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남도여행의 주 목적지인 달마고도길을 걷는 순간이 돌아왔다. 숙소에서 나와 미황사를 향한다. 어제 만난 대흥사와 달리 비탈진 산중에 층층이 산사의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대흥사와는 느낌이 확연히 다른 절이다. 크기는 결코 작은 절이 아니지만 언덕을 올라가며 사찰들이 늘어서 있으니 언듯 보기에는 아담한 절로 보았는데 한걸음 한걸음 걸음을 옮길 때마다 결코 예사롭지 않음을 알게 된다. 대단한 구력이 느껴지는 곳. 그 일주문을 지나자마자 양옆으로 난 길이 보인다. 달마고도길이라는 표지가 양옆으로 나있다. 어느 쪽을 향할 것인가. 고민하다 역시 원래대로 1코스로 발길을 돌리기로 했다. 달마고도길은 총 4코스로 이루어진 길. 거리만 해도 18km가 다 되니 산길 18km가 결코 짧은 길이 아닐진대 오늘 안에 다 걸을 수 있을는지.
그러나 금강산도 식후경이라지만 달마고도길에 앞서 눈앞에 있는 미황사가 발걸음을 계속 잡는다. 그렇담 우선 미황사부터.
절 입구부터 계속 오르막이다. "지금부터 웃음끼 사라질거야"로 시작되는 정인의 오르막길 가사가 생각난다. 다행히 천왕문을 지나면 자주 보기 힘든 윤장대가 사람들을 맞이한다. 열심히 돌려 속세의 죄를 조금이라도 씻고 들어오라고 하는 걸까.
절 뒤편으로 압도적이라기 보다는 화려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바위 산세가 병풍처럼 늘어서 있다. 이런 걸 병풍처럼 늘어섰다고 표현하는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아니면 설안산의 공룡능선 같은 표현은 어떨까. 미황사의 설명에도 나왔기는 하지만 공룡뼈와 같다는 표현은 역시 설악산이 더 어울린달까.
절로 들어서면 선종의 조사인 달마대사가 입구를 떡하니 지키고 섰다. 달마산 아니랄까 미리 선수를 치는 건가. 달마대사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도 참 장난기 가득한 모습으로 표현하는 게 유행인 모양이다. 아무리 엄한 모습으로 만들어놔도 결국은 입꼬리를 올라가게 한다.
대웅보전의 모습에서 천년고찰의 고풍스러움이 느껴진다. 대신 다른 건물에 비해 색이 칠해져있지 않아서인가 조금은 안쓰러움도 함께 내뿜는 느낌이다. 이곳 역시 터 하나는 기가 막힌 곳에 자리 잡았네라는 생각을 안 할 수 없다.
소백산맥의 끝자락에 달마산 같은 악산이 불쑥 올라온 것도 이상하거니와 그곳의 언저리에 자리 잡은 게 멀면서도 손에 잡일듯한 남도 바닷가의 오밀조밀한 모습이 가까운 듯 멀어질 듯 춤추는 그림이다.
대웅전 안을 훑어보다가 걷기 전 잠깐이나마 절을 하고 갈 마음이 생겼다. 가볍게 삼배를 하며 마음속으로 자그마한 소원을 빌어본다. 아니 나에게는 엄청난 소원이겠지. 나오려는 찰나 북을 등위에 올린 해태의 표정이 귀엽다. 분명 몹시나 무섭고 거칠 것이 없는 영물일 텐데 표정만으로는 영락없는 개구쟁이 강아지 포즈다. 괜히 한 번이라도 눈길이 더 가고 둘러앉아 같이 놀다 가면 좋을 모습이다. 사람을 붙잡는 묘한 힘이 느껴진다.
그러나 어쩌랴 더 서성이다가는 걷는 길의 시작도 못하고 주저앉을 판이다. 길을 나서자.
안내도를 시작으로 길을 나선다. 왼편이 1코스로 되어있으니 이를 끝으로 가면 다시 반대편 능선을 끝까지 걸을 후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달마산을 놔두고 한 바퀴 도는 길이다. 18km라...
길은 너무나 잘 닦여있어서 어려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이 모든 길들을 스님들이 손으로 만들었다는데 사실 가면서 느끼는 거지만 '왜 이런 일을 벌이셨나' 하는 생각과 '엄청 힘들었겠군'의 두가지 생각이 멈추질 않는다. 고마우면서도 참 부질없는 짓을 했네라는 이중적 생각이다.
한참을 호젓한 길을 걸으니 이대로 걷기만 한다면야 시간이 문제지 별 어려움은 없겠다는 생각이 앞선다. 너무나 잘 닦여진 길덕이다. 위쪽으로 계속해서 바위 정상들을 쳐다보며 걷게 된다. 순간 터널처럼 길을 지나고 나니 안내지도에 나와있는 대로 자연스럽게 바위들이 무너져 내린 너덜지대가 나온다. 꽤나 위험한 지역인데 그 사이에 평평하게 돌을 정리해 길을 만들었다. 역시 스님들의 노력 덕이라 하는데 마찬가지 생각.
1코스는 비교적 담담한 임도를 걷는다. 3km가 조금 안되니 걸을만하다. 오른쪽으로 바위산 정상들이 힐긋힐긋 보인다. 갑자기 걷는 길중간에 바람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거세다. 오늘 날씨가 그런가 하고 하늘을 보니 바람이 그다지 거세지 않다. 이곳이 유독 바람이 분다. 바람길인가. 안내도를 바라보니 그럴만하다 싶다. 1코스가 끝나고 2코스가 시작되는 곳의 이름이 큰바람재다. 이름값을 한다.
반대방향으로 길이 꺾이기 시작했다. 2코스다. 왔던 길을 반대로 걷는 셈이다. 단 봉우리 반대편에서 조금 걷다 보니 섬인지 육지인지 모를 곳(자세히 생각해보니 완도겠다 싶다)과 그 사이의 바다가 보이기 시작한다. 방향으로 동쪽이니 분명 완도다. 섬 사이에 들어온 바닷물이 마치 자신도 뭍의 일부라도 되는냥 동요가 전혀 없다. 저 바다도 태풍이 칠 때면 제 편을 들겠지. 과연 저 바다조차 격량이 일런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 사이사이의 정체가 헷갈린다. 섬인가 바다인가. 육지인지 아닌지.
아늑함은 이럴 때 쓰는 용어이리라. 바다를 바라보는데 무섭기보다 아늑하다는 느낌. 이곳이 주는 감성이 따스하게 다가온다. 걸으며 느껴지는 열기 때문인지 날씨 때문인지 아니면 바다에 대한 감흥인지 나도 모르게 겉옷을 벗어 허리에 묶는다.
샘이 나는 관음암터에 도달했다. 첫번째 쉼이다. 한참을 쉬면서 가지고 온 음식을 섭취한다. 오늘은 점심을 먹을 시간이 없을 듯하다. 아침을 말할 수 없이 푸짐한 기사식당에서 잔뜩 먹었으니 한동안 배고플 예정이 없다. 간단한 물과 커피 그리고 간식거리로 아직 찾아오지 않은 허기를 때운다.
이후 달마고도길은 수많은 스님들의 노력 덕인지 어려움 없이 능선길을 구비구비 걷는다. 거리에 대한 감각이 사라지며 하염없이 걷기를 계속.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어디만큼 왔는지 가늠이 안된다. 무상의 시간 속으로 빠져들듯 발걸음은 쉼이 없이 로봇처럼 거리를 좁혀가고 하나둘씩 지금의 상황에 맞추어 머릿속 상념들이 조용히 가라앉는다. 그런 만큼 몸에서는 조금씩 지칠 준비를 하고 있음을 안다.
눈에 보이는 바다의 풍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아까는 강진과 완도 사이의 바다였는데 이제는 좀 더 바다 쪽에 가깝다. 섬의 끝자락을 보는 듯하다. 더불어 그 사이에 점을 찍어놓듯 자그마한 섬들이 징검다리 하며 육지와 섬의 소식을 전한다.
서로가 이어져 있다는 유대감이 어쩌면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떨어져 있지만 이어져 있다는 느낌. 그리고 그 가운데 작은 섬들이 함께 뛰어노는 느낌.
쉼터에 앉는다. 점심을 먹고 싶기도 하고 걸음에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하늘을 보고 싶다. 언제 도착하려나 거리상으로는 반도 못 왔는데 벌써 파장 분위기면 안되는데 서서히 몸이 그쪽으로 기운다. 힘을 내자. 그러려면 쉬어야 한다.
이제부터는 암벽과 너덜이 시야를 계속 이끈다. 보이는 암벽들이 다기함을 자랑하는 장소인 모양이다. 어디에서 보아도 거의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르다. 참 멋진 곳이다. 저쪽 암벽 위로 걸으면 어떨까. 조금은 위험할 테지만 재미있는 등산길이 될 것이다. 다음에는 그쪽으로 방향을 잡아보면 좋을 듯하다.
숨이 멎는 장소에서 내 위치를 확인해보니 마라골잔등. 어느 동물의 잔등쯤 왔을 법하다고 지어진 이름인 모양이다.
거리상으로는 1/3 정도 왔는데 느낌은 반이상 지난 기분이다.
지도를 보니 임도와 숲 속을 걷는 길의 연속이다. 힘을 내고 걸어보자
중간중간에 보이는 너덜이 곳곳에 흩어져 군락을 이룬다. 이 지역들의 지반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모양이다. 능선 길마다 군데군데 이 너덜이 보이는 것을 보면 수직으로 서있기를 견딘 녀석들은 아직도 암벽의 바위로 남아있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 녀석들은 이 바위 너덜을 이루었을 것이다.
균형이 한쪽으로 무너져 버리면 일어나는 일인 게지. 그러기에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일 게다.
길을 걷다 보면 사람들은 돌 쌓기를 좋아한다. 돌을 쌓으면 어떤 소원을 비는지는 모르겠으나 참으로 많은 곳에 돌이 쌓인다. 그중 하나. 돌이 공중에 떠있는 모양을 내기 위해 조심스러운 공동작품이 눈에 띈다. 역시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다음 사람이 무너뜨리지 않고 덧붙여 더 높은 돌탑을 만들 수 있을까. 그 탑은 불심인가 아니면 정성의 힘이 되려나. 암튼 부석이라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마지막 고비를 남겨두고 있다. 갈림길이 나왔다. 도시랑골. 달마고도길을 한 바퀴 완전히 돌거나 아니면 달마산의 하이라이트 도솔암을 바로 오르느냐가 남았다. 한 바퀴 다 돌면 앞으로 최소 3~4km를 더 걸으며 반대편에 다달을 것이고 이미 지쳐버린 발걸음이 힘들어할 일은 분명하다. 한참을 쉬다 보니 초입에서 만난 부부가 도솔암에서 내려온다.
"도솔암 다녀오셨어요?
"네. 한 20분 정도 걸려요"
" 반대편 길이 없나요. 왜 이리로 다시 오셨나요?"
"저희는 남은 바퀴를 다 돌아 종주하려고요"
목표를 세워 끝까지 끝내겠다는 남자의 의지가 강해 보인다. 함께 따라온 여인이 이를 잘 받아줄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빠른 걸음으로 3코스를 끝내고자 길을 재촉한다.
우리도 도솔암을 놓칠 수는 없다. 도솔암을 보고 반대편으로 내려가자. 적어도 2~3km 정도는 단축될 것이다. 지금의 에너지로는 이것이 최선이다. 마음을 다잡고 도솔암으로 향하기로 한다. 달마고도길의 전반기 보행은 우선은 이걸로 중단. 쉼이 있으면 새로운 시작이 있는 법. 하루의 후반부 시작이다. (2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