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바라보는 주말

[중산간 일기 4]

by 너구리

밤이 되어가며 습도가 높아진다. 어딘가부터 안개가 다시 올라오는 모양이다. 장마의 시작인가. 며칠 사이 오락가락하는 날씨 덕에 몸이 힘겹다. 날씨가 아니어도 호르몬 투여로 갱년기를 제대로 경험하고 있는 터인데 날씨마저 그 변덕을 그대로 반복 중이다. 갑자기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날씨가 더워서가 아니라 내 몸안의 반응이 그렇다. 갱년기 여성의 어려움을 충분히 알겠노라고 늘 아내와 이야기한다. 젠장 수술의 후유증은 별 일을 다 겪게 한다. 그게 아닌 잔잔한 날인가 싶은데 날씨가 이번에는 나에게 속삭인다. 스멀거리듯 습기가 몸을 휘어 감는다.

'이럴 때 제습기 틀어야 하는 거 아냐?'

'그래. 제습기가 있다는 걸 몰랐네'

올 초에 동네가 습할 것이기에 그리고 제주이기에 제습기가 필요하다는 논리로 사놓은 기기를 처음으로 틀었다. 조금은 시원해지는 느낌이다. 다행이다. 스멀거리던 안개마저 서서히 사라져 간다. 희뿌연 바다가 조금씩 시선 안으로 들어온다. 작심하고 줄을 맞추었다. 항구에 남아있는 배들은 모두 나온 모양이다. 수평선에 점선을 그어놓은 듯하다. 띄엄띄엄 불빛이 동에서 서로, 좌에서 우로 이어져 있다. 도심 내의 환한 불빛과 집어등의 불빛이 한데 어우러져 어디까지가 바다이고 어디가 육지인지 모르겠다.


매일 바라보는 바다가 새롭게 들어오는 것은 바다가 심하게 불빛으로 반짝이기 때문이다. 항구에 등록된 모든 배가 다 나온 모양이다. 사실 산 위에서 바다를 바라보면 넓은 면위에 점점이 제멋대로 바다가 물고기를 낚기 위한 터를 마련한 것일 테지만 그 면을 선으로 줄여놓으니 수평선에 줄을 선 게 되어 버린다.


나에게 줄을 선 것으로 보이면 되었다. 그것으로 그들은 나에게 줄을 서서 바다를 불빛을 보여주는 선의를 베풀고 있는 셈이다. 근데 난 여기서 무엇을 하며 있는 것일까. 주말이라고 벌써 8개월이 되는 시간을 보내고 매일같이 고개를 들면 바다가 눈앞에 들어오건만 그 바다가 무언가 메시지를 주고 있다던가 감동을 받거나 했던 기억이 별로 없다. '그저 바다에 배가 많구나''오늘은 그 많던 배가 없으니 쓸쓸하네'같은 무미건조한 멘트만 날릴 뿐이었다.


새롭게 말할 수 있는 것. 산 위에서 바다를 바라보면 수평선이 나보다 높게 그어져 있어 마치 물이 육지로 쏟아질 것 같다는 점. 높이 오를수록 더 많은 바다가 시야에 들어오기에 곧 지구가 둥글다는 증거이기도 하다는데 논리적으로 여전히 갸우뚱하지만 신기하기 짝이 없는 현상이기는 하다.


저녁 바다가 또 하나의 내 사색의 터전이라는 점을 갑자기 깨닫게 된 저녁. 매일 밤을 새울 수도 없을 텐데 조금씩 중산간의 생활이 바다까지 확대되는 느낌이다. 비록 바라보는 것에 불과하지만 숲과 자연에서 지내며 바다까지 내 영역으로 확대했으니 중산간의 터전이 한없이 넓어졌다. 이러다 하루 종일 자리에 앉아 바다만 바라보면 어찌할꼬. 몸은 자꾸 굳어져가고 살만 오르는데 꾀부리고 게으름 피울 핑계만 하루가 멀다 하고 늘어만 간다. 눈이 호강한다는 이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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