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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구리 Oct 29. 2017

저승의 반려자_꼭두

누구와 함께 저 세상으로 갈 것인가._본태박물관의 꼭두를 바라보며

누구와 함께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갈 것인가.

이 화두는 동양과 서양이 많이 다르지만 누군가는 강을 건너고 그 길을 인도하는 존재가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선상에 있다. 그 누구는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존재에 의해 이승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용기 자체를 없애는 역할을 맡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민간신앙에 보면 죽음 이후 처음 맞닥뜨리는 존재로 저승사자가 나온다. 망자를 염라대왕 앞으로 데리고 가는 역할을 한다. 그 이미지는 공교롭게도 전설의 고향에 의해 검은색 도포를 입고 창백한 모습을 하는 존재로 묘사됐다. 그러나 굿에서 묘사된 저승사자는 오히려 군졸에 가깝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 모습이 어떻듯 창백하면서도 인정사정없는 단호함은 죽음의 상황이 불가역적이라는 사실을 묘사하기 위한 불가피한 설정이었으리라 생각한다. 

동양과 서양이 많이 다르지만 누군가는 강을 건너고 그 길을 인도하는 존재가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선상에 있다.

성경도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기준점을 요단강으로 표시하고 있다. 물론 갈릴리호를 거쳐 사해로 흐르는 요르단강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지만 성경의 요단강은 죄를 씻고 천국으로 건너가는 경계로 쓰이고 있다.


어찌 됐든 한번 건너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이라는 설정은 일반적이다. 동양이나 서양 할 것 없이 무언가의 경계를 건너 이승에서 저승으로 넘어간다는 상상에서는 동일헤 보인다.


우리의 장례문화에서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동행이 존재하는데 그것이 꼭두다.  꼭두각시라는 말로 인형 정도의 의미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본태박물관에서 우연히 만난 꼭두는 어쩌면 새로운 세상에 대한 또 다른 세계라는 인상을 남겼다.


꼭두는 그런 면에서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곳을 건너가는 망자를 향한 배려심을 느끼게 해 준다. 사람의 외로움은 살면서 본질적으로 느끼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일이 죽어서도 계속된다는 두려움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혹은 죽는 순간까지 이승에서 얻은 성과나 못다 이룬 성과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기 어려운 것임임을 보여주기도 한다.


꼭두박물관의 꼭두에 대한 설명이다. 꼭두랑 상여의 부속물로 인물상, 혹은 동물과 식물의 형상이며 나무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목우(목우)라고도 한다. 현재 남아있는 꼭두는 주로 조선 후기와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18세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꼭두는 이승과 저승, 현실과 꿈 사이를 오고 가는 존재로 천사 나신 선처럼 일상과 비일상의 세계를 넘나들면서 괴로워하거나 슬픔에 잠긴 이를 위로하고 지켜주는 일을 한다


일견 너무 오버하여서 설명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은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승과 저승을 이야기하면서 그리스 신화의 카론과 스틱스 강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저승의 뱃사공인 카론은 망자의 영혼을 태우고 이승의 마지막 종착지인 스틱스 강가를 떠나 저승으로 향한다. 흔히 증오의 강이라고 불리는 스틱스는 슬픔의 강, 탄식의 강, 불의 강 그리고 마지막으로 망각의 강인 레테의 강을 지류로 두고 있다. 이 강을 건너 망자는 하데스가 지배하는 저승에 도착한다.

사람의 외로움은 살면서 본질적으로 느끼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일이 죽어서도 계속된다는 두려움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공교롭게도 망자들은 저승으로 가는 뱃삯을 내야 한다. 그리스에서는 일일 노동자의 하루 품삯인 1 오볼로스를 카론에게 주어야 배를 태워줬다고 한다. 장례에서 이 뱃삯을 챙겨주는 일은 그래서 매우 중요한 의식이었다고 하니 갑자기 중국 영화에서 흔히 보던 중국인들의 가짜 돈을 태우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것 역시 망자가 저승에서 쓰는 노자돈을 주기 위해 태우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었다.


베르길리우스였던 거 같은데 로마의 건국 이야기를 적은 서사시 '아이네이스'에 나왔던 카론에 대한 묘사를 찾아보았다. 다행히 바로 나온다. 그의 묘사에 따르면 흔히 만화나 그림과 조금은 다른 듯하지만 그래도 상상이 가능해진다.


“그곳에는 (···) 무섭고 누추한 사공인 카론이 지키고 서 있는데, 그의 턱에는 손질하지 않은 백발이 텁수룩하고, 눈은 불을 켜고 노려보고 있다. 그의 어깨에서는 때 묻은 외투가 매듭으로 묶인 채 아래로 처져 있다. 그는 손수 상앗대로 배를 밀고 돛들을 손질하며 거무스름한 나룻배로 사자(死者)들을 건네준다. 그는 이미 늙었지만 신의 노년은 건장하고 푸른 법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카론 


경계를 넘어 다른 세계로 가는 설정이 이채롭지만 마찬가지다. 결국 돌아올 수 없는 곳을 가는 것은 같으니 말이다. 이승에서 저승으로 이끄는 이들의 역할은 망자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역할일 것이다.

상여 앞에서 저승으로 길을 인도하는 저승사자는 무섭고 누구도 앞을 가로막을 수 없는 형상이다. 대신 상여에 꽂힌 다양한  꼭두는 오히려 소탈하고 재미있는 표정으로 무척 흥미를 끈다.


망자를 윽박지르거나 뱃삯을 받는 것도 아니고 무서운 얼굴로 망자를 얼어붙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꼭두는 망자가 가는 길에 동반자로 함께 가면서 편리함과 존중심을 불어넣고 있다. 인물들도 다양하고 동물들도 다양하다. 망자를 안내하거나 수호하고 혹은 시종으로서의 역할과 함께 광대의 역할에 이르기까지 살면서 나름 성공한 사람들이 가졌을 법한 다양한 혜택을 죽은 자에게 부여하려 하고 있다. 죽은 자의 상태가 현세에 계속되기만 한다면 그 사람은 말 그대로 성공한 혹은 권력자여야만 했으리라. 특히 예전의 세상에서 사람들이 이뤘으면 하는 다양한 목표를 제시해준다.


이뿐이 아니다. 동물들도 함께 하고 있다. 용, 봉황, 거북이가 있는가 하면 각종 나무와 연꽃도 보인다. 언뜻 보아서는 봉황이 닭처럼 보이기는 하고 용이 뱀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그 의미는 전달이 된 듯하다. 암튼 죽은 자를 저승으로 보내는 도구로서 상여는 이미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지만 의미에서만은 매우 풍부한 메시지를 전달해 주는 것 같다. 보는 내내 재미있다. 

멋진 게 장식되어있는 상여가 상을 치른 후 타 태워 없어져 버렸다는 사실은 매우 슬프면서도 일견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상여에는 온갖 정성이 담겨있다. 꽃상여도 있고 수많은 꼭두도 망자와 함께 세상을 떠난다.  멋진 게 장식되어있는 상여가 상을 치른 후 타 태워 없어져 버렸다는 사실은 매우 슬프면서도 일견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그래서인가 어느 마을에나 공동으로 사용했다는 상여가 남아있는 곳이 거의 없단다.


본태에서 본 상여는 개인적으로는 어릴 적 외할아버지의 상을 치르면서 아무 생각 없이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던 정통 상례문화의 한 기억을 생각하게 한다. 그때는 참으로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그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또 어머니도 멀리 가셨으니 세월의 무상함을 보고 느껴야 할 것이리라.


그 무엇을 보아도 실생활에 필요한 소탈함의 진 면모를 보는 듯해 흐뭇하였던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꼭두의 매력은 소탈함이라 할 수 있다. 정교한 예술가들의 인형이 아니라 마을 주민들이 필요에 의해 급하게 만들어 색을 칠해놓은 나무인형이다. 그래서인지 모양도 단순하고 표정도 단순하거나 익살스럽고 혹은 과장된 것들도 보인다. 그 무엇을 보아도 실생활에 필요한 소탈함의 진 면모를 보는 듯해 흐뭇했던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다른 하나 시간이 되면 나도 멋대로 나무인형을 만들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언젠가는 해 봐야 쓰겠다. 그리고 내 상여 나갈 때 써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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