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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k Feb 12. 2017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선 거인

최윤필, <가만한 당신>을 읽고

   

 자신의 삶을 누군가 기억해준다면, 그건 성공한 삶일까? 우린 어렸을 때부터 이런 속담을 듣고 자라왔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필시 이 말을 들려주는 사람의 의도는 이런 것일 테다. 금수와 같이 가죽 떼기만 남기는 사람이 되지 말고 네 명예를 드높이고 죽으라, 그게 사람의 도리다. 그런데 나는 늘 의아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이름을 남기라는 것일까? 죽고 난 다음 내 이름이 회자된들 죽은 후에는 알 도리가 없지 않나. 부질없이 드높아진 내 이름보다 호랑이 가죽 한 장이 추위에 떠는 이에게는 더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면 너무 삐딱한 유년시절을 보낸 것이려나.


 <가만한 당신: 뜨겁게 우리를 흔든, 가만한 서른다섯 명의 부고>에는 서른다섯 개의 이름이 있다. 그다지 유명하지도 않지만 또 그렇다고 이름을 남기지 않은 건 아닌 사람들이다. 이 책은 기자인 저자가 외신 부고를 읽고 끌리는 이들을 골라 신문 지면에 소개한 글들을 엮어낸 책이다. 모두 해외 인물이며 일부러 국내에 잘 알려진 이들을 피했다고 한다.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해도 외신에서 부고로 그의 죽음을 따로 알릴만한 삶을 산 사람들이다. 과연 죽음을 기사로 알릴만한 삶이란 어떤 삶일까 궁금했다.


 첫 번째 등장하는 인물은 콩고 출신의 레베카 마시카 카추바. 콩고 전쟁 중 강간당한 여성, 고아, 사생아들을 거둬 치료하고 돌본, 그 자신도 성폭력 피해자였던 여성이다. 심지어 그는 여성 자활 공동체를 구축하고 콩고의 ‘마마’로 불리며 어느 정도 이름을 알린 후에도 세 차례나 더 집단 강간을 당했다. 강간 사실을 고발한 데 대한 보복이었다. 그러고도 포기하지 않고 성폭력 피해여성들을 위해 일했다. 그는 그렇게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며 희망을 남기고는 말라리아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정녕 가치 있는 삶이고 기려야할 삶이다. 모든 사람이 주저 없이 말할 수 있으리라.


 한편 책에는 이런 삶도 나온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에서 여성 노동자의 모델이자 상징이 된 메리 도일 키프의 삶이다. 그는 <리벳공 로시>라는 그림의 모델이었다. 작업복 차림의 건장한 여성의 모습으로 그려져 전시에 더 많은 여성 노동력을 동원하기 위한 홍보물과 포스터에 실리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고 한다. <리벳공 로시>는 여성 노동기회 신장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 그림 한 점이 여성운동을 폭발적으로 신장시켰다고 할 수는 없지만 여성의 노동기회 증가가 이후 펼쳐진 여성운동의 에너지원이 됐다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정작 키프는 리벳공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 생김새도 적잖이 다르게 그려졌다. 실제 키프는 날씬한 편이었으나 그림에는 우람하고 강인하게 묘사되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마저도 여성을 대상화한 것이다. 단지 남성의 필요에 따라 이상적 여성상을 달리해 온 것일 뿐. 이렇게 보면 키프의 삶은 콩고에서 처절한 삶을 살다간 카추바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여성 운동의 에너지원이 된 그림의 모델이었지만 이를 계기로 여성 운동에 투신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그렇다고 키프가 남긴 이름은 카추바와 비교하여 아무 의미없이 떨어진 이름일까? 


 <가만한 당신>에서는 이외에도 많은 이름이 저자의 글을 빌려 자신의 삶을 말하고 있다. 수형자 인권 증진을 위해 노력한 변호사, 호주의 원주민 백인화 정책 결과로 원주민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다가 탈출해 1,600km를 걸어간 소녀, 윙슈트 하나로 하늘을 날길 꿈꾸다 추락사한 모험가 등등. 어떤 이름은 불의와 모순에 맞서 싸우다 떨쳐진 이름이고, 어떤 이름은 사회 구조가 강요한 개인의 불운 때문에 회자된 이름이며, 또 어떤 이름은 자신의 욕구와 소망을 부지런히 따르다 널리 알려진 이름이다. 이 이름들에 얽힌 모든 죽음이 비장한 것도 아니다. 평범한 삶 끝에 평범한 죽음으로 알려진 이들도 있다. 불굴의 투쟁 끝에 맞이한 죽음만이 기려야할 죽음이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나는 특별하면서도 평범한 이 이름들에서 하나의 공통점을 보았다. 콩고의 카추바에서 미국의 키프에 이르기까지 그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이미지가 있다. 그것은 불의에 맞선 투쟁도 아니요,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안락한 삶도 아니고, 비장미 넘치는 극적인 죽음도 아니다. 바로 ‘거인’이다. 실은 아프리카의 여성 할례 반대 운동을 이끈 에푸아 도케누에게 바쳐진 헌사다. “그녀는 거인이었고, 우리는 지금 그녀의 어깨 위에 서 있을 뿐이다.” 원래 뉴턴의 경구로 알려진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탄 난쟁이’는 출처를 알기 힘들 정도로 오래전부터 유럽에서 전해 내려오던 말이라고 한다. 지금 이 시대의 사람들이 적어도 백 년 전의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보는 이유는 우리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도케누를 통해 여성 할례가 얼마나 끔찍한지 알게 되었고 그것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기를 바라게 되었다. 우리는 도케누의 어깨에 올라탄 난쟁이인 셈이다. 그러나 비단 도케누와 같이 족적을 남긴 삶만 거인은 아니다. 앞서 말한, 메리 도일 키프의 삶조차도 거인으로서 그 어깨를 빌려준다. 비록 남성 중심의 성적 대상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미지에 불과한 <리벳공 로시>이지만, 그리고 키프 자신은 그 그림의 모델이라는 사실 외에는 여성 운동에 기여한 바가 없었지만 <리벳공 로시>의 키프가 있었기에 미국의 일하는 여성상이 탄생했고, 일하는 여성이라는 거인의 어깨를 딛고 더 진보한 여성 운동이 등장했다. 여기에 실린 35명 모두가 그랬듯이, 키프는 자기도 모르게 거인의 어깨가 된 것이다.


 내가 던졌던 첫 질문을 다시 불러와본다. ‘자신의 삶을 누군가 기억해준다면, 그건 성공한 삶일까?’ 아직 모르겠다. 그렇다면 다음 세대의 ‘거인’이 되는 삶은 성공한 삶일까? 그것도 모르겠다. 성공한 삶이 꼭 필요한 것인지 모르겠어서다. 하지만 내가 ‘호랑이 가죽, 사람 이름’ 속담을 듣고 떠올렸던 생각, 부질없는 이름보다는 따뜻함을 주는 가죽을 남기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했던 고민에는 다소간 정정이 필요하다. 가죽이 되는 것도 좋지만, 사람의 가죽은 따뜻한 옷으로는 영 별로다.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이 이름을 남길 수밖에 없고, 이왕 무엇이라도 남긴다면 부질없이 유명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거인의 어깨가 되어야 한다. 이왕이면 반면교사보다는 정면교사가 좋겠다. 그리 높지 않아도 좋으니 모두가 올라탈 수 있는 단단한 어깨가 되자. 더 높은 어깨를 향한 작은 디딤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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