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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구리 Feb 02. 2018

눈 내린 제주_집에 가는 길

1월의 한파에 시달린 좌충우돌 방랑기

저녁 무렵 내리는 눈이 위험하다. 벌써 며칠째 날씨가 보통 추위를 넘어서고 있다. 이러다가는 가장 우려하는 사태가 예상된다. 아침에 나올 때까지는 괜찮았지만 오후부터 내리는 눈발은 바로 걱정이 앞서게 한다.


비바람이나 눈보라가 불어닥치는 날이면 어김없이 내가 사는 집의 전기가 나간다. 일반주택 2층에 지어진 가건물인지라 전기가 나가는 일은 치명적이다. 모든 난방이 다 전기로 이루어지다 보니 한겨울 그것도 눈보라가 치는 영하의 날씨에 전기가 나가서 냉골이 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다. 


그런 날을 예상하고 어제는 불가피하게 제주시내에서 하루를 보냈다. 아침에도 눈발은 가라앉지를 않는다. 마음 같아서는 차를 몰고 싶지 않은데 차를 몰지 않을 수 없다. 아주 조심스러운 운전을 할 수밖에 없다. 저단으로 살살 차를 움직인다. 브레이크를 밟으면 큰일이다. 통제가 안되면 차는 어디 가서 부딪힐지 전혀 모를 일이다.


모든 난방이 다 전기로 이루어지다 보니 한겨울 그것도 눈보라가 치는 영하의 날씨에 전기가 나가서 냉골이 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다

어린 시절 자동차를 처음으로 사서 한겨울에 학교를 갖던 기억이 난다. 언덕을 내려오며 아무런 생각 없이 무심코 밟은 브레이크로 당시 내가 운전하던  프라이드 차량은 옆으로 미끄러지며 하염없이 내려가던 상황이 벌어졌다. 그때 나는 눈이 오면 브레이크를 밟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그 몇 년 후 자유로에서 무심코 서있던 차선이 막혀 브레이크를 밟으며 차선을 바꾸던 순간 차가 빙글빙글 돌면서 중앙분리대와 부딪히는 사고를 낸 적이 있다. 사람은 잘 잃어버린다. 하지만 사고가 나면 벌이지는 이후의 처리상황이 걱정인지라 아주 조심스럽다.

도심 내의 특색없는 풍경에 눈이 덮이자 운치 백배다

사무실 입구에 도착한 나는 출근에 앞서 주변 풍경에 눈길을 먼저 준다. 도심 내의 특색없는 풍경에 눈이 덮이자 운치 백배다. 물론 박씨초가는 평소에도 볼만했지만 눈 덮인 느낌은 좀 더 고답적인 인 운치가 돋보인다.

평소에 눈여겨보지 않던 주변의 모든 건물과 사소한 것들 하나하나가 새롭다. 하물며 마당 한구석의 잡초조차 눈이 쌓이면 어느덧 그림과 멋진 예술이 된다.  하루가 시작되기에 앞서 마당과 길가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본다. 내 주변의 모습이 이렇게 아름답게 포장되어 다가온 적이 있었던가.


사무실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중간중간 밖 쪽 문을 열어보지만 눈발이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오늘 저녁 무렵에는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지...

퇴근할 무렵이 됐지만 눈발은 그칠 생각이 없다. 이제부터는 여러 가지가 걱정이다. 집에 갈 것인가 아니면 시내에서 다시 하룻밤을 보낼 것인가. 차를 몰고 갈 것인가 버스를 타고 갈 것인가. 집에 가면 냉골일 텐데 집에 가서 잘 것인가 아님 다른 잠자리를 찾아볼 것인가.  생각이 복잡하다. 아침에 세워놓은 차 근처에 가보니 어찌어찌 갈 수 있지 않을까. 대신 큰 도로만을 택해서 천천히 가보기로 했다.

차를 버리듯 주차공간에 내버려두고는 길을 나선다. 차는 이곳에 버리고 버스를 이용하기로

큰길로 나간 순간 나의 판단이 얼마나 무모했는지 금세 알아챘다. 도로는 여전히 빙판이고 눈은 계속 내리다 못해 눈보라로 변해 있다. 그렇다고 사무실로 다시 차를 돌릴 수도 없다. 일단 시청 앞으로 가기로 했다. 시청에 도착하고 나서야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도로 상태가 그대로 얼어있는 데다 눈보라가 더욱 심해 상황이 확실해졌다. 도로변의 한가한 구석을 찾았다. 차를 버리듯 주차공간에 내버려두고는 길을 나선다. 차는 이곳에 버리고 버스를 이용하기로.

버스 안에서도 걱정이다. 동부 일주도로행 급행버스를 타고 간다. 차에 사람들이 한가득이다. 이 차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타는 모습은 처음이다. 차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두 가지 마음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눈 쌓인 농촌 풍경은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히 감동적이다. 반면 이 빙판과 매서운 날씨를 생각하면 걱정이 앞설 뿐이다. 집에 도착하면 모든 것이 냉골의 상태로 유지되었을 텐데 이를 어쩌나...

컴컴한 밤길이지만 눈덮힌 농촌의 밤길은 쓸쓸함과 더불어 처연한 아름다움이 그대로 전달된다

얼마 전 잠이 들기 전 중간에 전기가 나가 밤새 냉방에서 잤던 적이 있었다. 그나마 핫팩 하나가 있어 가슴에 품고 새벽까지 견뎠던 악몽이 되살아난다. 여차 직하면 짐만 챙기고는 다시 사무실 근처로 버스를 타고 나와 사우나에라도 잠을 청할까 싶다.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후회가 막급이다. 이 어려운 상황에서 무엇하러 이곳까지 돌아왔던가. 매서운 칼바람에 눈이 실려 얼굴을 때린다. 잠바에 달려있는 모자를 쓰고 앞으로 나아가는데 추위가 가시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상황에서 어두워진 밤거리가 눈에 들어온다. 컴컴한 밤길이지만 눈덮힌 농촌의 밤길은 쓸쓸함과 더불어 처연한 아름다움이 그대로 전달된다. 중간에 켜져 있는 집안의 불빛들이 괜히 서러움을 더해준다. 나는 혼자인가. 이미 알고 있으며 자초하고 있음에도 괜히 감정을 내어본다. 쓸쓸함일까. 아니면 마음의 사치일까.

집에 도착하니 예상 그대로다. 문을 여는 순간 집안의 냉기가 바깥 날씨와 다름없다. 칸막이만 쳐져있을 뿐 냉기가 그대로 전해온다. 신발을 벗고 방바닥을 걷는 순간 발로부터 전해오는 찬기운이 온몸을 저리게 만든다. 온몸이 떨린다. 춥다.  다행인 것은 집의 전기가 벽면의 콘센트는 완전히 나가버렸지만 조명은 살아있다. 벽의 전기를 살리기 위해 두꺼비집의 차단기를 올리면 전체 전기가 떨어진다. 한두 번의 시도 끝에 조명만 살아있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신발을 벗고 방바닥을 걷는 순간 발로부터 전해오는 찬기운이 온몸을 저리게 만든다

우선 짐부터 챙긴다. 갈아입지 못한 속옷을 챙기고 양말을 챙기고 냉장고 안에 있는 밥을 꺼내 국물과 함께 저녁을 재빠르게 해결한다. 어찌 됐든 저녁은 먹어야 한다. 수도도 얼어서 설거지가 불가능하다. 싱크대에 며칠 방치해놓은 설거지 더미가 쌓여있다. 결코 깨끗함을 주창하는 인간은 아니지만 설거지통에 물 없이 쌓여있는 설거지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여간 불편하기 짝이없다.


저녁식사를 하며 지인에게 전화를 건다. 혹시 가끔 펜션 역할을 하는 다른 집 하나에 손님이 들어있는지 확인한다. 곧 전화가 왔다. 공교롭게도 손님이 있단다. 낭패다. 나름 복안이었는데... 게스트하우스를 알아보니 하룻밤 4만 원이란다. 순간 고민이다. 여기서 하룻밤을 자고 나갈 것인지 아니면 회사 근처로 돌아갈 것인지. 집 근처서 자고 다음날 버스를 타고 나간다는 사실이 영 개운칠 않다. 그렇다고 내 방의 상태가 나아지는 것도 아니고... 고심 끝에 시내로 다시 나가기로 결심하고 짐을 챙긴다.


순간 생각이 났다. 덕천에 살고 있는 지인이 혼자 살고 있다. 부랴부랴 전화를 해보니 이틀째 자의반 타의반 고립생활을 하고 있단다. 눈 때문에 버스가 끊겼고 자동차도 움직일 수 없으니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그냥 집에 들어앉아 날 풀릴 때까지 쉬고 있단다. 직장생활을 하는 친구가 아닌지라 별 문제가 없겠지만 나는 출퇴근을 해야 하니 상황이 다르다. 어찌 됐든 괜히 그곳에 가보고자 하는 마음이 든다. 이 눈보라에 버스가 끊기고 눈이 무릎 이상 쌓인 덕천을 향해 간다는 일이 너무나 무모한 일이다. 산속에 있다 시내로 빠져나와도 시원찮을 상황인데 산속을 찾아간다니. 그것도 내일 출근을 앞두고.

눈 때문에 버스가 끊겼고 자동차도 움직일 수 없으니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그냥 집에 들어앉아 날 풀릴 때까지 쉬고 있단다

조금 전 버스에 내릴 때 덕천행 버스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아주 심한 일부 중산간을 제외하고 버스가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복불복이다. 그쪽으로 가는 버스가 있으면 그 버스를 탈일이고 시내 가는 버스가 오면 역시 그 버스를 타면 그만이다.  이날의 운세에 맡길 일이다.


눈보라가 세게 몰아치는 날씨를 뚫고 버스정류장으로 향한다. 차가운 저 방에서 그만 지낼 생각을 하며 집을 나선다. 방에 정나미가 뚝 떨어진 상태다. 하루라도 더 있기 싫지만 방법이 없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해서도 여전히 마음은 오락가락이다. 시내로 나갈 것인가 중산간에 위치한 덕천으로 들어갈 것인가. 제주의 날씨는 해안가는 웬만해서는 눈이 쌓이지 않지만 올해의 날씨는 완벽히 예외적이다. 온 나라가 시베리아보다 더 추운데 제주도 예외일 수는 없다. 눈이 안 녹는다. 제주에 와서 이런 추위를 경험한 적이 없는 듯하다.


곧 버스가 한대 온다. 시내로 나가는 차다. 일단은 패스. 아무리 따뜻한 장소라 하더라도 사우나에서 하루를 보내기 위해 다시 시내로 나가는 일은 아무래도 마음이 불편하다. 일단 할 수 있는 노력은 해본 후 선택해도 늦지 않는다. 다행히 시내행 버스는 몇 대가 더 남은 듯하다.

온 나라가 시베리아보다 더 추운데 제주도 예외일 수는 없다

버스 시간표를 보니 목적지까지 가는 버스가 끊겼다. 아까 내가 본 차가 막차인 듯싶다. 아뿔싸. 이제 어쩌지...

덕천은 상덕천과 하덕천 두 군데로 갈려있다. 이야기를 듣기로는 4.3 이후에 상덕천에 살던 사람들이 하덕천으로 내려와 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거리상으로는 약 20여분이 걸린다고 하는데 정확한 거리를 알지는 못한다.


남은 선택은 한 가지. 하덕천행은 포기하고 상덕 천행 버스를 타야 한다. 지인에게 전화해보니 그 버스라도 있으면 탄 후 20여분 걸어올 요량이라면 오란다.

"형... 20여분 눈밭을 걸어서 내려와야 하는데 괜찮겠어요?"

"뭐... 이런 눈밭에 걸어보는 재미가 있잖아"
"취미 희한하네... 참, 그리고 여기도 수도 얼어서 물 안 나와요. 전기는 살아있으니 오시면 잘 수 있는 곳은 있어요."


여기도 수도가 얼었는데 그곳이라고 별수 있겠는가. 한 번만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다음 시내행 버스가 오려면 20분 이상 기다려야 하는데 그 안에 덕천행 버스가 올 수 있으면 다행이고 없으면 시내행 버스를 타면 될 일이다. 버스의 도착을 알려주는 안내시스템이 먹통이다. 얼마 전까지 곧 도착을 알려주던 버스가 갑자기 없어졌다. 깜빡이다 사라진다. 사실 이런 눈 쌓인 미끄럼도로에 버스가 다니는 것도 신기한 노릇이다. 더구나 중산간으로 올라가는 버스가 9시가 넘어서까지 다닐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눈보라가 더욱 거세지고 바람이 온몸을 파고든다. 제주 겨울의 특징 그대로 바람이 부는 겨울 제주는 참기 힘든 추위를 지속적으로 준다. 버스가 오려는 기미가 없을뿐더러 간간히 지나가는 일반 차들도 체인을 감은채 운행중이다.일반차들은 지나기 어려운 눈 쌓인 도로인데 눈은 그칠줄 모른다. 


마치 나를 위한 알림인 듯 먹통으로 제멋대로 깜빡이던 버스도착 안내표시가 극적으로 살아났다. 7분 정도면 내가 기다리던 버스가 온다는 표시가 나온다. 이미 그 집 근처를 바로 도착하는 버스는 끊어졌다. 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기다린 보람이 있다. 저 멀리서 버스가 모습을 보여준다.배낭을 뒤에 들쳐 매고 재킷에 코트를 잔뜩 끼어 입었어도 추운 데는 장사가 없다.  버스가 힘겹게 도로에서 정차했다. 나는 반가운 모습으로 버스에 오른다. 

마치 나를 위한 알림인 듯 먹통으로 제멋대로 깜빡이던 버스도착 안내표시가 극적으로 살아났다

버스 맨 앞자리에 나이 든 아주머니 한분만 앉아있다. 나 역시 멀리 갈 필요 없이 바로 옆의 맨 앞자리에 앉았다. 그 아주망이 복도 쪽으로 맨 앞자리에 앉고 나는 그 옆 의자의 똑같은 곳에 앉아 버스가 가는 길을 바라본다. 버스는 비자림로로 방향을 틀더니 힘겹게 속도를 내다. 다른 차들은 전혀 보일기미가 없다. 중산간으로 가면 갈수록 버스가 다니는 것이 기적같이 느껴진다. 비자림을 지나고 송당 쪽으로 방향을 트는 상황에서 계속해서 쌓이는 눈길을 그대로 지나간다. 이미 차선의 의미는 더 이상 없다. 송당에서 아주머니가 내린다. 이제는 내가 버스에 남은 마지막 손님이다. 이 버스는 송당을 지나 덕천 그리고 선흘을 통해 봉개와 시내로 나가는 버스다. 중산간의 산길을 어떻게 헤치고 나갈지 걱정이다. 그에 앞서 내가 가는 곳까지 갈 수나 있을지 걱정이다. 버스의 정류장 안내 화면에는 차량이 통제된 도로가 계속해서 나온다. 5.16 도로와 1100도로는 물론 교래 쪽도 통제된 듯하다. 봉개에서 들고나는 길, 이 버스가 가는 길이 아까까지는 통제였는데 버스가 다니는 것이 더 신기하다.


버스 운전사는 놀라울 정도로 속도를 내며 눈길을 운전한다. 결코 차량이 더 진행할 것 같지 않은데 차선이 없어진 채 10~20cm 이상은 족히 쌓여있는  눈길을 아슬아슬하게 운전한다. 운전실력이 놀랍다. 운전사는 자신도 걱정스러운지 조심하지만 속도가 줄어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언덕을 오르는 길에는 역시 힘겨워보인다.  송당을 지난 덕천 방향으로 가니 이미 길에는 아무것도 없고 황량한 눈보라로 밤하늘과 거리가 묘한 색깔을 보여준다. 레트로 칼라라고 할까. 색 바랜 사진 같은 밤길의 모습이 보인다. 깜깜해야 하는데 눈으로 야기된 흰색이 어둠을 완화시켜주고 띄엄띄엄 켜져 있는 가로등으로 색이 변해있다. 그 앞에 눈보라가 거센 바람과 함께 몰아치니 앞의 길도 불분명하다.  이 길을 운전하다니 놀랍다.

운전사는 자신도 걱정스러운지 조심하지만 속도가 줄어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드디어 상덕천에 내렸다. 이곳이 회전교차로가 있는 곳이라고 했다. 방향을 덕천 쪽으로 잡고 걸어서 내려오면 된다는 설명인데 내리는 순간 몸을 뒤로 돌릴 수가 없다. 몰아치는 눈발을 정면으로 맞고 서있을 수가 없다.  밤과 눈이 뒤섞여있으니 주변의 사물에 대해 인식할 수 없다. 핸드폰을 꺼내 손전등을 켜니 그나마 여기가 길이고 저쪽이 담장이라는정도가 구분 가능하다. 조금만 올라가 보니 회전교차로 같은 느낌이 난다. 나중에 이 길을 지나면서 늘 다니던 장소였다는 생각하니 어이가 없기도 하다.


방향을 잡았다. 지인에게 전화를 하니 벌써 왔냐며 자신은 이제 나간다고 한다. 20분 후 정도 내려오라고 하는데 말이 좋아 20분이지 이 날씨에 이 거리를 걷는다는 게 너무 힘겨운 일이다. 그래도 기분이 좋다. 마치 오지의 산길을 헤매는 느낌이다. 아마 아무대로 목적지가 없이 이렇게 동떨어져 있다면 큰일이겠지만 아는 지인이 나를 마중하러 나온다니 겁이 줄어든다. 


걷는 도중 아무런 빛이 없는 길이 나오면 아무리 눈빛이 있어도 길을 전혀 가늠할 수가 없다. 손전등을 통해 몇 군데의 상태를 체크하며 이곳이 제대로 된 길이라는 것에 확신을 갖는다. 10여분을 내려가다 보니 저 멀리서 누군가 헤드랜턴을 켜고 걸어올라온다. 지인인 듯싶다. 처음에는 그 불빛조차 가늠이 되지 않았는데 검은 물체가 걸어오는 것을 확인하고 곧이어 사람모습이 구분된다. 반가워해야 하나 무서워해야 하나....

아마 아무대로 목적지가 없이 이렇게 동떨어져 있다면 큰일이겠지만 아는 지인이 나를 마중하러 나온다니 겁이 줄어든다

"형... 용케 잘 걸어내려 왔네... 이런 날씨 완전 예술이지요"

"나. 너무 신나고 좋아. 완전 내 스타일이야... 제대로 조난당한 후 살아 돌아가고 있는 느낌이야"

"너무 멀어서 차 몰고 올라왔어요."

이 눈길을 헤치고 경차를 끌고 올라왔단다. 그냥 걸어오다 만나도 될 터인데 본인이 귀찮았던 모양이다.

"어떻게 이 길을 뚫고 운전을 해..."

"아래까지는 겨우 올라왔는데 더 이상은 겁나서 저 아래 세워뒀어요"

차는 아래쪽에 시동을 걸어놓은 채 나를 맞이하고 있다. 

"내려가는 길이 걱정이긴 하지만 천천히 가지요"

사실 내리막 눈길에서 운전하는 것은 운전이 아니다. 최대한 조심조심 목적지를 향한다. 생각보다 훨씬 멀었다. 눈길에서 30분 이상을 걸어야 하는 거리다.


그나마 마을로 들어서면 바람이 한결 잦아들었다. 눈은 계속 내리지만 바람이 줄어들고 포근한 느낌이 더 강하다. 더구나 이번 눈은 잘 뭉쳐지는 눈이다. 


주택가의 한 복판에 위치한 그 친구의 집에 도착하니 방한 가운데 화목난로가 기다리고 있다. 도착하자마자 땔감을 난로에 집어넣는다. 따각따각하는 나무에 불붙는 소리가 난다.


이제야 오늘 잠자리를 찾았다. 비록 수도도 없어 씻기도 힘들지만 그래도 따스한 방에서 눈 내리는 겨울밤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즐거운 상상이다. 종종 문을 열고 바깥을 쳐다본다. 

눈은 이 느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 갈길을 계속 간다. 밤새 내리는 눈의 양이 줄어들지 않는다. 내일 제시간에 출근하려는 목표는 머릿속에서 지웠다. 마치 먼 지방으로 여행을 온 기분이다. 

"나 여기 왜 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무슨 요일인지 뭐하러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눈 속에서 고립된 채 3일을 보내고 있는 집에 하루를 더 보태려고 왔다. 자발적 고립의 시간이 왔다.

따스한 방에서 눈 내리는 겨울밤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즐거운 상상이다

밤새 눈 내린 마을을 배경으로 온몸으로 겨울을 맞으며 아침을 맞는다. 버스가 어제도 다녔으니 오늘도 다닐 것이다. 사무실까지 가기 위해서는 한세월이 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덮여있다. 새로운 왕국이 열렸다. 오전 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눈발은 그치지 않는다. 아침으로 따뜻한 국물을 끓여 먹고는 길을 나선다. 버스정류장에서 한참을 서성이며 버스를 기다리다 김녕으로 나가는 버스를 탔다. 역시 혼자다. 눈으로 가려진 제주 농촌의 풍경을 가능하면 더 많이 많이 기억에 담으며 겨울 하루를 시작한다. 

눈으로 가려진 제주 농촌의 풍경을 가능하면 더 많이 많이 기억에 담으며 겨울 하루를 시작한다

결국 집으로 갔지만 집에 안주하지 못하는 제주의 어느 겨울 아주 색다른 집을 찾아 나서는 길은 힘들고 험했다. 올 겨울은 이 고난의 날씨가 계속될 모양이다. 그래도 눈은 어찌 됐든 사람들을 들뜨게 만드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지겨운 눈이 여전히 밉지 않다.

여기까지는 덕천리의 모습이다. 아래는 내가 사는 집 바로 옆의 농촌마을이다. 눈 내린 모습은 언제나 정겹다. <다음날 다시 왔을 때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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