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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구리 Oct 29. 2017

쇠소깍을 향해_올레 5코스의 매력

2014년 10월 26일

어제저녁의 자제가 효력을 발휘했다. 23km가 넘는 장거리를 걸어 발바닥이 부르텄지만 그래도 황돔을 얻어먹은 기쁨과 자제한 술자리 덕에 일찍 잠들 수 있었고 일찍 일어났다. 오늘은 빠른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게스트하우스를 나서니 8시 30분이다. 제주에 와서 가장 일찍 길거리로 나섰다. 이미 해는 똥창을 두드리며 저 높이 솟아오르고 아침의 상쾌함을 따스함으로 바꾸려 하고 있다.

항구에는 미련과 그리움이 있어야 제맛이다

오늘 갈길은 어제의 3분의 2밖에 안 되는 거리다. 14.5km쯤 되는 것 같다. 아마도 1시 전에는 걸음걸이를 마칠 수 있을 것 같다. 어제 챙겨놓은 컵라면을 먹고는 일찌감치 짐을 꾸렸다. 주인장은 어제저녁의 과음으로 여태 잠들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인기척이 없다. 문은 활짝 열려있지만 아무런 사람의 흔적이 없다. 남아있던 생수병에 물을 가득 담았다. 아침을 재촉하는 발걸음은 기분이 좋다.



나서니 바로 항구다. 어제저녁에 보던 느낌과는 다르다. 역시 저녁과 아침은 사람에게 전해주는 의미도 다르다. 간단히 항구를 돌아본다. 아,,, 남원항이 괜찮은 느낌을 가지고 있다. 아주 아담하지도 않지만 나름 재미있는 구석도 있다. 정겨움이 느껴진다. 항구에는 미련과 그리움이 있어야 제맛이다.


항구를 뒤로하고 이정표를 따라나섰다. 항구를 돌아 길을 나서니 곧 너른 바다가 나온다. 잔잔한 바다가 어제에 이어 계속되더니 멀리 건물도 보이고 구비구비 해안길이 이어지다 약간의 낯선 길이 나왔다. 인도가 없어졌다. 차도가 있고 인도는 시멘트로 쌓아놓은 담장 위로 이어진다. 애초에 사람이 걸어 다니게 만들어놓은 길이 아닌가 보다. 올레길을 위해 억지로 걷는 길로 허가된 느낌이다. 그래도 사람이 다니라고 넓은 시멘트길이 펼쳐져 있으니 다행이다. 그 덕에 위험하지는 않지만 담장 위를 걷는 분위기를 자아내게 해준다.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차가 가끔은 두려움에 떨게 하지만 그래도 참을만하다.

숲길로 들어서니 바다와 숲길이 한데 만나 아주 호젓한 느낌을 준다. 간혹 산책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큰엉이라는 장소다. 커다란 동굴이라는 의미란다.  그들의 숙소는 이곳저곳의 펜션이나 리조트일 게다. 그들은 아침 산책을 하는 중일 게고... 내가 그들과 달리 길을 나섰다는 게 마음이 편하다. 돌아가 짐을 싸야 하는 게 아니라 이미 길을 나섰기에 더 편안한 마음이라면 누가 이해를 하려나.


암튼 항구를 뒤로하고 곧바로 이어지 바닷길과 다시 언덕을 넘어 숲길이 나타나지 지루할 새로 없이 맘이 편해진다. 왠지 이곳의 길들이 마음을 안정되게 해준다. 뒤로 언뜻언뜻 보이는 바다의 모습도 정겹다.

돌아가 짐을 싸야 하는 게 아니라 이미 길을 나섰기에 더 편안한 마음이라면 누가 이해를 하려나

오늘의 일정은 길지도 않은 데다 벌써부터 지루함보다는 산뜻함으로 나를 반겨주니 별로 어려움이 없어 보인다. 중간에 만나는 동네 어르신들이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게 아침부터 뭐하러 저리 걸어 다니나 싶은 가보다. 아니라면... 그건 내 알바는 아닌 듯싶고... 


순간, 몇 명의 일행이 숲길 앞에서 서성이며 사진을 찍고 있다. 뭐지. 아무런 특색이 없는 숲길에 무엇인가 설명이 붙은 이정표가 보인다. 뭔 의미일까. 먼저 앞을 지날까 하다. 무례하다 싶어 기다리기로 했다. 그들의 행동이 끝나고 구부러진 숲길 너머로 사라진 후에 나는 이정표 앞에 섰다. 


KOREA PENISULA 한반도? 뭐지 싶어 숲을 바라보니 나뭇가지가 만들어놓은 모양새가 한반도 모양을 하고 있었다. 이것 때문에 이정표가 있고 사진을 찍고 있었군.

 "나라고 이 길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지." 

약간의 시간을 가지고 사진을 찍기로 했다. 수많은 관광안내도에 나왔었을 상황이지만 지금 이 순간은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풍경이 아니겠는가. 이후 이 사진을 보고 있으면 그곳을 다녀온 사람들에게는 동일한 추억이나 기억이 되갰지만...


바다의 잔잔함과 너른 느낌을 한편에 두고 절벽과도 같은 숲길을 계속 걷고 있노라니 거리감도 잊게 되고 시간의 느낌은 더 적어진다. 길은 자꾸 줄어든다. 올레길을 걸어보면서 길이 줄어들 때 성취감보다 아쉬움이 느껴지기는 처음이다. 아기자기함이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는 길이다. 이윽과 바다의 잔잔함과 바라보는 즐거움이 성에 안찰 정도의 시간과 거리를 지나자 불현듯 돌담을 내 앞에 내보냈다. 이번에는 이것을 지나서 제주를 느껴보라는 의미처럼...


돌담은 제주만의 강렬한 특징이지만 참 묘한 매력을 주는 요소이다. 그 흔하디 흔한 이 현무암들이 예적에는 얼마나 아쉽고 안타까웠으랴. 물이 고이게도 하지 않아 논농사도 할 수 없었을 것이고 밭에도 작물이 제대로 자라려면 수많은 돈들을 캐내야 했을 테지 우렁각시가 필요해도 많이 필요하지 않았겠는가. 생각해보면 자연은 야속하면서도 무시할 수 없기에 문화가 자라고 문명이 커지는 게 아니겠는가.


돌담과 숲을 지나자 다시 해안선이 가깝게 다가섰다. 누군가 흩뿌려놓은 듯한 바위와 돌들이 해변에 마구 널브러져 있다. 그 사이를 새들이 앉아서 열심히 먹이를 찾아 헤매고 있다. 나름 바다새를 보니 이곳에 용천수가 솟아오르는 지역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나 다를까 새들이 이 주변을 헤매고 있다. 먹이가 많은 곳은 분명해 보인다.

생각해보면 자연은 야속하면서도 무시할 수 없기에 문화가 자라고 문명이 커지는 게 아니겠는가


아쉬운 해안선을 뒤로하고 민가들이 있는 길로 들어섰다.  동백나무 군락지란다. 음. 동백나무라면 잎이 두껍고 빤질거리는 나무들인데 군락지라는 말을 쓰는 걸 보니 꽤 많이 모여있는 모양이다. 마을을 지나다 보니 4명의 아줌마들이 올레길을 걷는 모습이 눈앞에 잡힌다. 어제 아침에 지나며 인사를 나누었던 사람들이다. 또 앞을 거슬러 가며 인사를 하려니 괜히 귀찮아진다. 저들의 뒤를 천천히 따라가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래서인지 걸음걸이가 늦어진다. 아줌마중 한 명이 풍경사진을 여기저기서 찍으며 속도를 늦춘다. 나도 속도를 늦춘다. 거리가 따라 잡힐만하면 아무 데나 앉아서 쉰다. 그 덕에 어제 아픈 발바닥을 쉬게 할 수 있다.


한참 동안이지만 아기자기한 풍경과 변화 덕에 발바닥이 아프다는 느낌을 그다지 느끼지 않았도 됐다. 주변 환경이 주는 자극이 강하니 그다지 걱정할 수준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아픈 건 아픈 거도 내가 고통을 덜 감지해도 발바닥은 커다란 자극 아래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상황은 집에 가서 확인해 볼 일이다.


다행히 앞서가던 아주머니 일행이 마을에 있는 정자에 짐을 풀고 쉬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그들을 앞서가며 아무도 없는 올레길을 걷기 시작했다. 어느덧 내 앞에 일행이 나타나 시간을 지체하게 하면 그다지 맘이 편치 않아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어이없는 아집과 판단이다. 


불현듯 항구가 있는 마을이 나타났다. 마을이 나름 번화가스러운 느낌이 들도록 차가 많다. 왜 이리 차가 많지. 곧 카페들도 곳곳에서 눈에 띈다. 아. 여기가 외지인들이 들어와서 좋은 풍경을 감상하도록 카페가 많이 오픈한 듯하다. 위미리다. 바닷가 한적한 곳에 차들이 가득 차 있다. 나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졌다.


빨리 지나고 싶다. 이곳에 앉아 차를 마시고도 싶지만 지금은 차보다는 풍경이나 나의 걸음걸이 안에서 느끼는 고요함이 자동차의 번잡스러움보다 더 의미가 있게 느껴진다.

그런 내 마음과 상관없이 항구에 다 달았다. 특이하게 생긴 바위 주변을 올레길이 돌아보도록 재촉한다.  멋진 바위가 있는 곳을 한 바퀴 돌아 다시 길을 나서려니 정자가 덜렁 나를 기다린다. 내가 기다리던 쉼터다. '아침에 길을 나선 지 두 시간 이제야 편하게 쉬면서 물도 마시고 할 수 있겠군'.


살면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들을 명상이라는 이름으로 잊기도 하고 억지로 선택적 치매를 택하기도 하지만 지금은 그 어떤 부자연스러움도 없이 자신을 내려놓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정자에 앉았다가 벌렁 누웠다. 오전에 이런 따스한 햇볕과 좋은 날씨를 안고 벌렁 누울 수 있는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되겠는가. 지나가는 차들은 상관없다. 누워 하늘을 보고 피곤을 풀면 된다. 나 자신을 느껴보자. 그런 시간이 10분이어도 좋고 30분이어도 좋다. 어느 풍경도 지금의 순간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 그늘도 만들어주는 정자에서 오랜만에 신발을 벗어 주물러 주기도 하고 이곳저곳을 쳐다보며 나를 느낀다. 나는 어디에 와있는 거지. 사실 그걸 아는 게 중요하지는 않지만 참 소중한 순간이다.


물과 간식을 먹으며 하늘을 우러른다. 제주에 있으면서 무엇을 할지는 몰라도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하자. 살면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들을 명상이라는 이름으로 잊기도 하고 억지로 선택적 치매를 택하기도 하지만 지금은 그 어떤 부자연스러움도 없이 자신을 내려놓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웃음이 나오며 편안한 표정을 하고 있다. 이게 여행의 의미이자 재미이려나. 오랜만에 느끼는 여행 그 자체의 재미에 나도 모르게 무장해제된 기분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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