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채식주의자>를 읽고
그녀는 놀라울 만큼 호기심이 없었고, 그 덕분에 어느 상황에서도 평정을 지킬 수 있는 것 같았다. 새로운 공간에 대한 탐색도 없었으며, 당연할 법한 감정의 표현도 없었다. 그저 자신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그녀의 내면에서는 아주 끔찍한 것,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어, 단지 그것과 일상을 병행한다는 것만으로 힘에 부친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일상에서는 호기심을 갖거나 탐색하거나 일일이 반응할 만한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은 건지도 몰랐다. 그런 짐작을 하게 되는 것은, 이따금 그녀의 눈이 단지 수동적이거나 백치스러운 담담함이 아니라 어떤 격렬함을, 동시에 그것을 자제하는 힘을 머금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한강, <채식주의자> )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었다. 어느 순간부터 고기를 먹기 거부하는 한 여자(영혜)와 그를 둘러싼 사람들 – 남편, 형부, 언니- 의 이야기다. 영혜 주변의 인물들은 ‘채식주의자’,‘몽고반점’, ‘나무 불꽃’ 이렇게 세 편의 중편소설에서 각각의 중심인물로 등장한다. 중심인물도 다르고 분위기와 문체도 상이한 세 편의 연작을 읽으며 드는 생각은 단 하나였다. 영혜는 도대체 왜 그랬을까? 무엇 때문에 그리도 처절히 육식을 거부하며 급기야는 자신이 나무에 될 거라고 말하면서 모든 음식마저 거부했던 것일까?
물론 영혜만이 아니라 모든 인물이 저마다 구멍 하나씩은 지니며 살고 있다. 말 그대로 뻥 뚫린 삶을 살고 있다. 언뜻 영혜의 남편은 그럭저럭 평범한 인물로 보인다. 우리 사회 남편의 전형 같다. 실은 그래서 그 삶이 허무하며 심지어 (상징적 의미로)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그들의 관계는 평범함 그 자체인 여자 영혜가 끼니때에만 문을 열고 나와 말없이 만들어주는 음식을 함께 먹는 게 거의 전부다. 남편은 그런 관계가 심심하면서도 만족스러웠다. 어쩌면 영혜가 육식을 거부하는 행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남편이 제공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첫 번째 연작 ‘채식주의자’를 읽으면서는 그렇게 느꼈다.
이어 나머지 두 편을 읽는 내내 영혜를 이해하려고 애썼다. 당연히 작가는 영혜를 그저 미친 사람쯤으로만 치부하지 않게끔 소설을 썼다. 단지 미친 사람이 정신 병원에 들어가서 파멸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게 아니라면 영혜의 행동을 통해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었던 거다. <채식주의자>에 관한 어떤 서평에서는 육식, 폭력 등으로 대표되는 남성성에 대항하여 채식, 비폭력 등의 여성성이 구원에 이르는 이야기라고 했다. 식물이 되고자 하는 영혜의 ‘퇴행적 진화’는 바로 남성성에 저항하고자 하는 한강의 작가 의식이라는 것이다. 나는 한강이라는 작가에 대해서 잘 모르고, 따라서 그의 작가 정신이 무엇인지 모르며 그의 다른 작품들도 잘 모르기에 이에 대해 뭐라 말할 수 없다. 다만 나는 영혜가 거부하는 것들의 확장, 즉 육식에서 시작하여 모든 음식을 거부하다가 결국에는 삶마저도 거부하는 행동에서, 그녀가 오로지 (남성성만이 아니라) 인간 되기를 거부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고 생명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거부한 것은 인간으로서 겪을 수밖에 없는 억압과 폭력과 수치, 심지어 욕망과 희망을 포함한 모든 것이었다. 한 마디로 그건 인간의 굴레였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짊어지고 태어난 원죄와도 같은 굴레.
영혜의 남편이 모든 인간이 지닌 원죄와도 같은 짐, 영혜가 어서 벗어버리려고 했던 그 짐을 아예 인식조차 못한 사람이었다면- 그래서 어쩌면 가장 평범하게 대응했을 것이다. 이혼이라는 방식으로 -, 영혜의 형부는 자신의 굴레를 벗어던지기 위해 영혜의 그것을 이용한 비겁한 자였다. 비디오 아티스트인 그는 쉽사리 구체화되지 않고 잡히지 않는 그만의 이미지들을 영혜의 몽고반점에서 찾을 수 있을 거라 직감한다. 영혜에 대한 집착은 어쩌면 예술가가 짊어지곤 하는 소위 ‘숭고’ 한 굴레였을지 모른다. 이른바 창작의 고통. 그러나 그는 바로그 창작의 고통에서 스스로 구원하기 위해 영혜의 저항과 투쟁을 이용했다. 자신의 몸을 꽃으로 꾸며 인간임을 감춘 채. 모든 것이 파국에 다다른 후 그는 죽으려 했다. 영혜처럼 삶에 맞서 저항도 하지 않고 비겁하게 피하려 했다. 아니 영혜와 그런 일이 있기 전부터 그는 비겁했다. 그는 예술가로서의 굴레만 의식했을 뿐 자신이 지녀야 할 다른 의무와 책임(결혼생활과 양육)은 회피했다. 그는 자신만의 세상에서 자신만의 구원을 추구했다. 영혜의 언니에게 먹먹한 고통을 안겨주면서 말이다.
영혜는 삶의 요령도, 기술도 없어 어린 시절부터 삶이 가하는 고통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했다. 어렸을 때 자신을 문 개가 오토바이에 매달려 끌려가며 잔인하게 죽어가는 것을 보았고 아마 그때 인간의 잔인함과 마주쳤을 것이다. 또 아버지의 손찌검에 시달린 탓에 차라리 길을 영영 잃어 집에 돌아가지 못하게 되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그 개처럼 줄에 매달려 끌려다니다 죽지 말아야지, 매 맞느니 영영 길을 잃어버려야지, 하고 생각했을 어린 시절을 거쳐 평범하기 짝이 없는 어른이 되고 나서야 영혜는 불현듯 인간 삶의 부조리함과 폭력성을 온몸으로 거부한 것이다. 다른 방법은 전혀 모른다는 듯이.
언니, 영혜의 언니. 그녀는 더 복잡하다. 그녀는 영혜와 달랐다. 그녀는 다른 방법을 알았다. 고통을 적당히 피할 줄도 알고 때로는 행복할 줄도 알았다 그러나 결국엔 삶의 무게를 끝내 벗어던지지 못한다. 영혜처럼 저항도 못하고 그 자신의 남편처럼 ‘예술적’ 일탈도 저지르지 못하면서 현실에 꾸역꾸역 매달려 살아가는 것이다. ‘오래 지나지 않아 체념할 수 있는 것들은 체념하게’ 되었고, ‘생존의 한 방식’으로 ‘성실의 관성으로 시간과 함께 모든 것을 극복’하려고 했다. 마치 우리처럼. 작품 밖 현실의 나와 당신처럼. 영혜를 보며 언니는 무엇을 느꼈을까? 영혜가 끝끝내 인간이길 거 부하 고식물로, 나무로 되돌아갔을 때(물론 작품은 구체적 결말을 말해주지 않는다) 언니는 영혜가 부러웠을까? 아니면 자신은 어떻게든 견디며 인간으로 살아남아야겠다고 다짐했을까?
앞에서 단 하나의 질문이라고 생각했던 ‘영혜는 도대체 왜 그랬을까?’는결국 다른 질문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영혜의 언니는 도대체 왜 ‘그러지’ 않았을까? 삶이 그토록 고통스러움에도 왜 영혜처럼 거부하지 못했나? 영혜를 거쳐 영혜의 언니를 향했던 질문은 모습을 바꾸어 다시 나에게로 돌아온다.
<채식주의자>의 마지막 소설 ‘나무 불꽃’이 집요하게 언니의 심리를 파고든다. 언니의 시선과 상념을 통해 영혜와 영혜의 남편, 자신의 남편 사이에 있었던 일을 보여준다. 하여 세 연작을 관통하며 <채식주의자>는 내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자, 삶은 이렇게 고통스러워. 인간으로 사는 일은 이토록 불행한 일이야. 고기를 먹어야 하고 생명을 죽이며 살아야 하지. 영혜는 그걸 거부했어. 아니면 영혜의 남편 혹은 언니의 남편처럼 자신과 타인의 감정을 무심히 삼켜버린 채 살거나. 그럴 때 당신은 어떻게 할 거지? 영혜를 봐. 인간으로 사는 일의 부조리함을 문득 깨달아 온 몸으로, 온 생명으로 인간이 길 거부하는 삶이 있어. 그녀의 남편을 봐. 그 부조리함이 어떤 의미인지, 과연 존재하는지도 모른 채 사는 사람이 있어. 그녀의 형부를 봐. 예술로 그 자신의 굴레를 벗어던지려 했지만 결국 자신의 욕망을 비겁하게 충족하는 데 지나지 않았던 사람이 있어. 그녀의 언니, 인혜를 봐. 이 모든 일들을 지켜보며 견디며 그저 살아가는 사람이 있어. 자, 당신은 어떻게 할 거지? 영혜? 남편? 형부? 언니? 당신은 누구지?
우리는 결코 영혜가 될 수 없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임을 거부하라고? 그럴 수 없다. 영혜는 스스로 구원했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저 남편 아니면 형부 아니면 언니에 가까울 것이라 짐작해본다. 그러나 내가 읽은 바 <채식주의자>는 거기서 더 나아가 그 소설을 읽는 우리 모두가 영혜의 언니와 다름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당신이 할 일은 책장을 덮은 후 아직 살아가야 할 남은 인생을 똑같이 더 살아가는 일뿐이다. 이는 서늘한 선고이자 위로이기도 하다. 당신은 평생 이 감옥에서 살아야 해, 다행인 건 우리 모두가 그렇다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