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간 일기 2]
아침에도 강아지가 낑낑대는 소리를 이기지 못하고 문밖을 나섰다. 아침 산책을 왜 안 나가냐는 녀석의 항의를 빗발치듯 듣다가 급기야는 침대맡에 코를 들이대고는 내가 다른 일을 못하게 한다. 늦잠 자지 말고 일어나라는 요구다. 일요일 오전에는 늦잠이라도 푹 자면 좋으련만 녀석의 성화에 못 이겨 뒹굴거리던 시간을 멈추고 주섬주섬 바지를 입는다. 아침 8시 10분이다. 이른 시간도 늦은 시간도 아니다. 밖은 여전히 이슬비가 흩뿌리고 있다. 여기가 이 정도 비가 내리면 시내에는 비가 멎었으리라.
그 정도 비쯤은 충분히 맞고 나서겠다는 결의를 보여주고 있는데 내가 머뭇거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산과 얇은 바람막이를 걸치고 산책을 나선다. 산책길이야 이미 정해진 경로인지라 20분을 천천히 위쪽 펜션단지인 조이빌의 끝자락까지 다녀오면 다 되는 길이다. 부산스럽게 앞길을 나서고자 하지만 내 발걸음이 그다지 빨리 반응하지 않는다. 그냥 좀 천천히 걷자꾸나.
봄이었으면 이 길은 벚꽃으로 가득한 길이다. 올봄도 다른 벚꽃길을 찾아갈 필요 없이 이곳을 매일 걸으며 부러움 없이 지냈다. 밤새 불어닥친 비바람에 바닥이 나뭇잎과 작은 열매로 도배를 해버렸다. 며칠 전부터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산책 파트너인 '버스'가 산책 중 날름 집어먹는 실체가 지렁이나 벌레가 아닌 작은 나무 열매일 거라는 사실이다. 사실 이맘때가 아니고서는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것은 마다하지 않고 날름 삼키는 덕에 무언가를 삼키려는 행동을 보면 반사적으로 강아지 줄을 잡아당기는 버릇이 생겼다. 나무껍질에 벌레는 물론 풀을 뜯어먹는 통에 괜스레 내가 지저분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수없이 많은 동그란 무언가를 계속 먹어치우고 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유독 눈과 발에 밟히는 짙은 자주색 열매가 널브러져 있다. 밟을수록 붉은색을 도로에 퍼뜨린다. 그제야 알아차렸다. 저게 버찌였다는 것을.
'맞아 벚꽃길이었으니 버찌가 열리겠구나'
하늘을 올려다본다. 나무가 너무 높고 크지만 약간씩 쳐진 가지들 사이로 짙은 자주색의 무르익은 버찌가 대롱대롱 매달여 있다. 멈춰야 비로소 보인다고 했던가. 온 나무에 버찌가 참으로 많다는 것을 알겠다. 가던 길을 멈추고 버찌를 딴다. 나무가 너무 높아 손이 닿는 것이 몇 개 없다.
대여섯 개를 입에 집어넣는다. 버찌 특유의 맛인 달콤하고 씁쓸한 맛이 전해진다. 예전에 사라봉에서 정신없이 따먹던 버찌보다는 맛이 덜하다. 더 오래전 일이라 그런지 그 당시의 열매가 훨씬 맛이 좋았다는 기억을 지울 수가 없다. 당시 산책 중 언덕길에서 버찌를 10여분 일행과 함께 따먹다 보니 온 손과 입이 붉게 물들었던 기억과 우리를 따라 여러 사람이 버찌 따기에 동참했던 기억이 새롭다.
버둥대며 버찌를 따먹다가 갑자기 다른 길이 생각이 났다. 산책길은 조이빌 앞에서 두 갈래로 갈라진다. 왼쪽은 조이빌이고 오른쪽은 새미 오름을 향해 계속해서 오르는 길이다. 얼마 가지 않은 중간에 복분자를 본듯하다. 평소에는 '버스'가 가자고 졸라대도 무시한 채 조이빌로 방향을 바꾸곤했지만 오늘은 내가 앞장서서 그 방향으로 향한다. 어느덧 수국이 점점 더 크기를 더해가고 산수국도 희긋희긋한 색이 보이더니 보라색 기운이 완연한 줄기들이 꽤나 늘었다. 봄이 완전히 가버렸구나. 내게 있어서 봄이 완전히 지나고 여름으로 들어서는 신호가 수국이고 한여름을 상징하는 꽃이 산수국으로 인식되어 있다 보니 계절의 변화를 실감한다.
계절의 변화는 나중에 실감하고 길가 전봇대 옆에 홀로 흐드러진 산딸기 나무 앞에 다 달았다. 아직 많지 않은 열매지만 몇몇은 농익은 게 손으로 잡는 즉시 터져 버찌로 물든 손을 더욱 빨갛게 만든다. 그래도 일단 입으로 들여보내자. 이곳저곳을 기웃거려보니 숨어있던 산딸기가 꽤나 많다. 대여섯 개를 따서 한꺼번에 입안에 톡 털어 넣으면 그 새콤달콤한 맛이 꽤나 근사하다. 다만 씨가 너무 많아 이빨 사이에 끼는 것이 귀찮기는 하지만 복분자의 맛을 마다할만한 장애요인은 아닌 셈이다. 아직까지 열매가 맺지 않은 봉우리들이 꽤나 보인다. 오늘은 여기까지 내일이나 다른 날 다시 한번 와볼 요량으로 나만의 비밀 간식 창고로 간직해둔다. 그나저나 복분자와 산딸기는 무슨 차이가 있는거지. 같은 건가 다른건가. 색으로 치면 복분자가 맞는데. 그럼 산딸기는...
집에 들어오는 입구에 물이 빠지는 철망위로 새빨간 산딸기가 흐드러지게 펼쳐져 있다. 뱀딸기가 아닌가 싶어 쳐다도 보지 않았는데 자세히 보니 낮게 깔리는 산딸기다. 이게 웬 횡재냐 싶게 나하나 강아지 하나 번갈아 가며 입에 집어넣는다. 그러다 갑자기 동네 사람들이 쳐다보면 참 처량 맞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비 오는데 강아지는 젖어있고 흰색 투명한 비닐우산을 든 주인이라는 중년의 남자는 쪼그려 산딸기를 열심히 따서는 지하나 개하나 나누고 있으니. 갑자기 하던 일을 멈추고 모르는 척 일어나 딴청을 부린다.
'버스야 그만 가자'
즐거운 채집 생활을 즐기는 기분이 지난해부터 생기기 시작했다. 엄연히 따지면 몇 년 전부터인 게 사실이기는 하다. 제주 채집의 꽃은 아무래도 고사리 채취일 테니. 올해는 두 번밖에 고사리 채취를 가지 않았지만 여전히 고사리 꺾기는 아주 유쾌하고 재미있는 년중행사 이기는 하다. 중산간 깊은 곳에 가면 지금도 시커먼 먹 고사리들이 있을 텐데. 아쉬운 예전의 기억들이 마구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지난주에는 관음사에 갔다 뒤편 높은 곳에 자리한 아미전을 오르다 갑자기 발견한 오디 덕에 한 10여분을 우걱우걱 재취 생활에 돌입한 생각이 떠오른다. 달기로 따지면 오디를 당할자가 어디 있으랴마는 생긴 것은 마지 털이 잔뜩 나 있는 벌레 같은 느낌이 들기는 해서 징그러운 부분도 있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일 뿐 맛을 보고 나면 자꾸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된다.
제주에서 매주 산행이나 걷기를 다니다 보니 나도 모르게 배워버린 채집 생활이 어느덧 봄철은 매우 중요한 일과가 되었다. 지금쯤 복분자가 여기저기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내년에는 제대로 아는 분에게 배워 산두릅과 냉이라도 제대로 재칩해볼까나. 근데 냉이는 여전히 구분이 잘 안 돼서 좀 더 많은 열매에 집중하는 한 해로 삼아보면 어떨까 싶다. 일단 올해는 복분자 시즌을 좀 더 즐겨 보고 나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