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너구리 Apr 26. 2016

인생사의 굴곡을 보여주는 다섯봉_좌보미오름

백약이오름의 뒷배경을 찾아 떠나다

백약이오름을 오를 때 그 뒤 멀찍이 소나무로 가득 덮여 있는 오름을 본다. 좌보미오름. 나름 유명한 이름인데 백약이 오름의 배경 역할을 한다고 하면 서글퍼하려나.


제주 동부 오름군락에는 기본적으로 유명한 오름이 널려있다. 아직 제대로 가보지 못한 곳이 너무 많다. 매번 갈 때마다 빠른 시일 내에 다시 찾아오리라 다짐하지만 그 다짐 속의 빠른 시일은 최소 한 달은 넘는 듯하다.


동부 오름 군락의 강자들은 금백조로 부군에도 줄줄이 연이어 있다. 다랑쉬나 용눈이, 높은 오름 등의 이름과 나란히 동부 쪽의 오름의 대명사 역할을 하는 아부오름과 백약이 오름이다. 배경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는 좌보미오름도 어디에서나 쉽게 언급된다. 그러나 그에 비해 찾아가는 사람들은 많아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오름을 전문적으로 다니는 사람들에게서야 좌보미오름은 수차례를 다녀왔을 오름일 테지만 간단히 대표적인 오름만 다녀보려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우선순위에 있지 않은 곳이다.

나름 유명한 이름인데 백약이 오름의 배경 역할을 한다고 하면 서글퍼하려나

바로 옆에 백약이와 아부오름이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백약이오름을 우선으로 할 것이요. 이재수의 난 촬영지인 아부오름을 우선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다. 나 역시 그 두 오름을 오르기 위해 이곳을 찾은 적이 수차례에 달하니 좌보미는 그다음 순서로 나를 불렀던 점에 그다지 이의가 없다.


그래도 언젠가는 꼭 가보리라는 생각을 하던 차였다. 제주에 오면서 기억력은 더 나빠졌으나  순간적으로 예기치 않던 생각이 떠오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마도 서울의 찌든 일상의 무게감이 덜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주말의 행보는 아침햇살의 느낌이 어떠냐에 따라 확 달라진다. 오늘도 창가에 비치는 햇볕이 아주 밝다. 어제 하루 종일 비가 내린데 비하면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순간 좌보미라는 말이 떠올랐다. 오후 느지막이 구좌에 약속이 있어 서쪽 오름을 갈 일은 아니었으므로 무조건 동부 쪽이어야 했다. 마땅히 생각나는 이름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좌보미가 나를 불렀다. 


오전 내내 빨래에 매달렸다. 무엇보다 바람에 햇볕이 좋으니 겨울이불을 정리할 시간이다. 


식사까지 마치고 나니 12시가 넘었다. 아구구...서둘러야 한다. 위치는 금백조로를 달리다 보면 백약이 다음 영주산에 닿기 전이다. 그곳까지 내달았다. 오랜만에 밝은 햇빛을 보는 기분은 주말의 좋은 흥취 중 하나다. 연신 주말의 제주는 이래야 제맛이라며 혼잣말을 하고 차를 몬다. 백약이 주차장을 지나 네비는 목적지에 도달했다는 메시지를 보낸다. 


"아차차... 내가 실수를 했구나"


네비에 오름을 쳤을 때 오름 꼭대기를 목적지로 삼으면 가장 가까운 도로변으로 내비는 차를 안내한다. 딱 이 꼴이다. 근데 오르는 길목을 잘 모른다. 지난주 단산에 갔을 때도 무리해서 간 덕에 사실 조금은 찜찜했던 기분이 남아있었다. 오늘까지 입구를 못 찾아 서성인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표선 공원묘지 주차장에 차를 대고 다시 다른 지도를 열었다. 다행히 이놈은 제대로 입구를 알려준다. 금백조로에서 2km를 더 들어가야 한다. 그래도 참 입구가 안쪽 깊숙이 있다. 

어렵게 찾은 오름 입구

나중에 다른 사람들의 블로그를 찾아보니 백약이오름 주차장 안쪽으로 들어가는 길이 더 가까운 듯 나온다. 다음에는 그곳으로 가봐야겠다. 주차장 한쪽으로 포장도로가 이어졌다고 하니 꼭 확인해 보고 싶어 졌다. 2km를 들어가자 오름의 입구를 알리는 나무 출입구가 딱 하니 서있다. 이곳이구나. 


오는 내내 이 깊숙한 중산간 길가에서 어제의 비로 고사리를 꺾으러 나온 많은 차들을 만났다. 들판 곳곳에서 고사리를 학살 중이다. 고사리 장마는 여지없이 고사리꾼들을 즐겁게 해주는 모양이다. 어제도 그랬고 주중에 비가 또 한차례 더 내린다 하니 사람들은 다음 주에도 고사리를 찾으러 온 제주섬을 찾아 헤맬 것이다. 오죽하면 고사리철에는 노동력 구하기가 쉽지 않다고 할 정도란다. 믿거나 말거나.  이 시즌을 도 차원에서 공휴일로 삼아야 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모든 도민이 고사리 찾아 삼만리를 할 수 있도록...


기세 좋게 입구에 들어섰다. 병풍처럼 좌우로 둘러친 오름들(알오름)이 둥그렇게 분화구를 감싸듯 서있다. 여기가 분화구는 아닐 터 말발굽 모양으로 한쪽이 터진 오름인 게다. 용암이 이쪽으로 흘렀을 것이다. 어느 쪽을 먼저 오를까 고민이다. 분명 오른쪽이 가까워 이곳을 먼저 올라야 겠지만 괜히 가운데로 난 편안한 길을 가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명당의 느낌을 알게 해 주는 듯 산담을 둘러친 묘지들이 오름의 언덕을 죄다 차지하고 있다. 이것도 많으니 나름 의미 있는 풍경이 되기는 한다. 남의 산소를 둘러보며 산책하는 가운데 분화구를 찾아 걷는다. 여전히 길이라는 것을 알리듯 사람의 흔적이 남아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나 혼자밖에 없으리라. 오름 입구에는 내가 타고 온 차량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병풍처럼 좌우로 둘러친 오름들(알오름)이 둥그렇게 분화구를 감싸듯 서있다

길은 여전히 봉우리로 향하지 않고 가운데의 편안한 길로 계속 이끈다. 이윽고 곳곳에 가시덤불이 보이고 어느 순간 고사리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곳에 고사리가 많구나. 알겠다. 이런 곳에 고사리 꺾으러 오는 것이로구나 그게 신기했던 나는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걷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바로 앞에 주봉의 소나무 숲이 떡하니 가로막혀 있는 것이다.  지난주가 생각이 났다. 

제주의 오름이야 바위산이 아니기 때문에  무리하면 길을 만들며 걸을 수 있다. 지금도 나름 풀을 헤치고 오른쪽으로 보이는 탐방로스러운 곳까지 가면 이전에 지나 보냈던 봉우리를 포기하고 주봉을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순간 망설임이 다가왔다. 주봉을 오르고 좌보미에 대해 내가 느낀 느낌을 기록할 수 있을까. 나는 좌보미오름을 다녀온 것일까. 꼭 모든 봉우리를 다 돌아봐야 좌보미를 왔다간 것일까. 늘 이런 일들이 고민이자 욕심과 닿아있다.

분화구 안으로 안으로...
주봉 밑의 분화가 끝 부분.
곳곳에서 발견하게된 고사리
분화구 밑에까지 들어가서 어이상 오를지 말지를 결정하게 된 순간. 가시덩쿨이 앞을 가로막았다.

망설임 끝에 시간이 걸리더라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좌보미오름의 의미는 여러 봉우리를 오르락내리락하는 점이라는 사실이 지세에서 느껴지는 바 봉우리 하나를 오르는 것은 좌보미스럽지 않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약속시간이 아슬아슬했지만 원래 시작점으로 되돌아가기로 했다. 돌아오는 길에 거리를 보니 이미 봉우리 3개를 넘을 거리를 들어와 버렸다. 맙소사... 길이 편하다고 무작정 걸어 들어온 셈이다. 아마 고사리 꺾다가 길을 잃는다는 말이 이런 것이리라. 암튼 여기야 잃어버릴 길도 아닌지라 서둘러 출발지로 향했다. 다시 오른쪽 봉우리로 방향을 틀었다. 지난주 단산처럼 무리해서 올라가지 않기로 했다.  

길이 편하다고 무작정 걸어 들어온 셈이다. 아마 고사리 꺾다가 길을 잃는다는 말이 이런 것이리라

첫 번째 봉우리를 오르는 길에 가마니가 깔려 있지만 풀들이 많이 자라고 있었다. 여기를 찾는 사람들이 다른 곳에 비해 빈도가 적다는 의미다. 첫 봉우리부터 숨이 턱에 차오른다. 아침을 부실하게 먹은 탓인지 영 낼 수 있는 힘이 부족하다. 길은 바로 소나무 숲 속으로 풍경을 숨기고 오르는 사람들 자신의 힘을 측정해 보라고 한다. 얼마나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지. 처음이니까 그렇다 치고 쉬지 않고 오른다. 더구나 분화구를 향해 가느라 시간을 많이 허비했다. 2시 30분 정도가 됐으니 한 시간 안에 이곳을 모두 돌아야 한다.  가능할까. 시간에 쫓기는 느낌이 발걸음을 더욱 재촉하게 만든다. 

첫 번째 봉우리의 정상에 올랐다. 산불감시를 위한 경계초소가 서있다. 사람은 없지만 여기도 풀들이 많은 지역이므로 산불을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 남쪽의 풍광이 눈에 들어오지만 아주 청명하지는 않다. 황사와 미세먼지가 있다고 하면 어김없이 가시거리는 짧아질 수밖에 없다. 그래도 멀리 영주산이 우뚝 서있다. 그 앞에 궁대악이니 하는 낯선 이름들의 오름들이 널부러져 있다. 다음에 가볼 곳들이다. 

수많은 묘지가 이곳이 명당임을 알게 해준다. 
다양한 오름들이 첩첩히 연이어 보인다.
왼쪽에 높게 보이는 것이 영주산이다.


두 번째 봉우리로 가는 길이 직접 보인다. 여기보다 더 높고 가파르다. 순간 힘이 빠진다. 다리는 벌써 힘들다는 신호를 보낸다. 


"에라... 모르겠다. 가보자"


아무 생각 없이 두 번째 봉우리를 오르고 보니 비로소 사방의 경치가 눈에 들어온다. 아까 보았던 영주산 쪽 풍경은 물론 높은 오름 쪽도 그렇거니와 맨 마지막 5번째 봉우리. 그 너머로 아주 자그마한 언덕처럼 이루어진 알오름들이 몽실몽실 모여있는 느낌이다. 여기가 경치 보기에 좋은 곳이구나. 수망리의 풍력발전도 눈에 확 들어온다.  이제 주봉이다. 

두번째 봉우리의 모습. 전면에 오르는 길이 보이는데 가파른 것을 보고는 걱정이 앞선다.
오른쪽이 주봉의 모습이고 전면에 보이는 것이 마지막 5번째 봉우리다.


수망리쪽 풍력발전 단지가 아닌가 싶다.
주봉을 가는 능선과 앞부분은 다섯개중 가장 낮은 세번째 알오름

"좌보미는 5개의 오름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인생사의 희로애락을 느낄 수 있다고 하는데 저 주봉이 세 번째라면 다음에 보이는 것이 마지막인데 나머지 하나는 어디 있지?"


무심코 넘겼는데 주봉으로 가기 전 야트막한 구릉 같은 봉우리를 거치게 되어있다. 


"이것이 세 번째로구나. 내 인생이 꼭 저 세 번째 봉우리마냥 인정도 받지 못한 채 그렁저렁 지나가버린 것이 아닌가"


참 오름을 다니면서도 별 생각을 다하게 된다.


주봉은 봉우리에 가기까지 옆으로 펼쳐진 산세가 매우 강한 인상을 준다. 소나무 숲은 한참을 돌면서 걷게 되어있다.  너무 울창해 뒤편의 백약이나 아부오름 쪽 모습도 볼 수 없다. 숨이 가득 찬 발걸음으로 헉헉대며 걷다 보니 정상인 듯 나무 사이로 백약이 오름이 빼꼼히 보인다.  그리고는 다시 숲.


제대로 된 정상에 약간의 뷰포인트가 분화구 안쪽으로 나아있고 그동안 걸어온 길들과 봉우리들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잠깐의 기회를 준다. 정상의 기쁨이 결코 오래지 않다는 것은 그 의미를 더욱 되새기게 만든다. 


좌보미를 걸을수록 등산스러운 분위기와 보여주는 다양한 시선이 묘한 느낌을 준다. 흔히 정상의 뷰가 별로인 오름들이 많다. 숲으로 가려진 곳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찾지 않는 오름들이 그렇다. 여기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느낌이 많이 다르다. 그리고 터가 좋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 때문인지 장소가 될 만한 곳에는 묘지가 섰다. 산담도 커다랗게 쌓아가면서.

정상의 기쁨이 결코 오래지 않다는 것은 그 의미를 더욱 되새기게 만든다

마지막 봉우리 하나가 남았다. 다행히 다섯 번째 봉우리는 숲 대신 억새풀로 덮인 곳이다. 오름의 다양한 느낌을 하나의 이름으로 제공해주니 더 정감이 간다. 주봉이 높은 탓인가 다음 봉우리까지는 한걸음에 내달을 수 있다. 주봉에 핀 진달래의 짜릿한 분홍 색깔을 잠시 가슴에 담고는 다리는 서둘러 움직인다. 마음속 스케줄에 따라 10분이 남았다. 물론 마음을 서두른다고 몸이 빨라지는 것은 아니다. 

주봉을 가기위한 숲을 걷던중 유일하게 뒷편의 오름을 볼 수 있는 전망. 멀리 보이는 것이 높은 오름이다.


주봉의 정상에서 잠깐만 볼 수 있는 전망.  왼쪽부터 두번째, 첫번째 그리고 오른쪽이 다섯번째 봉우리인 셈이다.


여기서 보니 세변째도 낮지만 오름인 것을 알겠다.
마지막 봉우리에서 쳐다본 4번째 오름인 주봉의 모습.
원래의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길목이다. 

다시 원래의 위치로 돌아오는 길. 묘지 사이로 걸음을 옮긴다. 오르락 내리락의 연속이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오름이다. 아니 걸을수록 정감이 간다. 더구나 많은 사람이 찾지 않는 한적함이 그대로 남아있어 조만간 다시 오리라 다짐한다. 나쁘지 않은 아니 매우 좋은 선택의 오름이다. 제주의 오름은 다닐수록 그 나름의 맛이 색다르다. 


아주 자극적이고 화려하지 않아도 제 맛이 다른 이곳 음식과 많이 닮았다. 


백약이오름의 배경 역할을 한다는 첫인상과 표현은 당연 취소다.

매거진의 이전글 신들의 방 영실(靈室)에는 신이 살고 있을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