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림길에서 도솔암을 택했다. 잠시 주저했을 상황이 조금 전에 만난 부부 덕에 결심을 굳히게 됐다. 저들은 이미 꼭대기를 오르고 내려왔는데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 그러나 길의 비탈이 생각 이상이다. 이미 지칠 때로 지쳐버린 저질체력이 얼마나 견뎌줄지 모른다. 하늘에 떠있는 암자와 같다는 도솔암이 어떤 모습이기에 그리 떠드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바로 옆으로 보이는 암벽 사이에 있는 것이려니 하고 뾰족이 솟은 바위를 올려다본다. 저곳만 오르면 될 일이다.
바위 사이로 난 길이 거칠다 못해 언뜻 보면 길이 있기는 한 건가 싶다. 그래도 보이는 길 사이로 매트가 깔려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걸음 두 걸음 옮긴다. 숨찬 간격이 짧아진다. 입으로 숫자를 세며 아무 생각 없이 굽이굽이를 걷는다. 직선 길로 오르기에는 너무 가파르기에 지그재그로 길이 꺾여있다. 그래도 비탈의 각도가 여유가 없다. 바트다.
순간순간 쉬면서 하늘과 바위를 바라보니 멀리서 보이던 바위들이 하나씩 이리 생겼음을 알게 된다. 저 바위 사이에 어디 있는 게 아닐까. 아니면 다른 어떤 경치가 기다리는지 잘 상상이 가질 않는다.
남도에 와서 찾게 되는 암자 몇 곳이 생각난다. 여수 항일암이나 지난여름 안개낀 길을 열심히 올라 30여 년 만의 약속을 지킨 남해도 금산 보리암. 그리고 도솔암을 다시 알게 되니 놓치기 아까운 느낌이다. 힘들더라도 가기도 해야 하지만 삥 둘러 가는 길을 가로질러 가는 길이기도 하니 최종 목적지이자 출발지이기도 했던 미황사에 조금 빨리 다다르게 될 거라는 나름의 포석이 깔린 발걸음이다.
말이 등산로지 사실상 직각에 가까운 바위길을 조금 천천히 살짝 방향을 틀면서 억지로 오르고 있다. 여기 사는 스님들은 어찌 이 길을 오르며 사는지. 체력 짱이 아니면 불가능한 비탈길. 암튼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 구비구비를 넘다 보니 몇 구비인지 알 도리도 없고 있는 에너지는 다 쏫아내고 더 이상의 미련도 없어질 즈음. 요 앞의 언저리쯤에 바람을 막을 수 있을 듯한 집과 팻말이 보인다. 다른 곳으로 통하는 길도 함께 만난다. 지도를 보니 주차장에서 올라오는 길이라고 되어있다.
"엥! 주차장에서 올라오면 금방 올라올 수 있는 건가?" 조금은 허탈함이 찾아온다.
도솔암에 도착하기 전 등을 돌려 올라온 길을 내려단 본다. 그동안 몇 시간을 걸어오면서 바라본 완도 쪽 섬과 바다가 확 트인 전경이 다가온다. 느낌이 다르네. 끝자락 어딘가에 왔구나. 다시 미황사가 있는 서쪽을 바라볼 차례다.
팻말에 쓰인 도솔암과 관련된 이야기. 그중 몇 줄을 인용하면 이렇다.
달마산 정산 바위 암벽 위에 앉은 도솔암의 구름길 절경에서 만나는 용담 설화
산길 오솔길을 걸어서 가야 도착할 수 있는 사찰, 그것도 산 정상 바위 위에 있는 사찰이라 신비하고 경건하다.... 오솔길은 너무 작아 홀로 걸어야 되는 길이다. 세상을 다 품을 듯한 길이며 많은 사색을 주는 길이다.... 신비한 기암괴석과 너머로 펼쳐진 산 아래 촌락과 들녘 그리고 바다, 너무도 청청한 이 길을 누가 만들었을까? 사색을 하며 오솔길을 걸어 도착하니 작은 암자가 나타난다. 미래불인 미륵이 산다는 도솔천이 이리로 왔다.
그 팻말을 넘어 반대쪽 바위를 바라보니 암자가 있다. 도솔암이다. 어이없다. 어찌 저런 곳에 암자를 지었을꼬. 그 앞에 걸려 있는 플래카드가 눈에 거슬린다. 그래도 기가 막히다. 바람이 앞길을 막아 한걸음 한걸음을 내딛기가 떨린다. 조심조심 돌을 헤치며 암자를 향한다. 암자에 다가설수록 미지의 영역 무언가를 향해 탐험을 나선 원정대가 마지막 목적지에 다달아 그곳의 신비를 알아내기 직전의 심정이랄까. 왜 이리 바람은 거센지. 무섭기까지 하다.
도솔암- 해남군 송지면 마봉송종길 335-300 도솔암
도솔암은 달마산의 가장 정상부에 있어 구름이라도 끼인 날이면 마치 구름 속에 떠있는 듯한 느낌이 새로운 선경의 세계에 와있는 느낌을 갖게 한다. 석축을 쌓아 올려 평평하게 만든 곳에 자리 잡은 도솔암은 마치 견고한 요새와도 같다.
이제부터는 경치 감상만 남았다. 뭐 다른 말이 필요 없는데 사족을 붙일 일이 아니다. 중간에 갑자기 드는 얄궂은 생각. 도솔암으로 택배를 붙이면 어디까지 가져다줘야 배달이 되는 걸까.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정작 암자를 바라보고는 특별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암자야 암자일 뿐인데 바람 불고 비 오는 날 여기서 홀로 앉아있으면 과연 무슨 생각이 들까. 그냥 자고 싶은 생각, 무서운 생각, 부모님이나 자식 생각, 혹은 나는 왜 태어났나 하는 아무 답도 얻을 수 없는 생각. 그게 뭐든 참 힘든 곳에 세워놓은 암자임은 분명하다. 이곳에 인위적인 암자를 세운 것도 의외이기도 하지만 암자 옆에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무 또한 그 어느 것보다도 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참 멋진 나무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듯하다. 오히려 어떤 스님보다도 더 많은 생각을 하면서 세월을 버티며 수많은 풍상을 겪었을 터인데 굳건하기만 하다.
이제 내려가는 일만 남았다. 하루 종일 둘레길을 걸어왔다는 생각을 잊었다. 그냥 멋진 악산 하나를 올랐다는 생각이 막연히 든다. 어느 산에 등산 온 거지? 하산길이 험하고 거칠다. 오르기 힘겨웠던 바위산이었던 만큼 내려가는 길도 만만치 않다. 가는 길에 작은 암자의 표시가 하나 더 있다. 내려가는 길에 자꾸 뒤돌아본다. 못내 뭔가 아쉬움이 남아 도솔암의 위치를 쳐다보는데 밑에서 내려다보는 모습이 멋지다. 그러고 보니 암자에서 서쪽 경치를 잔뜩 눈에 담았지만 정작 바위틈에 앉은 암자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는 못했다.
내려가던 길을 무리해서 다시 오른다. 또 다른 암자를 찾아 나섰다. 삼성각이다. 생뚱맞은 곳에 위치한 삼성각이지만 그보다 그 앞에서 바라보는 도솔암의 모습이 최고다. 팻말로 도솔암 경치 잘 보이는 곳. 사진 찍기 좋은 곳이라는 표시마저 되어있다. 힘든 길을 되돌아오기를 너무나 잘했다. 역시 사람은 직감적으로 뭔가 부족하거나 문제가 있으면 촉으로 알게 된다.
삼성각에서 바라보는 도솔암은 경치의 백미를 자랑한다. 서쪽으로 비친 바다와 섬 그리고 구름의 모습도 일품이지만 바위틈에 돌을 쌓아 그 위에 올린 도솔암의 모습과 주변 풍경은 전혀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다. 왜 구름에 떠 있는 암자라고 일컫는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진짜 안개라도 끼거나 구름이 잔뜩 낀 날 암자는 어쩌면 무협소설이나 기타 판타지에서나 그려볼 만한 모습의 재현이라고 할 밖에. 내려가는 내내 어쩌질 못하고 똑같은 사진을 자꾸 찍고 또 찍는다. 뭐가 그리 아쉬운지 참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아마 내심 꽤나 깜짝 놀란 모양이다.
삼성각에 다시 찾아 올라오길 너무나 잘했다. 제대로 된 경치를 한번 봤으니 흡족함이 이를 때 없이 크다. 그 덕에 살짝 기웃거려보는 암자 내부의 부처님과 산신령들의 모습이 매우 정겹다.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를 하며 갈길을 재촉하기로 했다.
이후 어떻게 산길을 내려왔는지 모를 정도로 속도를 낸다. 다만 중간에 용담을 한번 들른 사실을 제외하고는 마음이 급하다. 이대로 아무리 빨리 걸어도 5시에 미황사에 도착하기 쉽지 않다. 사실상 점심을 굶은 셈이다. 오늘 아침에 북일 기사식당에서 사 가지고 온 고구마 말린 것이 간식이 아니라 주식이 되어버렸다. 고구마를 적절하게 쪄서 말렸는데 질리지 않고 계속 먹게 된다. 그 덕에 배가 고프지 않다.
이제는 목표를 향해 갈 뿐이다. 더 이상 사진을 찍거나 주변의 경치를 돌아볼 기운도 없다. 다행히 둘레길은 이제 제대로 된 숲길과 숲 사이로 삐죽 솟아난 바위 말고는 더 이상의 경치를 허락하지 않는다. 아마 경치를 보여줘도 감동할 준비가 되어있지 못한 방문객임을 알기에 자제한 것일 게다.
걸으며 1km 단위로 줄어드는 팻말을 바라보며 힘을 얻는다. 마지막 고비다. 1.2km 남았다. 명목상으로는 16.5km를 걷는 셈이다. 힘을 내자.
미황사 도착 직전에 재미있는 바위를 하나 만났다. 산에서는 지팡이 대신 나무 지팡이를 사용하는 경우가 흔하다. 미황사 도착 직전 누군가 시작한 나무 지팡이를 세워놓은 바위가 이곳을 지나간 나그네의 지팡이들을 한껏 받아내고는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이제 다 왔으니 산의 것을 돌려놓고 가는 것이 맞을 것이다. 나무를 가지고 가봐야 제 역할을 할 수도 없을 테니. 반대로 가는 사람에게는 이중 괜찮은 지팡이 하나쯤 집어서 걷기를 시작해도 무방할 것이다.
다시 찾은 미황사는 이미 하루를 보내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멀리 노을의 전조가 보이고 몇몇 사람들이 해 질 녘 사찰의 차분한 분위기를 즐기려는지 서성이는 이들이 꽤나 많다. 내일 1년에 한 번씩 절이 보관하고 있다는 탱화를 밖에 내거는 행사를 한단다. 보러 오라는 보살님의 초청이 있다. 오고 싶다. 그러나 다른 일정으로 올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아쉽기 그지없다. 이미 해가 갈길을 재촉하고 배 역시 하루 동안 몸의 수고를 보상하라며 꼬르륵 소리를 내지른다.
차에 앉았다. 오늘 저녁은 어딜 가서 맛있는 음식으로 보상을 받으면 될까. 남도니까 모든 게 걱정이 안 된다. 특히 음식은. 출발. 힘든 하루지만 웃음이 따라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