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그것도 큰 비가 내린다. 연 이틀 이어서 큰 비가 왔다.
이곳 동티모르는 적도 부근에 위치한 나라답게 건기와 우기 두 계절밖에 없다. 어쩌다 이곳 아이들에게 봄이라는 계절에 대해 설명해주어야 할 때가 있어서 포르투갈어(동티모르의 공용어)로 primavera라는 단어를 찾아서 말해보았다. 봄이라는 계절 자체를 알지 못하는 듯했다. 겨울이야 눈이 오는, 저 먼 나라에서 볼 수 있는, 죽기 전에 한 번은 경험해 보고 싶은 추운 계절이라고 여길지 몰라도 봄은 정말 모르는 듯했다. 결국 나도 설명을 포기했다.
동티모르의 건기는 1년 중 5~6개월 정도라고 한다. 내가 있는 로스팔로스는 기후가 좀 달라서 건기가 3~4개월 정도로 짧다고 들었다. 주동티모르 한국 대사관의 설명에 따르면 동티모르의 계절은 건기와 우기로 뚜렷하게 구분된다. 그러나 이것도 옛말이다. 기후변화로 인해 건기에도 비가 종종 내린다. 약 10년 사이 건기와 우기가 찾아오는 시기가 들쭉날쭉해졌다는 게 현지인들의 말이다.
내가 로스팔로스에 처음 도착한 건 지난 6월 중순께였다. 그때는 한창 비가 오고 있을 때였다. 수도 딜리는 이미 건기에 접어들어서 무척 더운 날씨였다지만 로스팔로스는 하루에도 큰 비가 여러 번 내리길 수차례였다. 8월 정도까지 비가 이어졌고 비가 오는 날은 무척 추웠다. 물론 한국의 겨울만큼은 아니지만 현지인들 중에는 어디서 구했는지 오리털 점퍼를 입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나 역시 어느 날은 한국에서 가져온 바람막이 자켓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는 10월까지 비가 그쳤다. 가끔 비가 오는 날도 더러 있었다. 10월 초부터인가 비가 자주 오기 시작했다. 현지인들에게 '우기가 시작되려나 보죠?' 라고 말을 꺼내면 다들 말이 다르다. 12월부터라는 사람도 있고 11월부터라는 사람도 있고 모른다는 사람도 있다. 어쨌든 어제와 오늘 몇 시간씩 큰 비가 내리는 걸 보니 우기가 가까워지긴 했나 보다.
동티모르의 비는 내가 좋아하는 한국의 가을비와는 달랐다. 우당탕 쏟아지는 그 기세가 낯설었고 도로를 마음대로 제 차지로 만들어버리는 심술궂음도 마음에 안 들었다. 비 오는 밤 침대가 더없이 축축해진다는 점도 한국의 가을비를 그립게 했다. 이곳의 비는 한국의 장맛비를 생각나게 한다. 한국의 장맛비는 군대에서 기름탱크를 관리하던 내게 행여나 탱크에 물이라도 들어갈까 걱정하게 만들던 주적이었다. 그래서 주야장천 내리는 큰 비는 지금도 반갑지가 않다. 동티모르 우기의 비는 내가 하나도 반가워하지 않던 비다. 나는 선들선들한 비가 좋았고 지금도 좋다.
그렇지만, 뜨거운 건기의 낮을 버티던 나날을 보내던 중이어서 그런지 오늘의 비는 그 무지막지한 쏟아짐에도 불구하고 무척 반갑다. 추적추적 비 오는 소리를 들으며 뜨거운 밀크티를 마실 카페 하나 없지만, 부슬부슬 비인 듯 안개인 듯 내려오는 물방울을 맞으며 걷는 산책의 선선한 느낌도 없지만 그저 정오의 어두컴컴한 창밖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는 일도 나쁘진 않다. 그리고 그렇게 멍하게 앉아서 비 내리는 소리를 듣노라면 (식상하게도!) '비와 당신'이라는 노래가 떠오른다. 가사에 담긴 슬픔과는 별개로 날씨와 어울리는 노래를 듣는 일은 더없는 행복감을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노래도 불러본다. 큰 빗소리는 내 흉측한 노랫소리를 감춰주기도 하니 오히려 다행이다.
이렇게 멍하게, 별일 없이 시간은 흐른다. 흘러서 어느새 시월도 중순이 다 지나갔다. 어떤 날은 또렷하게, 혹은 별일 있이 꾸역꾸역 시간을 보내기도 하겠지만 이런 순간이 있어 삶도 견딜만한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드는 거다. '바보 같은 나'는 또 순간에 속고 말았다. '비'와 '당신' 덕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