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영국 산책 2>를 읽고
빌 브라이슨은 ‘죽이는’ 상상을 많이 한다. 여기서 ‘죽인다’는 표현은 놀라움이나 굉장함을 나타내기 위한 관용어가 아니다. 말 그대로 사람을 죽이는 일을 말한다. 다만 상상에 그칠 뿐이다. 빌 브라이슨의 책에는 ‘나는 칼을 꺼내 들고 그 상점 주인을 찔러 죽였다. 아, 물론 상상 속에서 말이다.’라는 식의 농담이 많다. 나는 이런 농담이 좋다. 선을 넘나드는 농담이라서.
심지어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영국 산책 2(그건 그렇고 한국어판 제목을 이렇게 지을 수밖에 없었을까? 빌 브라이슨은 자신의 저서들이 한국에서 ‘최불암 시리즈’ 버금가는 ‘발칙한’ 시리즈물로 차곡차곡 번역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 심지어 ‘2’라니!)>에는 독자를 안도케 하는 저 뒷 문장이 아예 없는 경우도 있다.
“어이가 없어진 나는 한동안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고는 지팡이를 높이 치켜들어 조용히 그 여성을 내리쳐 죽였다. 그녀는 길바닥에 쓰러져 미동도 없었다. 그 여성이 입고 있던 큼직한 방수 코트를 벗겨다가 시체를 둘둘 말아 길옆 갈대가 무성한 늪에 던지니 만족스럽게도 꼬로록 소리를 내며 가라앉았다. 나는 다시 지도를 확인하고...”
이후로 이 살인사건에 대한 언급은 더 이상 없다. ‘짠! 농담이지롱. 진짠 줄 알았지!’ 식의 뒷수습 문장이 없는 거다. 여기에는 몇 가지 가능성이 있다. 1. 빌 브라이슨이 실제 살인을 저질렀거나, 2. 빌 브라이슨이 특유의 상상 유머를 발휘한 다음 그것을 부정하는 귀찮은 작업을 (고의로든 아니든) 빼먹었거나, 3. 번역자가 누락했거나. 처음에는 2번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책을 더 읽으면서 빌 브라이슨의 또라이성에 주목하다 보니 1번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마지막에 책을 덮으면서는(비유적 표현이다. 나는 요새 전자책 단말기로만 읽기 때문에 덮을 책 따윈 없다. 실은 전원 버튼을 눌렀다.) 확신했다. 3번이다!
과장 조금 보태서, 빌 브라이슨은 이 책의 5분의 1 이상은 영국 전역을 여행하며 읽은 안내문, 표지판 따위의 철자 오류, 구두점 표기 오류, 비문, 모순 등을 지적하는 데 할애하고 있다. 심지어 같은 문단 내에서도 같은 단어를 다른 철자로 표기한 안내판은 빌 브라이슨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모순적이게도 이 책이 그런 책이다. 바로 이 사실이 위 살인사건의 원인이 번역자에게 있음을 의심하게 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번역자는 Cemetery Ridge를 세메터리리지로, Iffley Turn은 이플리턴으로 표기했다. 그런데 Keith Douglas는 키스 더글라스다. 여기에 어떤 원칙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혹자는 앞 두 개는 지명이라서 붙여 쓰고 뒤에 것은 인명이라서 띄어 썼을 거라는 추측을 내놓을지 모르겠다.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래, 그 추측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여보자. 그런데 ‘피츠윌리엄(Fitzwilliam)’이었던 피츠윌리엄이 몇 페이지 후에는 ‘피츠 윌리엄’인 피츠윌리엄이 되고 만다. 또 피트리버스(Pitt Rivers) 박물관에 대한 대목에서는, “이 박물관의 이름은 아우구스투스 헨리 레인 폭스 피트 리버스(Augustus Henry Lane Fox Pitt Rivers)의 이름을 딴 것이다. 피트리버스는 역사상 가장 비열하고 쓰레기 같은 인간 중 한 명이다.”라고 쓰고 있다. 여기에 어떤 원칙이 있는지 모르겠다. 물론 이렇게 쓴 건 빌 브라이슨이 아니라 번역자다. 혹은 편집자겠지. 이도 저도 아니면 출판사 사장이든가. 내가 뭘 말하려는 건지 모르겠는가? 그럼 어쩔 수 없다. 빌 브라이슨이 느꼈을 우울을 나도 느끼는 수밖에.
좀 쪼잔해 보이지만 한 문장 안에서조차 다르게 표기한 단어도 있다. 한국말로 치면 ‘나는 찌개를 먹었는데 그 찌게는 정말 맛있었다’는 식의 표기였다. 그것도 두 군데나 있었는데, 좀 쪼잔해 보일 것도 같고 어느 대목이었는지 도무지 찾을 수 없기도 해서 그냥 그렇다는 사실만 밝혀두련다. 실은 이 책을 번역한 사람이나 편집자나 아무 잘못이 없다. 그저 원 저자가 빌 브라이슨인 책을 번역한 게 잘못이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살인사건의 진실을 번역자가 빼먹었을 거라는 것도 나의 추측에서 비롯된 농담일 뿐이다. 정말 설마 그랬겠는가. 빌 브라이슨이 진짜 살인을 저질렀을망정 말이다.
사실 나도 이 글에서 얼마나 많은 맞춤법 실수와 띄어쓰기 실수, 혹은 논리 비약 따위의 범죄를 저지를지 모른다. 혹여나 내 글에서 그런 것들이 발견된다면 그저 저자가 빌 브라이슨인 책을 읽고 어쭙잖은 글을 쓴다는 이유로 죗값을 달게 받을 각오는 되어 있다. 그리고 기승전결에 대단히 충실하게도 나의 독후감은 이것으로 끝이다. 빌 브라이슨 만세! 맞춤법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