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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k Apr 05. 2017

[동티모르 이야기] 내 믿음을 시험할 권리

동티모르 초등학교 시험을 지켜보며

* 동티모르 로스팔로스에 있는 한 초등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동티모르에서 살며 떠오르는 생각을 가끔 끄적입니다.  


이번 주는 시험기간이다.  1년에 총 3학기 중 첫 번째 학기가 끝나면서 기말고사를 보는 셈이다. 4일 동안 하루에 한 두 과목씩 시험을 보고 있다. 오늘은 Estudo do Meido(과학과 사회를 합쳐서 이르는 말인 듯)와 Religião(종교) 과목 시험이 있는 날이었다. 그런데 오늘 학교에 가니 아침부터 처음 보는 현지인 두세 명이 와서 선생님들과 뭔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Fataluku어인지 Tetun어인지 확실친 않았지만 계속해서 들리는 단어가 있었다. 바로 '제호바'였다.  


그 사람들이 가고 난 후 옆자리 선생님에게 물어보니 아까 온 사람들은 '제호바' 사람들이라고 했다. 제호바들은 종교가 가톨릭이 아니기 때문에 제호바 학생들은 종교 시험을 따로 보게 했다는 것이다.


제호바? 제호바? 아, 여호와의 증인!


생각해보니 우리 바로 옆 집이 호주에서 온 여호와의 증인 선교사들의 집이었다. 일요일이면 예배드리는 소리가 꽤 크게 나곤 했었는데 우리 학교에도 신자가 있었나 보다.


종교 시험 시간이 되자 과연 그 사람들이 다시 와서 종이 몇 장을 주고 갔다.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에 따라 작성된 별도의 종교 시험지였다. 마침 내가 들어갈 반에도 여호와의 증인인 학생이 있어서 나도 그 시험지를 받아 들었다.


사실 동티모르는 국민 대다수가 가톨릭 신자인 나라다. 통계에 따라 다르지만 93%에서 98%가 가톨릭이다. 앞서 말했듯이 학교에는 종교 과목이 있는데 이 과목은 종교 일반에 관한 과목이 아니라 가톨릭 교리 과목이다(그래서 시험 문제도 이런 식으로 나온다. '죄 많은 사람은 죽어서 어딜 가는가? 1) 지옥 2) 천국 3) 연옥 4) 다른 세상'). 마을 성당에 행사가 있으면 학교 수업을 전폐하고 학생들을 동원할 정도의 가톨릭 사회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의외로 종교 다양성의 정도가 높기도 하다. 이슬람을 종교로 가진 사람의 비율이 1% 남짓임에도 마을 곳곳에 모스크가 있다. 시간 맞춰 부르는 '아잔' 소리도 무척 우렁차다. 이슬람교인의 비율에 비해볼 때 대단히 당당하다. 이슬람 사원은 인도네시아 지배 시절의 흔적이기도 하겠으나 정작 티모르 사람들은 독립 후에도 이를 개의치 않아하는 듯하다.


게다가 인구가 3만 남짓한 로스팔로스에도 가톨릭, 이슬람은 물론이고 프로테스탄트(개신교), 여호와의 증인, 제7일 안식교까지 있다. 다들 드러내 놓고 신앙생활을 한다. 적어도 내 주변의 티모르 사람들에게선 다른 종교를 비난하거나 무시하는 발언을 들어본 적이 없다.


이러한 배경에서 여호와의 증인 교인들이 별도로 시험을 보게 해달라는 요구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수락된 듯하다. 내 기억으로는 작년 시험 때는 이런 일이 없었다. 제도적으로 종교가 다른 학생은 종교 과목 시험을 따로 보도록 보장된 건 아닌 듯하고, 다만 이번에 여호와의 증인 교인들의 별도 요구가 있어서 그렇게 한 게 아닌가 싶다. 혹은 올해부터 교육과정이 바뀌면서 타 종교를 배려하게 된 것 같기도 하고. 정확한 내막은 잘 모르지만, 어쨌든 저 소수종교를 지닌 이들의 요구에 아무도 불쾌한 내색을 안 하는 것 보면 아주 새로운 일은 아닌 듯싶었다.


나는 내심 그 학생만 다른 시험지로 시험을 보게 할 때 다른 가톨릭 학생들이 놀리거나 야유하지 않을까 해서 걱정했는데, 그런 일은 없었다. 오히려 재밌었던 일은, 그 반에 여호와의 증인 외에도 개신교인인 학생이 한 명 있었던 모양이다. 개신교인인 그 학생은 가만히 있는데 오히려 다른 학생들이 '우리 반에 개신교인도 한 명 있어요! 걔도 시험 따로 봐야죠!'하는 거다. 그런데 개신교 교회에서는 따로 시험지를 준비하지 않아서 별도의 시험을 보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교장이 그 학생은 시험을 보지 않게 하고 그냥 집에 가게 했다. 개신교인이므로 가톨릭 교리 시험을 보게 할 수 없다는 거다.


평가는 어떻게 할지 나 몰라라 하고 그냥 집에 보낸 건 매우 동티모르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한국이었으면 억지로 일단 보게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새삼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맥락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2009년 즈음의 일제고사 시행 논란이 떠오르기도 했다.


우리는 흔히 개도국을 떠올릴 때 독재, 가난, 질병, 게으름, 종족 갈등, 종교 갈등과 같은 일부 현상에만 집중하고 각각의 나라들이 지닌 다양성의 양상을 놓치기 쉽다. 분명 어떤 면에선 동티모르가 한국보다 나은 점이 있다. 재정적으로나 행정적으로나 사실 공립학교나 다름없는 한국의 사립고등학교에서 재단이 종교재단이라는 이유로 학생들에게 종교 행사를 강요했고 지금도 강요하고 있는 상황을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되리라.


이렇게 한 달에 한 번쯤은 동티모르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 참, 여호와의 증인 시험지에서 인상적이었던 문제 하나. 
문: 하나님(maromak)의 이름은 무엇인가? 
답: Gehova. 여호와

여호와의 증인의 정체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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