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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구리 Mar 02. 2018

서귀포, 이중섭거리의 단상

예술가의 예술적 감성 대신 계절의 단편을 느끼고 온 이중섭거리 

제주에서 서귀포는 제주시와는 다른 느낌을 준다. 날씨의 따스함도 있겠지만 남쪽 바다를 바라다보는 느낌과 그곳에서 아련히 생겨날 것 같은 예술과 감성의 분위기가 곳곳에서 느껴지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여타 지역보다 시간이 늦게 가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 같은 분위기의 한 복판에 이중섭거리가 있다. 작가의 산책길의 시작이기도 한 이곳은 사실 일 년 남짓 제주도와 인연을 맺어온 위대하지만 불행했으며 불꽃처럼 짧은 인생을 살다 간 그러나 한국 미술계에는 크나큰 영향을 미친 이중섭이라는 인물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이중섭의 일생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제주도 서귀포가 이중섭의 고향이거나 아니면 오랫동안 이곳에서 지내며 인연이 깊은 것으로 여기기 십상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서귀포하면 이중섭거리가 우선 떠오르는 연관성이 형성됐기 때문이다.


고예현 작가의 전시회가 이곳에 있다 하여 핑계 김에 놀러 온 서귀포 시내. 정작 작가의 작품은 이래 저래 짧게훑어보고는 이중섭거리의 모습에 시선을 옮긴다. 이미 수차례 와본 곳인데도 문화의 거리라는 이미지는 혹시나새로운 영감과 창조성이 드러나지 않을까 하는 설렘을 갖게한다. 

일 년 남짓 제주도와 인연을 맺어온 위대하지만 불행했으며 불꽃처럼 짧은 인생을 살다 간 그러나 한국 미술계에는 크나큰 영향을 미친 이중섭이라는 인물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날씨가 스산한 때문인지 주말임에도 많은 사람이 북적이지는 않는다. 아직 3월에 접어들지 못한 바이기도 하거니와 유난히 추웠던 올 겨울의 한파가 채 가시지도 않은 후유증이리라. 예전보다 늘어난 듯한 소품 상점가에 이런저런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자니 괜히 마음이 따뜻해진다. 사람들이 무언가 예술적 창작에 대한 희망이 있거나 최소한 예쁜 소품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리라.


가게에 대한 관심은 멀리서 바라보는 것으로 패스. 오랜만에 이중섭이 머물렀던 초가와 서귀포 관광극장의 모습에 집중키로 한다. 

<이중섭 거주지의 모습>

이중섭 가족이 피난 와서 1년여를 머물렀다는 초가집.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말년에 자신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힘겹게 세상을 떠나야 했던 그러나 짧은 시간이나마 생계의 어려움 속에서도 행복했던 시절을 보냈던 장소라 하니 더 아련한 감정이 든다. 그럼에도 의구심이 남는다. 이중섭은 이 장소에서 과연 행복했을까. 그렇다면 왜 1년여만 살다 부산으로 훌쩍 떠나가버리고 말았을까. 물론 이유야 충분히 있었겠지만 괜히 꼬아보는 시선으로 그가 머물렀던 아주 작은 공간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이미 수차례 와본 곳인데도 문화의 거리라는 이미지는 혹시나새로운 영감과 창조성이 드러나지 않을까 하는 설렘을 갖게한다

초가집 한 채를 다 쓴 것도 아니고 그 옆에 아주 작게 구분되어 있는 공간이다. 이 곳에서 가족들이 지낼 수 있었으려나 싶을 만큼 좁은 공간이다. 어린아이 2명이기는 하지만 4명이 지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작은 공간. 나 같으면 이곳에서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았다고는 말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암튼 그는 그렇게 살았고 이곳에서 작품생활을 해 나갔으니 이중섭이 제주에 신세를 진 것이라기보다는 제주도가 이중섭에게 큰 신세를 진 셈이리라. 오늘날 그 1년의 인연으로 한 도시의 정체성의 상당 부분을 만들어 가는 계기가 됐으니...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말년에 자신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힘겹게 세상을 떠나야 했던 그러나 짧은 시간이나마 생계의 어려움 속에서도 행복했던 시절을 보냈던 장소라 하니 더 아련한 감정이 든다


때마침 매화가 막 꽃을 피우고 있다. 그 마당에 피어난 매화가 그 당시에도 피어있었을까. 아님 생가터를 복원하면서 심어놓은 것일까. 생각은 사사건건 여러 가지로 연이어 그치지 않고 돌아간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생각터를 둘러보며 수군거리고 간다. 생각했던 곳이 너무나 초라하고 작은 장소이기 때문이리라. 발길은 자연스럽게 뒤쪽의 문으로 나와 거리를 향한다. 공방 이름도 중섭공방이라고 써져 있다. 다양한 소품 점마다 파는 물건도 제각각이지만 예술적 혼에 기대어  물건과의 연관성을 이어갈지는 모를 일이다. 사람들이 찾는 것은 결국 자신의 맘에 와 닿는 자그마한 물건일 테니 말이다.


날이 조금 맑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남국의 도시가 주는 약간의 이국적인 느낌은 뭐로 표현할 수 없는 이질감을 준다. 그래서 서귀포는 올 때마다 기분이 좋아질뿐더러 늘어지는 느낌을 어찌할 수 없다. 이런 감성이 있기에 수많은 예술가들이 이 도시를 찾아 작업을 하고 거리를 헤매고 예술혼을 높이려는 의지를 세우는 모양이다.

그는 그렇게 살았고 이곳에서 작품생활을 해 나갔으니 이중섭이 제주에 신세를 진 것이라기보다는 제주도가 이중섭에게 큰 신세를 진 셈이리라

나는 예술혼이 있나? 오늘은 여기까지. 그냥 없는 것으로 하기로 하고 다시 발걸음을 서귀포 관광극장으로 향했다. 입구에서 멀지 않은 장소인지라 잠깐의 시간을 내서 극장의 모습을 담는다. 이 극장에서 무언가 공연을 볼 수 있으면 좋겠지만 서귀포 관광극장은 극장 그대로의 모습만으로 충분히 의미 있는 공간이다.

무슨 공연이 끝났는지 아니면 업무시간이 끝났는지 관계자들이 장비를 정리하고 있다. 불쑥 약간의 목례를 하며 극장 안으로 들어선다. 역시 극장의 분위기는 최고다. 시멘트를 바른 돌과 돌을 중심으로 쌓아 올린 벽, 그리고 그 벽들을 타고 수많은 시간 동안 퍼져나간 넝쿨 가지가 마치 인류의 역사나 진화의 흔적들을 시간의 벽에 새겨놓은 모습이다.


그 위의 지붕과 하늘과의 거친 연관성은 어떠한가. 하늘이 정갈하고 맑고 순수하다면 그것에 닿으려 노력한 인간의 수많은 노력과 시간의 흔적들이 담벼락 위부분에 남겨져 있다. 그래서인가 하늘과 건물 끝자락과의 불일치 및 불균형이 더 맘에 든다. 

시멘트를 바른 돌과 돌을 중심으로 쌓아 올린 벽, 그리고 그 벽들을 타고 수많은 시간 동안 퍼져나간 넝쿨 가지가 마치 인류의 역사나 진화의 흔적들을 시간의 벽에 새겨놓은 모습이다

이 장소는 극장의 공연을 보기 위한 것보다는 극장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고뇌를 보기 위해 앉아있기에 더 어울리는 장소이기도 하다.

문뜩 바닷가로 열린 창을 통해 보이는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멀리 교회의 십자가 탑도 보이고 창을 가리는 나뭇가지의 산만한 모습들이 시야를 가린다. 어느 창은 닫혀있고 어느 창은 여백으로 가득 차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 창을 통해 바다를 보고 하늘을 보고 그 무언가 필터를 통해 세상을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자연에 인공을 더한 예술의 느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창의 역할은 그것을 통해 세상과 자연을 볼 수 있기에 의미를 더해주는 것이리라.

이 장소는 극장의 공연을 보기 위한 것보다는 극장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고뇌를 보기 위해 앉아있기에 더 어울리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 극장의 벽은 덩굴과 거친 돌과 시멘트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벽간의 성격 차이가 한 모퉁이에서 극명하게 차이를 드러나기에 더 인상적이다. 마치 추상화를 그리는 작가의 인위적 구분을 의식하듯 각 부분마다 주어진 역할이 다르다는 생각을 하기에 충분하다. 


"넌 어느 파트가 더 맘에 드니?"

이상한 질문이라도 해야 할 모양이지만 "너의 인생이 어떤 모양으로 시간을 쌓아가고 어떤 덩굴로 엮어가고 있니?"라고 질문하면 좀 더 어울리지 않으려나...


창과 벽과 덩굴과 하늘을 번갈아 몇 번이고 쳐다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바깥으로 나오려니 나이 든 노인분이 내 주변을 서성인다. 그제야 그분이 내가 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문을 닫을 시간인데 나 때문에 기다리고 있었던 것. 시간을 알아챈 나는 부리나케 고맙다는 짧은 인사와 함께 다시 거리로 나섰다. 때마침 몽우리를 피어내고 있는 나무를 만나 그 녀석과 깊은 인사를 나누어 본다. 아마도 목련이겠지 싶은 생각과 함께...

"너의 인생이 어떤 모양으로 시간을 쌓아가고 어떤 덩굴로 엮어가고 있니?"라고 질문하면 좀 더 어울리지 않으려나...

언제나 몽우리를 활짝 피우려나, 속에서는 얼마나 날씨와 자신과의 시간을 조절하면서 시기를 맞추고 있으려나. 아직 추울 텐데 꽃샘추위를 견뎌내는 녀석의 모습과 이후의 찬란한 꽃 피움을 바라보기 위해 다시 한번 이 거리를 찾아야겠다. 그때는 매화는 지고 없을 테고 목련은 제 시간을 찾아 흐드러지게 피고 있을 테니 그 시간만큼 어떤 이는 아파하고 어떤 이는 행복감에 떨며 이 거리를 찾아 감탄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시간은 지나가는 것이 마땅한데도 나에게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남아있을고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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