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분자에 하루를 걸다

[중산간 일기 3]

by 너구리

채집 생활에 조금씩 매료되어가는 순간이 자꾸 늘어난다. 토요일 아침. 매주 나에게 스스로 주는 자유의 시간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오전 9시 전에 집을 나서고 하루 종일 어딘가를 헤매다 개인 사무실에 가서 시간을 보내거나 몇몇 가지 잡동사니를 쇼핑하는 일이 주요 일과다. 뒷부분의 생활은 도시에서의 생활이지만 앞부분은 자연과 함께 하는 시간이다.


복분자에 진심을 담아 길을 나서기로 했다. 이미 지난해 우연히 장소를 봐 둔 곳이 있다. 멀지 않은 삼다수 숲길 입구다. 며칠 내내 동네에서 보이던 몇 그루의 복분자에 감동을 하던 차에 작심하고 길을 나섰다. 오늘의 목적은 걷기가 아니라 복분자 채취다. 채집 생활이 주목적이다. 걷기 위해 삼다수 숲길을 다니던 일이 다섯 번이 족히 넘을 테지만 오늘은 숲길을 걸을 생각이 없다. 주차해놓는 숲길 입구 부근에 작년에 마음껏 복분자의 시간을 만끽했던 장소가 목적지다. 작년의 기억을 일 년간 고스란히 가슴에 담고 길을 나섰다.


오늘은 일행이 있다. 플라스틱 통과 종이컵 3개를 준비해서 나타났다. 종이컵은 사실 테이크아웃 커피잔으로 거사를 위해 준비한 물품은 아니지만 요긴하게 사용될 예정이다. 시내에서 멀지 않기에 삼다수 숲길의 입구까지 차를 몰고 들어간다. 예전에는 교래리 사무소에 차를 세우기도 했지만 삼다수 숲길이 유명해지면서 도로변에 큰 주차장도 생겼다. 원래의 도로변 입구가 바뀐 셈이다. 사실 주차장에서부터 걸어야 멋들어진 정원을 지닌 집들과 삼다수공장의 담벼락을 한참 지나 호젓한 숲길 입구에 다다르게 되지만 그 과정이 길기에 많은 사람들이 입구까지 차를 몰고 들어온다.


나 역시 목표가 걷기가 아니기에 오늘은 입구까지 무작정 차를 들이댄다. 삼다수 공장 뒤편 담을 지나고 나니 버섯 농장 옆에 복분자 열매가 눈에 들어온다. 다행히 넓은 공간이 있어 차를 세우고 채집활동에 시동을 건다. 복분자는 나무줄기에도 가시가 널려있고 입새 뒤편으로도 가시가 돋아있어 열매를 채취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아픔을 감수해야만 한다. 앗따가워! 순간순간 나도 모르게 비명소리가 들린다. 차를 바꿔 타고 오느라 작업용 장갑을 놓고 왔다. 눈에 보이는 열매를 순식간에 채취하는 사이 손등에 가시 자국 몇 개가 생긴다. 이곳은 이쯤에서 중단해야 한다. 본 행사가 아직 남았으니. 다시 재시동. 길을 나선다. 아뿔싸! 좁은 안쪽 길 옆에 차들을 세워둘 만한 장소란 장소에는 차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숲길 입구를 지나칠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들이 숲길을 걸어 들어가지만 유유히 쳐다보며 입구를 지나친다. 길은 외길인데 RV차가 뒤를 따라 들어온다. 차를 돌릴 수 없다. 500m는 족히 더 가고 나서야 뒤차에게 길을 내어줄 공간이 나온다. 억지로 차를 세우고 숲길 아닌 숲길을 걷는다. 삼다수 숲길은 아니지만 주위로 여전히 숲이 우거져 있다. 한쪽으로 복분자의 빨간 열매가 눈에 들어온다. 그때마다 팔의 길이를 최대한 늘려 열매를 딴다. 빤히 눈에 보이는 열매가 너무나 많지만 손이 닿는 곳 몇 군데밖에 딸 수가 없다. 장소가 워낙 비탈져 있다 보니 내려가면 눈에 보이는 열매는 사실 꽤나 높은 곳에 달려있는 열매다. 비탈을 내려가면 너무 높아 딸 수가 없다. 결국 몇 군데를 헤매다 원래의 목적지로 돌아가기로 하고 발길을 돌린다.


다행히 원래 목표였던 곳에 주차할 장소가 생겼다. 차 뒤편으로 복분자 나무들이 곳곳에 서있고 넓고 평평한 곳이다. 작년에 이곳에서 한 시간 이상 꿀을 찾는 벌처럼 이나무 저 나무를 헤매며 득템을 하고 횡재한 기분으로 채취를 했던 곳이다. 기분이 벌써부터 들뜬다. 빨리 따고 싶다. 차를 나서자마자 박 차고 풀밭으로 발길을 돌린다. 물컹하다. 어제 내린 비로 인해 풀이 깊은 곳이라 조심해야 한'다. 운동화 사이로 물기가 조금씩 스며든다. 매우 기분 나쁜 느낌이다. 양말이 젖어 축축하면 걷기에 불편할뿐더러 느낌이 아주 안 좋은 것은 다들 알고 있으리라. 그래도 속으로 '복분자! 복분자!'를 외치며 풀숲 안으로 들어가 나무들을 찾아본다. 웬걸 빨깧게 익은 열매가 거의 없고 아직도 복분자들이 새퍼렇기만하다. 아니 다른 나무들은 다 열매를 맺어 가고 있구먼 이곳의 나무들은 전혀 익은 기색이 없다. 뭐지 이 허탈함은... 질척거리던 바닥은 풀 위로 물이 오르고 거의 발목까지 물이 들어와 축축한 수준을 넘어 물속에 담긴 느낌이다. 아예 습지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눈물을 머금고 철수를 결정한다. 이 장소는 포기다. 하루를 보내기로 한 목적지가 사라지니 허탈함이 강하게 찾아올뿐더러 아쉬움이 도무지 가라앉지를 않는다. 고사리 채취 때도 이렇게 허탈하지는 않았다. 고사리는 들판을 헤매면 되지만 복분자는 나무를 찾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내가 아는 장소라고는 이곳 말고는 없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하루의 걸음걸이 목표라도 채울 요량으로 남조로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들어오던 길을 산책이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차장까지 차를 몰고 나온다. 갑자기 다른 장소가 생각난다. 지난해는 오늘 들어온 길과 다른 옆길로 들어왔었고 그곳에 아주 많지는 않아도 꽤나 괜찮은 수확을 거둔 장소가 생각이 난다. 주차장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혹시 모르니 그곳을 경유지로 산책을 나선다. 삼다수 숲길 걷기는 초입의 맛도 나쁘지 않다. 꽤나 정원이 좋은 집들이 모르는 사이에 또 늘었다. 참 부러운 집들이다. 정원이 이쁜 집이 부럽다. 물론 정원을 가꾸고 싶은 욕심은 별로 없지만...


나왔던 길을 한참 들어가 보니 작년에 초반에 채집했던 기억의 장소에 다 달았다. 곳곳에 복분자의 흔적이 눈에 띈다. 문제는 가시가 우거지 덤불에 바닥의 돌 위에 이끼가 잔뜩 껴있는 곳이다. 길가임에도 이끼가 많은 이유는 이곳이 교래라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시간 가는 줄은 모르고 가시덤불을 헤맨다. 이곳에 생각보다 더 많은 복분자가 기다리고 있다. 가시덤불을 헤칠 때마다 손등에 상처가 생기고 따가운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가시로 찌르는 느낌. 말 그대로의 고통이다. 그래도 채집에 하루를 걸었기에 양보할 수 없다.


지나는 젊은 커플이 나와 일행이 너무 열심히 채집하는 모습을 보더니 신기한 모양이다.

이게 산딸기예요? 참 공교롭다. 너무 열심히 팔을 뻗어가면서 높이 매달려 있는 열매를 따고 있는데 그들이 가리키는 곳은 땅 아래의 빨간 열매들이다. 소위 뱀딸기다.

'그건 뱀딸기라고 하고요. 맛이 하나도 없어요. 이게 복분자예요'

신기한 듯 복분자 몇 개를 따먹더니 즐겁게 지나며 한마디 한다.

'여기 사는 사람들인가 봐'

피식 웃음이 나온다. 눈에 보이는 딸기를 따면 딸 수록 좀 더 깊고 위험한 곳으로 자꾸 파고들게 되고 자세도 영 불안하기 짝이 없다. 발밑은 미끄럽고 여차하면 부상당하기 십상이다. 문제는 눈앞의 나무 너머로 더 알찬 열매들이 가득 보인다는 점이다. 그곳을 넘어가려면 낮지만 돌담을 넘어야 하고 가시덩굴도 헤쳐야 한다. 한데 자세히 살펴보니 그 나무가 있는 장소가 평지에 가깝다. 갑자기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잠깐만요. 여기 잠깐만 들렀다 갈게요'

복분자가 줄을 서있던 장소를 돌아 조금 지나고 나니 안쪽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온다. 자연초지가 평평하게 펼쳐져있는데 간간히 복분자가 눈에 보인다. 말발굽 모양의 장소에 테두리를 둘러보며 걷다 보니 엄청난 크기의 나무와 온 나무에 핀 복분자 열매가 주렁주렁 맺혀있다. 이게 웬 횡재인가.


갑자기 잠시 주춤했던 복분자에 진심인 마음이 막 솟아오른다.

'일단 차까지 가서 통을 비우고 다시 오시죠'

커피 컵에 가득 찼던 알맹이를 차에 있던 플라스틱 통에 담고는 다시 자를 몰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풀밭은 젖어 있는 정도도 별로고 평지인지라 손을 뻗어 열매를 따는데도 전혀 어려움이 없다. 여전히 손이 닿지 않아 못 따는 높은 곳에 맺힌 열매가 야속하기만 하다. 아주 빠른 시간에 테이크아웃 컵 한통이 가득 찬다. 복분자를 따면서 초반에는 많이 주워 먹는데 양이 많아지니 입안에 넣는 것조차 아깝게 느껴지며 목표가 생긴다. 빨리 이 통을 채우리라. 간간히 열매 위에 똬리를 틀고 앉은 작은 지렁이 같은 벌레가 눈에 띠지만 살살 흔들어대면 녀석도 떨어져 나간다. 벌레도 안중에 없어진다. 진심인 하루 벌써 1시가 다 되어가는데 복분자에 대한 진심은 가라앉질 않는다.

'그만 밥 먹으러 갑시다'

누군가의 요청 소리가 없었으면 이날 나는 해가 지도록 복분자에 매다려 있었을지도 모른다. 역시 초자들이 재미 들리면 정신이 없어진다. 도낏자루 섞는지도 모른 채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제야 배고픈 생리현상이 몸에서 반응을 보인다.

뭐 먹지? 뭐든 좋다. 충분히 오늘 하루 채집 생활에 충실했으면 됐다. 채집 생활 초자의 복분자에 건 하루는 그렇게 지나갔다.

다음 주에 또 가볼까. 고사리 꺾기 초기 심정이 이랬다. 누우면 눈앞에서 고사리가 아른거렸는데 지금은 지나다가도 가시가 있는 비슷한 나무를 보면 혹시 복분자가 아닌가 쳐다보게 된다. 그러고 보니 산책길에 모르던 복분자 열매가 꽤나 많이 열렸다. 왜 이제까지 여기에 복분자가 열렸다는 것을 몰랐지... 참 신기한 일이다.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이기 마련이다.


6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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