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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구리 May 09. 2016

비 오는 날 다시 찾는 서귀포

비 내리는 날이 많아졌다.

제주 날씨가 흐린 경우야 흔하지만 4월 고사리 장마가 지나면 맑게 개이는 것을 기대했는데 현실은 그와 반대다.


수시로 비가 내린다. 모두들 4월, 5월 날씨가 이상하다고 아우성이다.  하루 이틀 맑은 날이 반짝 하늘을 보여주고는 여지없이 흐린 날의 연속이다. 그러다 한 번씩 비가 내린다. 비가 오지 않으면 바람으로 존재감을 과시한다. 바람은 다시 '여기는 제주'라고 강조한다.

평일 오전 5.16 도로를 넘어 서귀포로 가는 일은 흔치 않다. 더구나 비 오는 날 한라산을 넘는 일은 업무든 아니든 묘한 기대감을 함께 가져다준다. 


오전 업무에 매달리다 창밖을 보니 시간이 저만치 가있다. 언제나처럼 재빨리 지나가는 오전을 놓치지 않으려고 부지런히 서두른다. 성판악을 지나는 길목 초봄 잔설이 남은 한라산을 바라보며 넘던 길이 생각난다. 행여나 녹지 않은 눈이 남아있기를 바라며 한라산 정상과 오름의 봉우리들을 해바라기처럼 쳐다보며 구불구불한 길을 설레는 마음으로 타고 넘었다. 이제 그 길이 초록과 신록의 푸른 길을 내고 있다.


그 푸르름을 더 재촉하려나 지금은 온통 바람과 자동차 소리만 들린다. 아스팔트에 뒤덮인 수막을 가르며 달리는 고무타이어의 마찰음이 '쏴악' 하고 끊이지 않는다. 하늘은 안개인지 구름인지 비인지 모르게 뿌연 앞길을 보여주지만 탁하다는 느낌보다는 시원하다는 감정을 숨길 수 없다.


왜 나는 미끄러짐이 위험한 굽이치는 빗길이 설레는 것일까. 


뒤따라오는 차가 있다는 사실이 불편하다. 이 한가로운 오전의 기분을 오랫동안 천천히 몸으로 담으며 넘고 싶은 길을 뒤에서 속도를 내라며 바짝 붙어 재촉한다.  그 재촉감이 싫었던지 나도 모르게 차의 속도가 조금씩 높아진다. 


'아... 이 좋은 풍경을 그냥 놓치고 가버리다니'


재촉하는 차량에 놀라 도망치는 토끼마냥 앞길을 달리면서도 이 풍경을 놓치기는 사뭇 싫은가 보다. 혹시 내가 젊은 청년이거나 산을 넘으면 만날 사람들의 이야기라도 있는 듯 머릿속 상상은 현실에서 자꾸 멀어져 간다. 

한적한 지방도로의 굽이침에도 성판악은 차들의 정거장이 맞다. 바람이면 바람, 눈이면 눈, 비면 비 어떤 상황에서도 극한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한라산의 입구라는 것을 아는 듯 성판악은 성황이다. 바람에 날리는 빗줄기가 한라산의 자존심을 일깨워준다.  


'이 정도는 감수할 수 있지...'

이 정도의 기분을 느끼고 싶거든 어느 정도 옷이 젖는 것은 감수하라는 신호다.


우산을 받쳐 들었지만 별로 효과가 없다. 그래도 직접 얼굴에 맞닿는 비바람을 막을 수는 있으니 됐다. 


멍하니 길거리에 섰다가 지나는 차 몇 대를 보내고는 다시 차로 되돌아 온다. 오래 서있기에는  비가 굵다. 


머뭇거리는 사이 약속시간에 맞추기 어려운 상황이 되어간다. 이제 내 길은 내려가는 것만 남았다. 여기서부터는 서귀포다. 오늘은 위미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앙상맞던 숲터널이 풍만한 숙녀로 변해간다. 가지만 무성하던 겨울의 스산함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양한 추임새를 보인다. 취기마저 오르는 분위기라면 맞으려나... 이 숲을 지나면 괜히 힐링이 되면서도 몸이 고양되는 특이한 기분이다.


여기서는 뒤에 아무리 차가 붙어도 양보할 수 없다. 속도를 40 이하로 줄였다. 뒤쪽 차들도 재촉함이 없다. 지들도 생각이 있으면 이 빗속의 시원함과 한가스러움을 놓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충분히 느끼는 사이 반대쪽 차들도 속도가 늦다. 계속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엑셀레이터에 힘을 준다.


내려가는 길 솨악하는 바퀴소리가 끊이지 않는 사이 내 옆을 쌩하며 지나는 차에서 그동안 참았던 인내심이 무너지는 소리를 듣는다. 그래도 잘 참아줘서 고맙다.


비가 인사하는 섬은 어느덧 흥겨운 춤사위마냥 사람을 들뜨게 하는 재주를 지녔다. 더구나 비가 오면 생명이 융성하는 소리라도 들리듯 온 산자락에서 하얀 연기를 품어낸다. 비가 내리는 곳은 결국 마음인 셈이다. 그 마음이 서귀포에 오면 살며시 열리는 것을 느낀다.


오늘은 돈내코까지만 와도 마음이 따스해진다. 더 이상은 그만이다. 사람이 기다리는 장소에 왔다. 모드 전환을 하며 길을 멈췄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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