으니 한결 보기 좋고 이 지역의 이정표가 될 것 같다는 평가도 서슴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제주의 초겨울은 육지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스산하고 나무들이 내년을 위해 잎새를 떨어뜨리는 장면들이 비교적 드물다. 대신 제주의 겨울은 공교롭게도 푸르름과 연결되어 있다. 육지에서 소비하는 겨울 채소의 대부분을 책임지는 지역답게  온 밭은 푸르름으로 가득하다. 줄기를 한창 올려낸 당근은 새파랗게 너른 풀밭을 연상시키고 섬세한 당근밭보다는 거칠어 보여도 무밭의 푸르름은 그 짙음이 한결 깊다.


장을 보고 온 물건들을 얼른 내려놓고 집 옆의 밭으로 나섰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일찍부터 밭에 나선 할망들이 당근을 캐고 있다. 바로 옆 당근밭이 수확 중이니 즐거운 일이다. 당근 몇 개로 제철의 맛을 낼 수 있겠다.


견물생심이라 했던가. 들고 간 얇은 비닐을 채우는 데 불과 몇 걸음 이상이 필요하지 않다. 밭의 안쪽으로 채 들어가기도 전에 입구에 놓인 자그마한 당근을 담기만 했는데 그새 주머니가 가득 찼다. 갑자기 지인들이 생각난다. 사무실 직원도 당근을 좋아한다고 했고 다른 사람들도 겨울 당근에 대해 아쉬워하던 순간이 여러 번 있었다. 


부리나케 집으로 들어가 커다라 비닐 두 개를 더 들고 나온다. 이미 주운 당근은 내가 먹기로 하고 주머니 2개를 들고는 당근밭을 몇 발짝 서성인다.  10분이 채 되지도 않았는데 당근이 비닐에 가득이다. 꽤나 부자가 된 느낌이다. 마치 내 밭 인양 득의양양하다.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당근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밭을 더 서성인다.


50년이 넘도록 도시에 살면 이 같은 경험은 참 낯설기만 하다. 수확이 끝난 밭의 남은 채소들은 그 누가 들어가 가져가도 밭주인은 아무 말하지 않는다. 겨울이 되거나 수확철이 되면 사람들은 밭을 찾아 필요한 야채를 헌팅하기도 한다. 물론 그래 봐야 몇 개밖에 필요 없지만 사람의 욕심을 채우기에는 충분한 풍족함이다.


자연과 농업의 풍족함에도 소유에 대한 집착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는다. 상품으로 팔 가치가 없는 것. 수확 이후의 것들을 마지막까지 내 것으로 여겨 다른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 것이 소유의 기본 패턴이다. 내가 농사를 지었어도 분명 이리했을 것이다. 


풍족함으로 이리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필요로 한 만큼 땅에서 얻었으니 나머지는 주변으로 돌리는 것.  땅이 척박했기 때문에 타인을 고려하고 배려하는 생활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얼마나 당근을 먹을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몇 개 정도야 생으로 먹을 수 있겠지만 그것을 마트에서 산다고 해도 얼마 되지도 않는 금액일 테니 이 많은 당근을 보며 마냥 즐거워할 금전적 효과는 그다지 없는 셈이다. 그럼에도 나는 하루 종일 마치 그 당근밭이 내 밭 인양 뿌듯함을  지울 수 없다. 더구나 아직 집 옆의 몇몇 당근밭은 물론 무밭이 수확을 마치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당근과 무를 올해도 먹을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인가 마음이 여유로워진다.  다음날 출근한 사무실에 누군가 귤 한상자를 열어놨다. 어제 귤밭에서 따온 것이란다. 귤 나눔이야 흔한 일이지만 날이 추워지는데 마음이 추워지지 않는 이유는 결국 삶의 여유 때문이지 않겠는가.


혹한의 전조로 바다의  차가움이 육지를 넘보는 계절. 그 계절의 공격에도 상쾌함으로 맞이할 수 있는 이유는 지방에서 살고 있는 여유로움이 조금씩 몸에서 흙냄새 나듯 배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지방 그곳도 제주에서 살아가는 일은 아직은 희망찬 일인 이유가 많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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