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너구리 May 03. 2016

익숙한 곳 낯설게 가기_제주공항 가는 길

금요일 오후가 저녁으로 내달음을 치고 있다. 


벌써 2달이 넘었다. 서울 집을 다녀온지. 지난달 아내가 제주에서 2주간 머물다 간 때문인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시간이 휘리릭하고 혼자서 저만치 달아나 버렸다.


2달여간 발걸음을 끊고 보니 갑자기 내 존재감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나는 아직 제주에 정착하지도 서울에 계속 있지도 않은 상태다. 갑자기 서울, 아니 마포의 집과 성미산 마을 혹은 간간히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생각난다. 그 때문인지 금요일 오후가 가까워지자 서울행이 기다려진다. 쉽지 않은 경우다. 습관처럼 다니는 길이라 멀리 떨어져 있다는 느낌도 적은데 오늘따라 멀리 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더 든다. 여간해서는 잘 있지 않은 경우다.

공항가는 길 초입이다.

퇴근 후 바로 집으로 방향을 잡았다. 비행기 시간은 8시 50분. 한참 남아있다. 공항에 일찍 가서 기다리는 것보다 저녁을 먹고 느지막이 가도 무난할 듯 싶다. 내 숙소에서 공항까지는 20분이면 충분하다. 버스정류장까지 10분, 버스 타고 2 정거장이니 서두를 일이 없다.


집에 도착해서 저녁을 먹으려던 차에 함께 지내는 고교 후배의 누님 식구들이 관광을 마치고 돌아왔다. 아무래도 좁은 집에 내가 문 닫고 있는 것은 예의가 아닌 듯 싶다. 조금 일찍 자리를 비켜줄 심산으로 집을 나섰다. 문제는 비행기 시간까지 1시가 40분 이상 남았다는 점이다. 공항에 가서 책이라도 읽어야겠다.


해 질 녘의 제주 날씨가 가슴에 들어온다. 오늘 따라 몸에 감기는 봄바람에 해가 뉘엿뉘엿 져가는 모습이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준다. 


'시간도 많이 남았는데 공항까지 걸어가 보자.'


공항에서 신제주까지 들고나는 길이야 일직선인데다 아주 가까운 편이어서 승용차나 버스를 타도 금방인데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고 자연스러운 장소가 됐다. 수십 번을 왔다 갔다 했으니 말이다. 


공항까지 걸어보면 어떨까 싶었던 적이 가끔은 있었다. 그 길을 오늘은 걸어보기로 했다. 우연한 기회에 얻은 새로운 경험이 될 듯 싶다. 익숙한 길을 낯설게 걸어보기로 한 것이다.

신제주 로터리를 지난 공항 쪽 길은 걸어서 갈 일이 거의 없다. 걸으면 맞이하는 길은 풍경이 어떠하든 위치에 따라 낯섦이 주는 신선함이 있다. 대부분의 버스는 공항까지 직선 길을 내달아 달려가거나 구제주 쪽으로 우회적 해서 이 길을 재빨리 지나기 마련이다. 특히 이정표가 될만한 건물도 없거니와 공항에 가까워 오면 아직까지 넓은 공간이 밭으로 남아있고 마을이 하나 자리 잡았다. 이정표 상에는 대호 마을이다. 공항 바로 옆은 어떤 경우에도 개발되기가 쉽지는 않다. 소음이라는 절대적인 요인이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도로의 차들이 수도 없이 많이 다니지만 그 외의 길거리는 한적함과 함께 여유로움을 듬뿍 뿜어낸다.


공항까지 걸어보면 어떨까 싶었던 적이 가끔은 있었다. 그 길을 오늘은 걸어보기로 했다


익숙한 길을 이렇게 낯선 풍경으로 바라보는 것은 매우 추천할 만한 일이다. 사람들이 공항 쪽으로 터덜거리며 걷는 나를 힐긋힐긋 보는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퇴근시간에 혼자서 공항으로 천천히 여유 부리며 걷고 있는 모습이 약간은 이상할 것이다. 언듯 봐서는 관광객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사무적인 직장인의 포스도 아닌 것으로 볼 것이다.

석가탄신일을 앞두고 불탑이 색을 바꿔가며 봉축행사를 기다리고 있다.

시간은 아직도 여유롭다. 버스나 차를 타면 10분도 안 걸리는 거리가 30분 이상을 걸었는데도 이제야 공항터미널이 아래쪽으로 굽어 보인다. 여기서부터는 본격적인 내리막길이다. 멀리 차량의 불빛과 공항의 저녁 불빛이 서서히 밝아 오르기 시작한다. 조금 전까지 노을 진 제주바다의 해 질 녘 풍경이 아스라함과 함께 서늘함을 제공해주면서 마냥 감상에 젖었는데 이제는 그 감성을 저녁 불빛이 대체하고 있다.


길 아래로 불빛이 환환 공항터미널이 보인다. 잠시후 나는 저 곳에서 비행기를 타고 서울을 가게 되어 있다.

내리막으로 천천히 걷는 길 한쪽에 횡단보도를 찾을 수가 없다. 건너온 길을 다시 건너 횡단보도를 두 번이나 더 건너야 한다. 시간 여유가 있으니 망정이니 바쁜 시간이었다면 굉장히 짜증스러울 수 있는 상황이다.


공항을 향해 내달음 질 치는 차들의 뒤꽁무니와 공항에서 라이트를 키고 올라오는 차들을 교차로 바라보며 한쪽 옆으로 난 숲길로 들어섰다. 이곳은 꽤나 외져있는 숲 속의 길이다. 사람들이 없는데다 가로등 불빛도 없어 음산한 느낌마저 풍긴다. 그래도 나만이 느낄 수 있는 여유라며 걷고 있다. 숲 속으로 난 길을 걷는다는 것은 도심에서 보면 여유의 한 모습인 셈이다.


터미널에 들어가면 핫플레이스 제주를 실감케 하는 인파에 치여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게 된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한쌍의 남녀가 나를  추월하며 공항을 향해 걷고 있다. 폼이 여행객인데 이 길을 잘 아는 사람들인 듯 싶다. 나 같은 사람들이 또 있어 다행이다. 어느새 공항터미널이 코앞이다. 주차장에 널려있는 수많은 차량과 이를 밝히는 불빛이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을 맞이한다. 


공항 대합실은 역시 물샐틈없이 막 도착한 인파와 비행기를 타려는 인파가 뒤섞여 정신이 없다. 전형적인 제주공항의 모습이다. 비로소 멀리 다른 장소에 다녀온 듯한 도보여행을 마치고 다시 제주에 도착한 느낌이다.


제주에 오가는 사람들에게 공항에서 일정기간 걸어서 제주의 인상을 느끼는 호사를 누려보라고 제안해본다. 새로운 낯섦이 주는 여행의 짧은 추억을 예상치 못한 곳에서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터미널에 들어가면 핫플레이스 제주를 실감케 하는 인파에 치여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게 된다. 그 전까지의 기억은 갑자기 만들어진 시간이 준 선물이었음을 깨닫게 된다는... 시간은 언제나 내 편이다. 내 스스로 시간 편이 되지 못할 뿐이다.

공항에 도착하니 몇몇 사람들이 다니는 모습이다. 차량을 근처에 세워놓고 어딘가에 다녀온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공항은 여행과 동일어다. 셀레임과 그리움 그리고 안타까움이 늘 교차한다. 그 교차가 북적이는 사람들 속에서 제 갈길을 찾아 뿔뿔히 흩어지는 터미널.  한번쯤 되돌아 볼 인생의 정류장 역할도 기대할 수 있으리라.


매거진의 이전글 제주... 비 내리는 날의 기시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