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 기행을 생각하던 순간부터 그 여행은 이미 풍만함으로 가득 찬 길이었음이 분명하다. 어딜 가나 먹을 생각을 하면 먹을 걸 가려야 하는 나로서도 잔뜩 기대가 되기 때문이다. 그 기대의 대부분은 매체를 이용하거나 기존 여행자들의 리뷰를 활용할 수밖에 없지만 지역이 지역이니 만큼 별다른 걱정이 없다. 결국 맛이라는 게 혹은 음식의 수준이라는 게 일정 수준을 넘어서는 지역에서는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차이는 나더라도 반찬의 수나 함께 같이 나오는 음식이 뭐냐에 따라 꽤나 판단을 좌우할 소지가 많기 때문이다.
여행은 시작부터 끝나는 시기까지 어디를 갈 것인가보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가 더 중요한 요소였다.
첫 시작은 도착한 광주공항에서 가까운 나주의 다복가든에서 하기로 했다. 오전 비행기를 타고 광주에 도착한 즉시 차를 찾아 네비를 찍는다. 뜻밖에도 30여분의 거리인 '홍어의 거리'에 위치에 있다. 사실 홍어를 먹는 편이지만 막 좋아해서 찾아다니며 먹는 수준은 아니다. 특히 홍어애탕을 몇 번 먹어봤지만 그 음식의 애호가는 결코 아니어서 조금은 갸우뚱했다. 삼합이라면 모를까. 그냥 홍어집이 아닐까.
공교롭게도 도착한 시간은 11시가 넘지 않았다. 기다리려면 30분 이상이다. 아침 일찍부터 아무것도 안 먹고 아점을 생각하던 터라 바로 먹을 수 있을 듯한데 준비하는 사람들은 그게 아니다. 아침식사를 하는 식당이 아니라면 11시가 안된 시간은 이른 시간일 수밖에 없다. 눈물을 머금고 가게 앞에서 서성이다 다른 장소를 찾기로 한다.
허영만의 백반기행에 나오는 백반집이다. 영암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장소를 찾아본다. 수궁한정식. 무엇보다 외지인의 입장에서 보면 빈 공간에 상채 들고 들어오는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는 모습인지라 꽤나 가보고 싶었던 집이다.
12시가 막 시작되기 전에 도착했다. 영암이라는 곳이 목포에서 아주 멀다고 생각했는데 지리상 옆에 붙어있음을 알게됐다. 공단을 지나고 나서 영암 F-1 경기장 바로 앞에 있는 식당인데 주변이 모두 공장밖에 없다. 어찌 보면 허허벌판에 있는 식당이라는 표현이 어울린다고 할까. 나름 도심 한복판이나 시골의 장터에 있는 식당이라고 생각했는데 조금은 생소한 위치다. 그런들 어떠랴 식사가 중요하지.
가게에 들어가니 식사하는 한두 팀을 제외하고 공간이 휑하니 비어 보인다. 안쪽에 들어가 앉았다. 빈터에 그냥 들어가 앉아있으려니 낯설고 생소하다. 다행히 가격이 좋다. 1인당 1만 원. 곧이어 직원 두 분이 상을 양쪽으로 들고 들어와 가운데 놓고 간다. 다른 반찬들이야 그렇다 치고 해물탕에 돼지불고기, 조기류, 아마도 부세 쯤 되겠지만 그리고 이거 저거. 반찬 가짓수로만 따지면 접시만 18개다. 사실 이것 만으로도 만족 아닌가. 아무리 음식의 맛을 고려치 않아도 이 다양한 반찬에 생선과 육류는 기본의 맛이고 나머지는 지역의 야채들인데 뭐가 걱정이랴. 해물탕은 생각보다 내용이 튼실하다. 조개에 게는 물론 홍합 그리고 전복도 있다. 이거 한 뚝배기만 해도 가격을 논할 바 아니다.
무엇보다 맛이 기본 이상이고 시원하다. 맛을 표현하는 방법을 잘 몰라 어찌 설명할 방법이 없다. 허영만 선생은 이 음식 맛을 보고 잘도 표현하더만 역시 작가의 수준이란 비교 불가의 무엇이 있다. 정신없이 허겁지겁 식사를 마치고 나니 벌써 밖에서 식사팀들이 몰려들어 줄을 서고 있다. 소문난 한정식집을 그냥 놔둘리 없다. 더구나 방송에까지 나왔으니.
나름 아점을 먹고 해남의 두륜산 자락에 숙소를 잡았다. 설아다원. 조금은 생소하고 조금은 편안한 온돌방에서 짐을 풀고 나니 금새 해가 저문다. 시골은 해가 있을 때와 없을 때가 완전 다르다. 10월 하순의 해는 생각보다 훨씬 짧아졌고 꽤나 싸늘한 분위기가 온 마을과 집 주변을 감싼다. 더구나 바람이 불어 춥기까지 하다. 저녁을 먹으러 가는 선택은 두 가지다. 해남군청이 있는 중심지로 나가 주인이 추천하는 식사를 할 것이냐 아니면 5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동네 식당에 갈 것이냐. 문밖으로 나서보니 멀리 갈 생각이 사라진다. 갑자기 칠흑 같은 밤이 되어버렸다.
동네 어귀로 나간다. 지명이 낯설다. 해남군 북일면. 지역 사람들은 서운하겠지만 역시 처음 들어보는 지명이다. 이곳에 온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밤이 되니 온 동네가 캄캄하다. 시간은 7시도 안됐는데 오밤중 기분이다. 주인이 알려준 사거리를 중심으로 식당을 기웃거리다 슬쩍 문을 열고 들어간다. 식사는 안되고 세발낙지만 된단다. 그래도 밥을 먹어야지 고민하다 다른 식당을 찾아보기로 한다. 저 멀리 불이 켜져 있는 식당이 보인다. 주차장도 넓은 식당. 지역에 어디에나 있는 기사식당이다.
"식사되나요?"
"네. 식사됩니다."
일단 큰 부담 없이 동네가 해남이니만큼 음식은 어딜 가나 기본 이상일 것이라는 안도감을 갖고 앉는다. 주인장 아주머니가 세발낙지가 있는데 먹겠냐며 묻는다. 낙지가 다 팔리고 5마리 남았단다. 한 마리당 4천 원. 그럼 한 접시에 2만 원인 셈이다. 실제로 담아온 한 접시가 생각보다 훨씬 양이 많다. 이것만으로도 득템이다. 옛적에 아마 10년도 더 넘었을 텐데. 시기도 모르고 여름휴가철에 남도에 내려와서는 세발낙지가 유명하다고 무안에 갔다가 구경도 못하고 매운탕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가격도 비싸고 만족도가 낮아 꽤나 아쉬웠던 기억이 새롭게 떠오른다.
오호 근데 이게 뭐람. 갑자기 큰 쟁반에 온갖가지 반찬이 가득 담긴 반찬상이 테이블 위에 놓인다. 이어 생굴과 돼지고기에 고등어조림 등을 추가로 가져온 데다 마지막으로 찌개를 블루스타에 얹어놓고 가신다.
헉... 공깃밥을 들고 오는데 밤을 놓아둘 장소가 부족하다. 한상 가득이라는 것이 이런 걸 말하는 거구나.
그 반찬 위에 놓을 공간이 모자라 계란 프라이까지 들고 오니 구석에 겨우 걸쳐놓게 된다. 계란만 빨리 먹고 다른 곳으로 치워야 할 판이다. 안 그러면 밥 먹기가 불편해 보인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진수성찬이다. 슬쩍 가격을 보니 백반 팔천 원이라고 쓰여있다. 설마 팔천 원은 아닐 게다. 나중에 나가면서 물으니 저녁은 만원이란다. 그럼 그렇지. 그럼에도 점심에 먹은 백반집보다 가짓수가 더 많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별도로 시킨 낙지를 제외하고 23가지 반찬이다. 고추장과 된장을 빼고도.
맛은 전라남도의 기준을 감안하면 평범하면서도 손맛이 느껴진다. 타지역에서는 수준급이 분명하다. 기사식당 특유의 약간 거칠면서도 거침없는 맛이 느껴진다. 아주 고급스럽다고 느껴지지 않지만 나름 지역의 특색 있는 손맛이 느껴지는 반찬들이다. 그렇지만 이 가격에 이 많은 반찬과 흠잡을때 없는 맛이라니 가당키나 한 일일까.
사장님에게 이 많은 음식의 출처를 조심스레 묻는다.
"내가 대부분 농사를 직접 지어서 내놓는 거지"
그럼 그렇지. 이걸 마트나 장에서 다 구해서 반찬으로 내놓는다고 생각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고 보니 가게 한쪽에 바위만 한 늙은 호박이 가득 쌓여있고 김도 한가득 쌓여서 별도 판매를 하고 있다. 물론 미역 등 여러 가지도 함께.
이 집 음식의 특이함은 호박이 많아서 그런지 늙은 호박이 곳곳에 함께 한다는 점이다. 호박만 무친 가벼운 음식에서 전혀 새로운 된장국을 선보인다. 늙은 호박만 넣고 된장국을 끓여서 내놓았다. 이게 과연 무슨 맛일까.
의외로 새롭고 깔끔하다. 다른 건 몰라도 일체의 내용물이 없는데 아주 시원할뿐더러 된장의 맛과 늙은 호박의 맛이 각자 살아있으면서도 묘한 조합을 보인다. 새로운 경험이자 감동이 몰려온다.
예상치 못한 저녁을 너무 거하게 먹고는 내일 아침에 다시 찾겠다는 자연스러운 약속을 한다. 이 정도라면 다음날 아침 해장으로도 그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주머니는 와봐야 오는 거지 싶은지 알았다고만 끄덕인다.
다음날 다시 아침을 먹으러 갔다. 기사 식당답게 기사들이 아침부터 한두 명씩 몰려든다. 맛과 푸짐함이 알려진 식당임이 분명하다. 어제와 거의 비슷한 메뉴로 아침상이 나온다. 하루 종일 걸을 걸 생각하면서 열심히 밥을 먹지만 그래도 반찬이 너무 많다. 최선을 다해 먹을 뿐이다. 아침상의 특이점을 발견하기 쉽지 않다. 이미 한번 경험했기에 하룻밤만에 뭐가 달라질리야 없을 테니 말이다. 아침의 찌개는 생선찌개를 준다. 한 그릇 가득 담아놓고 거의 냄비가 비자 일하시는 분이 갑자기 냄비를 가져간다. '다음 사람을 위해 찌개를 준비하는 모양이네'라 생각하며 남은 찌개가 조금은 아쉬웠지만 그러려니 하고 만다. 새로운 찌개가 나타났다. 사장님이 와서 말을 전한다.
"홍어애탕이니 먹어봐요. 서비스요"
헉, 예상치도 못한 반전이다. 찌개를 두 가지나 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것도 먹기 쉽지 않은 홍어애탕을. 사실 홍어애탕은 쉽지 않은 음식이기는 하다. 싹싹 먹지는 못했지만 아침부터 진수성찬을 먹고 나니 하루 종일의 걸음걸이가 그나마 어렵지 않을 것 같다. 물론 하루 종일 씩씩하게 걸었다.
아침 식사에 대한 생각을 하며 8시간의 무리한 둘레길을 걷고 나니 배고픔이 밥을 재촉한다. 여기저기를 찾다가 고민끝에 해남의 백반집을 찾아본다. 제일 유명하다는 천일식당을 향해 간다. 가격은 다른 식당에 비해 꾀나 세다. 떡갈비정식이 3만 원, 불갈비가 2만 5천 원이다. 떡갈비가 맛은 있지만 너무 달아서 별로 즐겨하지 않기에 불갈비 정식으로 주문을 한다. '여기도 상을 가지고 들어오네.' 다만 작은 방으로 나뉘어 있어 수궁한정식처럼 덩그런 느낌은 조금 적다.
가격 맛을 한다. 모든 반찬이 맛있다. 게장은 물론 다른 곳에서 만나게 되는 다양한 반찬들도 다 맛보지만 역시 명불허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근데 무엇이 특징인가를 잡아내라면 '딱 이거다'라는 것이 조금 부족하다. 집사람은 오랫만에 바짝말려 구운 굴비가 최고란다. 나는 메인 메뉴인 불갈비가 제격이다. 연탄불에 구워져 들어온 소고기가 최고의 맛을 보여주니 다른 맛을 기억할 겨를이 없다. 안타깝게도 사진 찍는 걸 잊었다. 에고 이를 어쩌나. 이곳 역시 옛적 백반으로 지역을 대표하는 식당인 만큼 후회는 없다. 맛난 음식에다 시장이 겹치니 밥 한 그릇이 추가로 더 들어간다. 당뇨가 있는 놈이 이러면 안 되는데 제어가 되지 않는다. 열심히 걸었으니 이쯤은 용서하기로 하자. 저녁을 먹고 숙소로 든다.
숙소는 강진에 자리를 잡았다. 저녁 늦게 들었으니 피곤에 그냥 곯아떨어진다. 주말이라 어렵게 잡은 한옥민박집의 아침식사는 8시부터란다. 아무 생각 없이 겨우 잠을 깨고 사장님이 차려주시는 상앞에 앉았다. '간단한 식사를 주시겠지 아침인데.' 여기도 생각 밖이다. 10여 가지의 반찬에 국까지. 아침부터 이렇게 많이 주면 어쩌란 말인가. 아직 배고픔을 느끼기도 전에 밥을 한 그릇 먹어치운다. 나머지는 과하면 안 되겠다 싶어 주저주저. 다른 곳을 또 가서 먹을 테니 아침은 이쯤에서 멈추어야 한다. 그럼에도 아침을 먹은 게 부담인지 아침 산책 내내 부담스럽다. 오늘이 마지막 여행날이자 마지막 식사가 기다리는데 그때까지 무난히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어제처럼 한참을 걸어야 하는 일도 아니니. 물론 이 같은 상상도 하루의 일정상 완전히 어긋나는 일이 되었지만 민박집의 아침 클래스 역시 타 지역의 백반집 수준을 훌쩍 뛰어넘어 버리고 나니 뭐라 할 말이 없다. 다만 남도에 온후 먹은 네 끼를 너무 거하게 먹다 보니 아침식사가 그냥 그렇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상대적 빈곤감에 어이없어 실소가 나온다. 아침 반찬이 10가지가 넘고 모두 맛있는 채식 중심의 좋은 반찬임에도 말이다.
바야흐로 마지막 식사 장소에까지 이르렀다. 첫날 가지 못한 다복가든을 다시 찾았다. 공항 비행기 시간이 6시쯤이니 시간이 넉넉하다. 이래저래 욕심스럽게 장소를 거치다 보니 도착한 시간이 3시다. 사람이 없다. 다행이다. 일반 식사도 되는데 홍어의 거리에 왔으니 홍어정식을 시킨다. 다른 반찬보다 홍어삼합이 나오는 내용이 다른 모양이다. 나야 반찬의 이름도 모르고 집집마다 특색이 있는 음식들이 나오는지라 메인 메뉴만 생각날 뿐이다. 홍어삼합과 찌개, 꼬막 등 일반적인 음식에 가짓수는 상대적으로 적다는 느낌이다. 이전의 다른 식당들보다 많지 않다. 그래도 시장이 반찬이니 맛있을 것 같다.
한입 넣고는 생각이 확 바뀌었다. 너무 맛있다. 아무런 생각 없이 폭풍흡입의 시작이다. 모든 반찬 하나하나가 일품이다. 이런 정도의 맛을 낼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그동안 먹었던 모든 백반이 그래도 내놓라 하는 남도의 식사였는데 그것들을 넘는다.
식사를 마치고 마주 앉은 집사람이 이야기한다.
"이 집이 갑이네"
그렇다. 어쩌면 맨 나중에 먹기를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처음부터 이 맛에 길들였으면 그동안 네 끼의 식사가 조금은 부족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매 식사를 먹을 때마다 그 집만의 새로움으로 만족감이 풍만했는데 마지막을 화룡점정으로 가장 멋진 맛을 선사해준다. 이 집보다 더 맛있는 집은 물론 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삼일 동안 먹은 여섯 끼의 백 반중 다복가든이 조금 앞서 최고인 것만은 분명하다. 가격도 착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남도여행의 풍취를 맛 기행으로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데 만족하며 흐뭇한 미소를 안고 떠난다. 남도 맛 기행, 맛 기행 하는 입버릇 같은 이야기들이 왜 나오는지 족히 알만하다. 다른 여행 중에 한두 번씩 먹게 되는 백반들이지만 모든 식사를 백반으로만 채우고 나니 살이 족히 2킬로는 찌지 않았을까 걱정도 된다. 그래도 맛에 충분히 만족하고 돌아가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 언제 또 오려나 빠른 시간 안에 다시 올 계획을 잡아야겠다.
그 생각만으로도 입안에 군침이 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