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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구리 Jun 12. 2016

물찻오름_1년 만에 문을 연 사려니숲길의 목적지

설레는 기대감과 짧은 만남

사려니숲길은 이제 제주도 숲길의 대명사가 될 만큼 유명세가 크다.


그러나 그 유명세에 비해 숲의 식생을 느끼거나 감동을 주는데 결정적인 약점이 있다. 걷는 숲길 자체가 가진 핸디캡이다.


숲길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대로가 펼쳐져있고 이 길은 화산석으로 이루어진 스코리아(제주도명 송이)로 깔려있지만 군데군데 이어진 시멘트 포장길은 사람들의 숲길에 대한 기대감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무기다. 

비록 이 길의 시작이 임도였기에 차량이 다닐 수 있는 길이었지만 2009년 이후 사려니숲길을 제주도 대표 길에서 명실상부한 치명적인 길(?)로 만드는 걸림돌 역할을 한다.


숲길 자체가 이런 길로 연결되어 있다면 오죽이나 좋았으련만...

오랜만에 찾은 사려니 숲길을 걷는 중간 옆에 있는 아주머니 중 한 명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귀에 박힌다.


"이 숲이 뭐가 다른데 서울에 있는 그냥 산책 길하고 똑같잖아"


숲 전문가 입장에서 보면 반박할 구석이 아주아주 많을 테지만 경천동지 할 제주만의 새로운 숲의 이정표를 기대하고 온 그 아주머니에게는 널따란 길을 가진 다른 산책길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숲의 문외한이자 널따란 임도가 도무지 맘에 들지 않은 내가 사려니 숲길을 다시 찾은 이유는 물찻오름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1년에 딱 2주간 열리는 물찻오름과 사려니오름 가는 막힌 길.  


혹시나 늦을까 밤잠을 설치며 막상 새벽녘에 잠든 바람에 아침에서 늦게 일어나 토요일 오전. 이런저런 준비를 생략하면서 서둘러봤지만 4.3 평화공원에 도착한 시간은 이미 11시가 되어버렸다.


셔틀버스를 타고 입구에 내리자마자 달리듯 냅다 속도를 내본다. 숲길에 행사요원들과 입장객들이 잔뜩 몰려있는 모습이 나 역시 무슨 행사차 이 곳을 찾은 듯해 물찻오름까지 힘나게 걸어본다.

4.3평화공원에서 셔틀버스 대기중


거리상으로 약 5km의 거리다.  1시간 조금 넘게 걸으면 될 듯 싶다. 사려니숲은 숲 자체가 가진 다양한 모습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곳곳에 설명이 붙은 것처럼 초기 숲에서 가장 안정적인 최 극상림이 자리 잡은 숲까지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다니 숲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자세히 살펴보거나 숲해설을 들으면 좋겠지만 난 나대로 속도전이다.


그럼에도 언뜻 넘겨버리기 힘든 숲이 주는 매력을 그냥 건너뛸 수만은 없다. 


서두르거나 실망하거나 기대하거나 하는 모든 마음이 내 마음일 뿐인데 괜히 나 혼자 들었다 내려앉았다 별 행태를 다 보이고 있다. 


8회째 맞는 사려니에코힐링 행사기간중 소원지를 걸어둔 모습. 나 역시 이 것을 하고 싶어 잠시 고민했었다.

시끄럽고 많은 사람들은 앞으로 보내거나 뒤로 제치고 발걸음을 걷는다. 숲은 힐링이라 하지만 숲에서 소음으로 기분이 상하는 일은 별로 달갑지 않다. 일단 너무 많다. 사람이 많아 생각을 정리하면서 걸을 수 없다. 그냥 숲의 기분을 느낄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물찻오름 입구까지는 속도를 내면서 걷는다. 다행히 속도를 내면서 걸으니 사람 사이의 한가한 공간을 조절할 수가 있다.


집을 나설 때 하늘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는데 숲에 들어오면서부터는 조금씩  빗방울이 떨어진다. 아차 싶다. 배낭 안에 비옷이 없다. 지난번에 아들 녀석을 주고 왔다. 비옷 대용의 잠바로 놓고 왔다.


다음 순간 나 자신의 바보 같음에 스스로 웃음이 나왔다. 그냥 비 맞으면 될 일이지... 어차피 비를 맞으나 안맞으나 집에 가면 모든 옷은 빨래를 할 것이다. 햇볕 쨍쨍한 날씨로 얼굴이 타서 시뻘게지는 것에 비하면 얼마나 시원하고 좋은 날씨란 말인가.


비는 오는 듯 마는 듯 흐린 하늘에 간간히 바람만이 숲의 존재를 알려준다.

어느 구간을 지나다 보니 숲의 향기가 다른 어느 곳보다 진하다. 밑바닥에 자잘 자잘한 꽃이 떨어져 있다. 이 꽃을 본 적이 있다. 이나무의 꽃이다. 사람들이 이나무라고 하면 이 나무 저 나무 할 때 이 나무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인지 이나무에 대한 설명서에도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이 나무 저 나무 할 때의 이 나무가 아니고 나무 이름이 그냥 이 나무입니다. 잎이 돋을 때 잎자루가 빨갛고 하트 모양이라서 아름답습니다>


이나무 꽃밭을 지나고 나니 이번에는 나뭇잎들 위로 하얀색 꽃들이 피어 온 나무를 뒤덮고 있다. 마치 하늘로 바람개비를 돌리며 막 날아오를 듯하다. 혹은 나비가 날갯짓을 펄럭이기 직전의 모습도 담고 있다. 숲을 달리듯 걸으면서도 이런 모습을 그냥 놓치는 것은 옳지 않다. 


숲이 자신의 모습을 조금 보여주고 있으면 그것을 눈치채주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그러고 보니 이 나무와 이 꽃의 이름은 뭐지? 설명서를 보지 않았다. 


한참 뒤에야 알았다. 산딸나무라고 하고 이 바람개비 꽃은 산딸나무 꽃이란다. 살면서 여러 가지를 알게 된다.

나보다 훨씬 빨리 걷는 젊은 청년들도 눈에 띈다. 저 친구 역시 이 많은 사람들이 좋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비가 내린 숲이라 그런가 계곡에 물도 고여있다. 제주에서는 쉽지 않은 모습니다.  숲 속의 계곡에 물이 고여있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육지의 사람들은 계곡물이야 당연한 것이지만 건천이 대부분인 제주에서 계곡물은 아주 반가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깊은 숲 속에서 잔잔한 호수 같은 물이 있으니 말이다.


살며시 가던 길을 멈추고 길을 벗어나 계곡의 모습을 담아보기로 한다. 숲 속의 고요함이 그대로 담겨 있는 물이다. 어디로 흐를지 혹은 땅속으로 서서히 스며들지 알 수는 없으나 그 고요함이 복잡한 숲 산책을 하는 사람들 옆으로 고즈넉이 놓여 있어 더욱 맘을 빼앗긴다.

조릿대는 한라산의 식생에 어디에도 빼먹을 수 없는 조건이 되어버렸다. 이곳도 마찬가지다.

어느덧 오늘의 1차 목적지인 물찻오름 입구에 도달했다. 배도 고프고 쉬고 싶다. 쉴 자리도 없다.


힘든 몸을 이끌고 물찻오름을 빨리 오르고 싶다. 입구로 들어서니 1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서성이며 서있다. 안내원이 연유를 말해준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시간을 두고 차례대로 올려 보내고 있어요. 몇십 명 안 오리라고 생각했는데 수백 명이 몰리니 조심해야지요"


나는 물찻오름을 찾아본 방문객들이 한참이나 하산한 것을 확인한 안내원의 기다림에 잠시 서서라도 쉴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물찻오름은 탐방안내소에서 1.42km의 거리를 두고 있다. 설명대로라면 약 50분의 시간이 걸린다.


<원형 화산체로 분화구에 물이 고여서 형성된 호수인 화구호를 가지고 있다. 스코리아(송이)가 분화구 주변에 쌓이면서 원형의 화산체를 형성했다.


화구호로 인해 독특한 경관과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주소는 조천읍 교래리고 표고는 717m다. 오름의 자체 높이인 비고는 150m이다.


제주도는 현재 물찻오름을 국제적인 습지보호구역인 람사르습지에 등재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사실 분화구를 가진 오름이라고 그다지 특별할 것이야 없다. 특히 오름을 걸어 오르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경관이 더 중요한 판단의 요소가 되기도 한다.


물찻오름이야 사려니숲길을 다녀본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늘 남는 장소다. 보기 드문 호수가 있는 분화구를 가진 오름이 바로 옆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녀볼 수가 없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여기는 현재 2018년 6월 말까지 입산통제가 되어있다. 


그 이후는 나도 모르지만 순식간에 망가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계속 연장되지 않겠는가. 그러기에 오늘 같은 1년의 한 번뿐인 기간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장희빈의 사약을 만들때 썼다는 독초가 곳곳에 보인다. 이쁜 꼿이 아닌 독초이니 절대 만지지 말라고 안내원들이 신신당부하는 꽃이다. 조심해야 할 듯 ...

숲이 우거져 있는 오름은 매 한 가지지만 숲은 숲이다. 사람의 손길이 안 닿을수록 숲은 건강성을 유지하는 것은 확실하다. 


그 숲에 오늘 또 다른 위해를 가하는 것이나 아닌지...


숨을 헐떡이며 정상을 향해 가는 길이 힘겹다. 쉬지도 못했거니와 먹지도 못했으니 다리가 천근만근 무겁다. 그래도 이 길은 1년을 기다려온 길이 아니던가.


아무런 생각 없이 헐떡이는 숨을 참으며 오른 정상에 전망대가 보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막상 전망대가 구름과 안개로 가득 채워져 있으니 실망감이 없다면 거짓이다.  안내원은 이 곳에서 멋진 숲과 한라산을 볼 수 있다고 하지만 나에게는 뿌연 구름만이 앞을 가릴 뿐이다. 그래도 반갑다. 숲과 안개는 여러모로 궁합이 맞는 모양이다. 

물찻오름의 분화호 역시 이러리라는 기대를 갖고 걸을 수밖에 없다.


5분여를 내려가자 분화호를 전망할 수 있는 또 다른 전망대에 다다른다. 역시 나무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안내원 조차 전망대 위치를 잘못 잡았다며 설명을 이어간다. 


"저 아래 자세히 보시면 물이 보입니다."


물을 못 봐도 문제가 될 일도 아니다. 내가 헬렌 켈러도 아니고...


"물영아리 오름처럼 전망대가 호수 바로 옆에 있으면 좋을 텐데요."


괜스레 안내원에게 아쉬운 마음에 말을 건다. 암튼 3년 정도 이후에는 전망대를 분화호 바로 옆에 설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해 준다. 


"누군가 저기에 붕어를 방사해놔서 붕어가 무지하게  많아요. 물이 줄어들지 않으니 붕어들이 아주 잘 살고 있지요"


나름 새로운 정보다.


하산길이다. 물찻오름은 물이 차있으리라는 확신만을 가지며 나의 하산길을 채촉하고 있었다. 나중에 다시 보여줄 테니 오늘은 그만 내려가라 한다.


1년여 만의 기다림으로 찾은 물찻오름은 아쉬운 기대만을 다시 남겨주고 다음을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사려니 길의 전반부는 이것으로 끝이다. 이제는 또 다른 오름이자 목적지인 사려니 오름을 가고자 한다. 힘들어 죽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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