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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구리 Apr 25. 2016

제주... 비 내리는 날의 기시감

시간을 두 번 사는 느낌의 제주 거리에서

제주의 비는 내리기보다는 옆으로 날린다는 말이 어울린다. 우산은 왠지 나와 비를 차단하고픈 사람들의 의지를 나타내는 상징일 뿐 실제 효과는 별로 없다. 있으나마나한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 빗속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일이 귀찮다는 생각을 하다 조금은 낭만적인 면도 있으려니 하며 생각을 고쳐먹기로 했다. 괜스레 하늘을 쳐다본다. 높지 않은 빌딩들이 두서없이 늘어서 있다.      


순간 돌아갈 곳을 잃어버린 치매 노인의 황당함이 이런 느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낯선 간자체 한자어를 간판과 메뉴로 가득 채워놓은 채 관광객들을 기다리는 식당 종업원들이 금적색으로 온통 치장한 가게 안 난로가에 앉아있다. 제주의 거리에서 종종 보게 되는 장면이다. 아직은 손님이 들어갈 시간이 아니어서 인지 한가함이 느껴진다. 이미 전국적으로 익숙해져 버린 아웃도어 매장의 전문 등산복 쇼윈도 속에 유난히 눈길을 끈다.      


여기는 어디인 걸까. 혹시 내가 너무도 낯선 곳에 와있는 것은 아닐까. 순간 돌아갈 곳을 잃어버린 치매 노인의 황당함이 이런 느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불쑥 눈앞을 가로막은 버스에 습관처럼 오르며 교통카드를 들이댔다. 두리번거리며 빈자리를 찾아 앉은 후에야 낯섦의 실체가 장소만이 아니란 걸 알아버렸다.      


여전히 서울 중심의 음악프로그램과 DJ들에 익숙한 나 자신을 파고드는 다소 생경하면서도 올드한 음악들이 나온다. 4시가 넘어가는 시간에는 전국 어디든 마찬가지 일터이다. 하루를 느긋이 관조하거나 해너미를 생각하면서 또 다른 하루인 밤 시간을 그려봐도 될 일이지만 그에 앞서 나의 존재 시간은 이미 20-30년을 훌쩍 뛰어넘어 과거의 한 모퉁이에 있음을 알아차렸다.      


제주는 시간적으로 낯설다. 그 낯섦이 본질적으로 낯설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히려 익숙함이 담겨 있다. 내가 지낸 십수 년 전 혹은 그 이전의 시간을 다시 살아가는 느낌이다. 그 순간, 덜컹대는 버스와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하차하는 할머니의 모습이 밉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벌써 과거를 먹고사는 나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습관처럼 시간을 리와인드(rewind)하는 버릇이 생겼다. 앞으로 달려가도 모자랄 판인데 비 내리는 날의 감성은 ‘전진’보다는 ‘복기’라는 단어에 더 집중하게 된다. 어느새 이 애잔함이 금세 익숙해졌다.     


기시감(데자뷔)이 현실이 되었다. 시간을 두 번 사는 느낌이다. 서울서 살았던 90년대의 잔잔함이 다시 제주에서 반복되고 있다. 나도 모르게 바뀌어 나가던 도시의 변신을 아무 느낌 없이 당연히 받아들이던 시절을 살았다. 그리고 어느새 서울은 나에게 이방인이라는 소외 효과를 주는 곳으로 변해 있었다.     


이 건물들이 어떻게 바뀌어 나갈지 사람들이 얼마나 더 각팍해질지 혹은 도심의 차량이 얼마나 이 도시를 숨 막히게 할지... 서로에게  표출하는 분노가 일상화되어 탈출을 꿈꾸는 자들이 한 가득한 세상에 덩그러니 내팽개친 젊은이들이 밤길을 방황하게 될지 익히 알 것 같아 지금의 이 순간들이 더욱 그립고 다정하게 느껴진다.


벌써 과거를 먹고사는 나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습관처럼 시간을 리와인드(rewind)하는 버릇이 생겼다    


세상을 한 번밖에 살지 못한다는 것은 다시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비슷한 시간을 2번 산다는 경험을 하는 기쁨과 함께 묘한 전지적 작가 시점의 짜릿함은 놓쳐버리기 쉽지 않다.      


먼저 살아버린 내 청춘의 열정을 다시 되찾지는 못하겠지만 그 시간을 위해 건배를 할 수는 있다.      


버스를 타면서 아직 도시화의 더욱 깊은 수렁을 향해 미끄러지듯 듣지 않는 브레이크를 아랑곳 않고 속도를 내는 제주의 도심이 눈에 들어온다. 그 도시에서 데자뷔를 보는 대신 새로운 환희를 맛보고 싶다.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을 갈 수 있는 용기가 이곳에도 적용되어 내가 느낀 기시감이 허황된 꿈이었기를 기대한다.      


버스가 정류장에 멎었다. 가로수 밑의 보도블록 사이에 가득한 잡풀들이 정리 덜된 도시의 빈 공간 이상으로 정겨움이 느껴진다. 모르고 밟으며 미안해지는 순간이다.  아직도 비는 내리지 않는다. 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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