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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구리 Jan 29. 2018

겨울왕국_한라산 겨울산행 1

9시간의 눈내린 한라산 오르내리기

다시 일 년 만이다.  그러나 이번은 다르다. 게으름을 피우지 않기로 했다. 나름 아침일찍부터 서둘러 산행을 시작하기로 했다.


성판악에 도착한 시간은 아침 7시. 예상은 했던 일이지만 차를 세울 곳이 없다. 서귀포 쪽을 넘어 어쩔 수 없이 차로변에 차를 세운다. 경찰들이 나와 차를 세우지 못하도록 정리하고 있지만 눈 덮인 겨울 한라산을 오르려는 의지를 담은 수많은 등산객들의 욕구를 제어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나름 일찍이었다 싶은데 이미 성판악은 시장판이다. 관광버스가 수도 없이 계속 도착하고 장비를 갖춘 수많은 관광객들이 버스에서 내린다. 의지를 다짐하며 자신들의 팀명을 부르고 채비를 갖춘다. 인솔자가 있고 많은 경험들이 있을 테니 그들은 준비가 빠르다. 아이젠을 차고 스패츠를 덮어 눈이 등산화 사이와 발목으로 들어가는 것을 차단한다. 나와 함께 오르기로 한 일행은 아직 도착 전이다. 그 친구 역시 주차를 하고 걸어올라오는데 한참의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방법을 찾았으면 좋겠다. 주차장을 좀 더 크게 만들던지 차로변에 차를 세울 수 있도록 하던지 아니면 환승주차장을 만들던지... 머지않아 환승주차장을 만든다는 이야기가 들려오기는 한다. 

경찰들이 나와 차를 세우지 못하도록 정리하고 있지만 눈 덮인 겨울 한라산을 오르려는 의지를 담은 수많은 등산객들의 욕구를 제어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작심을 하고 찾아온 등산객들이 휴게소 초입부터 난리다. 자동차와 얽혀 시장판이지만 모두들 들떠있다. 며칠 동안 폭설이 내린 후 잠잠해진 한라산을 볼 수 있다는 기회에 들떠 있는지 모든 이들이 다른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속속 입구를  향해 발길을 옮긴다.

겨울왕국이라는 아주 단순한 용어만으로는 표현이 아쉽지만 그 이상을 표현하는 일이 너무나 어려운 것임을 새삼 알게 된다


입구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처음에야 그냥 눈이 많이 온 산 정도의 기대로 등산로를 들어섰지만 곧 나도 모르게 마음이 들떠 온다. 온 세상이 하얗다는 말로는 표현이 안 되는 새로운 세상이 펼쳐져 있다. 겨울왕국이라는 아주 단순한 용어만으로는 표현이 아쉽지만 그 이상을 표현하는 일이 너무나 어려운 것임을 새삼 알게 된다.


나무에 얹힌 눈의 높이가 심상치 않다. 사람들의 탄성이 곳곳에서 들린다. 연신 사진을 찍어보지만 내심 그런 생각도 해본다. 여기가 이 정도로 아름다울 진데 정상에 가까우면 어떤 느낌과 어느 정도의 감동을 주려고 벌써부터 이러나.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모든 풍경 하나하나가 새로운 세상과 놀라움을 준다.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감정의 동물이다. 새하얀 설경에 내가 있는 모습을 누군가 알아줬으면 좋겠고 누군가와 이 느낌을 공유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아무리 사진을 찍어보아도 현실의 그 풍경에 비하면 1/100도 안 되는 수준인지라 못내 아쉬움을 거둘 수가 없다.


곳곳에 내비치는 하얀 길을 따라 걷는다. 앞사람이 가다 서면 다시 서고 움직이면 나도 따라 움직인다. 그렇게 걷다가 사진을 찍다 보니 유난히 사람들이 눈밭에서 뒹구는 장소에 다다른다. 단순히 나뭇가지에 눈이 덮여 상고대가 보이는 곳이 아니라 유독 눈이 많이 쌓여 있는 숲지대를 지나간다. <눈의 숲>이라는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 특이함을 알기에 사람들이 사진을 찍는 포토존의 역할을 하고 있다. 나도 이곳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한참을 서성이며 뒤에서 오르는 등산객들을 먼저 보내고 시간을 지체한다. 떠나고 싶지 않을 만큼 좋은 장소이다.

한참을 서성이며 뒤에서 오르는 등산객들을 먼저 보내고 시간을 지체한다. 떠나고 싶지 않을 만큼 좋은 장소이다

잠시 후 온 가지가 하늘을 뒤덮은 풍경이 새롭게 나타난다. 무조건 눈이 쌓여 있는 듯 하지만 장소에 따라서 눈의 풍경이 달라진다. 어느 곳에는 푸르른 나뭇가지 위에 눈이 잔뜩 쌓여 부러지기 일보직전으로 보일만큼 눈의 무게로 축축 쳐 저 있는 숲이다. 나무 밑에 풀들이 자라난 비교적 나무의 밀도가 낮은 지역은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이 허리 높이 정도로 쌓여있어 태곳적 신비를 전하는 듯하다. 저곳의 눈 깊이는 들어가 보지 않았으나 족히 허리 이상을 될 듯하다. 한두 군데 아무 생각 없이 발길을 옮기다 눈이 허벅지 깊이까지 빠지는 순간이면 덜컹 겁부터 난다. 


함 참 동안은 숲의 터널이나 눈 덮인 세상의 깊이를 알지 못할 정도로 짙은 하얀색에서 간간히 나뭇가지와 눈이 세상을 반반씩 나누어 보여준다. 어느 것 하나 어느 장소 하나 놓아버리기 아까운 모습인지라 카메라를 들고 아무 곳이나 사진을 찍어댄다. 그래도 다 예술이다. 세상에나 이런 모습을 한라산에서 또 보게 될 줄이야...

백색의 세상을 지나는 동안 수도 없이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 오르면서 사람들의 밀도가 높아지는 때문인지 속도가 훨씬 줄어든다. 예상보다 시간이 한참 더 걸릴 기세다. 이제부터는 앞사람만을 따라서 오르는 등산길이 되어버렸다. 그 완만한 속도를 못 참는 일부가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옆으로 일행을 앞질러 먼저 가고자 한다. 사실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그 역시 새치기에 해당된다는 것을 그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다들 빠른 속도로 한라산에 올라 편안하게 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겠지만 사람이 많아서 속도가 늦어지는 것을 마치 자신들만이 긴급한 일이 있는 듯 추월하려 하니 말이다.


추월하려는 사람도 몇 미터 앞에 가면 길이 막히고 내려오는 사람들과 부딪히며 속도가 늦어지고 곧 앞에서 말한 새치기 형태로 줄지어선 길을 늘어뜨린다. 이렇게 또 시간이 지체된다.

다들 빠른 속도로 한라산에 올라 편안하게 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겠지만 사람이 많아서 속도가 늦어지는 것을 마치 자신들만이 긴급한 일이 있는 듯 추월하려 하니 말이다

속밭 대피소와 진달래밭대피소까지 도착도 못했는데 이 정도 속도라면 큰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도 걱정이 되는지 내려오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속밭 대피소까지 얼마나 걸려요?"

"거의 다 왔어요."

거의 다온 것을 얼마나 더 들어야 진짜 다 온 걸까. 앞으로도 30분을 더 가야 그곳이다. 역산해보니 시간이 여유롭지는 않다. 다행히 속도가 조금씩 붙는다. 바로 앞에 사람들이 잔뜩 머물러 있다. 

거의 다온 것을 얼마나 더 들어야 진짜 다 온 걸까

한 시간 30분이면 넉넉할 듯한 속밭대피소까지 10시 30분에야 도착했다. 평소보다 한 시간 이상 걸린 셈이다. 조금 늦게 출발해서 8시 출발이라고 보면 그렇다. 아이젠을 찬 겨울산, 특히 눈이 잔뜩 쌓여있는 한라산은 평상시보다 등산이 훨씬 쉬운 편이다. 평시에는 돌 계단으로 되어있어 오르고 내리는 일이 너무나 어렵고 힘들어 도대체 재미가 없는 산이다. 지금은 경사져 있지만 아이젠에 걸리는 느낌이 있어 산행이 비교적 쉬운 편이다.


집에서 타 가지고 온 커피와 뜨거운 물, 그리고 과일 등으로 요기를 한 후 다시 출발이다. 진달래밭 대피소까지 12시 30분까지 도착해야 한다. 그래야 정상까지 오를 수 있다. 뭐 충분한 시간이지만 그래도 넉넉한 시간은 아니다. 애초에 시작한 시간을 예상하면 특히 그렇다. 


사람들을 따라 계속 오른다. 오르는 속도감이 나쁘지 않다. 눈은 점점 더 쌓여있고 날씨는 언제 눈이 내렸느냐는 듯 파란 하늘과 간간히 구름만 보여준다. 진달래밭과 백록담이 보이는 능선에 올라야 한라산에 왔다는 느낌이 날 듯하다. 순간순간 보이는 모든 풍경이 새롭지만 그 차이점을 기억하거나 느끼기에는 턱없이 표현이 동일하다. 새하얀 세계와 그 뒷면의 나무색 줄기만이 보인다. 그런 세상과 평지가 계속될 뿐이다.


아무 생각 없이 오르는데 어느덧 능선이 나타난다. 찬찬히 속도가 줄어드는 사이 넓은 평지와 멀리 백록담이 새하얀 눈에 휘감긴 채 모습을 드러낸다. 평소에 시커먼 화산암으로 보이던 봉우리와 완연히 다른 모습이다.

찬찬히 속도가 줄어드는 사이 넓은 평지와 멀리 백록담이 새하얀 눈에 휘감긴 채 모습을 드러낸다

오르는 동안 간간히 뒤돌아 봐도 이제부터는 구름과 아래 출발지의 모습과 시내 그리고 오름의 풍경도 보인다. 꽤나 올랐다.  앞의 일행과 달리 옆에서 앉았거나 장난치는 사람들이 보인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다양한 군상들이 한 군데 몰려있다. 진달래밭 대피소다. 아직 12시가 되지 않았다. 조금은 쉬면서 일 라운드를 마친다. 이제는 백록담만 가면 된다. 바라보기만 해도 아름답지만 아직 갈길이 멀다.

대피소가 만원이다. 쉴 장소가 없다. 화장실 앞에까지 가득 차있고 화장실을 가려는 사람도 줄이 줄지 않는다. 대피소 앞 건물은 눈보라에 문이 완전히 가려져 사람의 입출입이 불가능하다. 처음에는 일부러 눈을 그렇게 쌓아놓은 줄 알았다. 한참을 보고서야 눈보라로 눈이 쌓여있는 것이라는 걸 알아챘다. 눈쌓인 깊이가 거의 1m 가까이 되지만 그 앞은 족히 2m까지 쌓여 보인다.

이미 정상을 다녀온 듯 편안한 자세로 넓은 터를 차지하며 즐거움이 넘쳐다는 수다들로 주변이 시끄럽다

쉴 곳이 없어 어정쩡하게 짐을 풀고 간식 먹고 채비를 갖춘다. 12시 30분이 넘기 전에 이 선을 넘어야 하기에 많은 팀들이 서둘러 정상을 향해 질주한다. 일부 팀들은 이미 정상가는 것을 포기하고는 현재의 눈 쌓인 한라산을 만끽하며 보낸다. 몇몇은 물만 부으면 자동으로 끓는 밥을 가져와 단체로 끓이고 있다. 옆사람들을 부럽게 하려는가 부지런한 사람들인 듯하다. 이미 정상을 다녀온 듯 편안한 자세로 넓은 터를 차지하며 즐거움이 넘쳐다는 수다들로 주변이 시끄럽다. 


모든 상황들이 편안해 보이는 순간이지만 여기서 안주할 수 없다. 오늘이 아니면 볼 수 없는 풍경이다. 그렇게 심하게 눈보라가 칠 거라고 생각지 못했고 그다음 날 이렇게 좋은 하늘과 따뜻한 날씨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몇 번이나 오겠는가. 다시 질주할 시간이다.

줄을 서서 길을 나선다. 아래쪽도 멋지지만 위쪽의 나무들에 눈이 더 쌓여있는 느낌이다. 곳곳이 터널처럼 길을 만들어 마치 머나먼 나라의 높은 설산을 등산하는 등정팀이라도 된 듯 사람들은 줄을 서서 앞을 뒤따른다. 모두들 같은 마음일 것이다.

사진이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반영해주기를 기대하며 일행에게 사진 찍기를 요청한다. 이 마음까지 사진에 담을 방법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눈으로 만들어진 터널을 지날 때의 심정은 사람들을 묘한 감정에 휩싸이게 한다. 나는 어디에 있는 걸까. 그 감정을 주체 못 하고 아주머니 몇 명이눈에 넘어지고 뒹굴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사진이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반영해주기를 기대하며 일행에게 사진 찍기를 요청한다. 이 마음까지 사진에 담을 방법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줄을 서서 가지만 속도는 줄지 않는다. 한참을 나무숲만 보이는 눈길과 터널을 구불구불 지나다 능선에 올랐다. 아까보다는 멀지 않지만 저 멀리 백록담이 보인다. 순간 모두의 시선과 발걸음이 멈추었다. 꼭대기가 선명하게 보인다. 목표지가 명확해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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