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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k Jul 27. 2016

[동티모르 이야기] 체벌에 관하여

혹은 '비체벌'에 관하여

동티모르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몇 가지 생경한 장면들이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현지 선생님들의 체벌이다. 여기선 체벌을 아주 당연하게 여긴다. 다른 학부모가 보는 앞에서 머리를 때리거나 엉덩이를 발로 찰 정도다. 그렇지만 화를 내진 않는다. 때리는 동작 자체는 무척 화가 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동작인데도 때리고 나서 아이랑 웃으며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다. 맞은 아이도 웃으면서 죄송하다고 하고 만다. 체벌을 하지 않는 나에게 선생님들은 “baku!”라는 말을 자주 한다. 때리라는 뜻이다. 그래도 나는 비체벌주의자를 자부하고 있어서 결코 때리지 않으리라 다짐을 하곤 한다. 내가 체벌을 하지 않는 이유는 거창한 게 아니다. 그저 아이들을 짐승처럼 다루는 게 싫다. 흔히 개 패듯 팬다고 말하는 까닭은 폭력을 통해 개를 길들이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때리는 건 아이들을 개 취급하는 것과 다름없다. 체벌의 작동 기제는 공포심이다. 공포심을 불러일으켜서 행동을 금지하는 것이다. 마치 개에게 하듯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체벌이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는 주장에 아예 공감을 못하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 체벌이 아무렇지도 않게 이루어지던 시절에 학교를 다녔고 체벌 때문에 인생을 망치지도 않았다(물론 인생 망친 몇몇 사례는 그때도 있었다). 체벌 금지 논란이 한창일 때 교육부(인지 교육청인지) 규격 ‘사랑의 매’가 등장했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 체벌 옹호론자들은 감정적이지 않고 일관성 있게 실시하는 체벌은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정말로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체벌도 아주 나쁜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렇게 되지만은 않는다는 점이다. 체벌을 해야 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는 것은 상황이 아주 나쁘다는 뜻이다. 학생과 교사 모두 감정이 격해져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상황에서‘감정이 섞이지 않은 일관성 있는 체벌’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되뇌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때리지는 말자고.


그렇지만 체벌을 하지 않는 교사라고 해서 화가 나지 않는 것도 아니요, 속에서 끓어오르는 화를 숨기고만 있는 것도 아니다. 아이들은 1년에 한 번에서 198번(연간 법정수업일수와 일치)은 화를 내게 만든다. 아이들이 반드시 나빠서가 아니라 교사와 학생 사이에서 불가피한 일이다(이런 부정적인 교사-학생 관계를 대결구도라고 지칭하고 이를 극복해야 진정한 교육이 이루어진다는 학급경영이론이 있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안다. 그렇지만 언제나 말은 쉽다). 그래도 때릴 수는 없다. 때린다는 것은 공포심을 조장해서 억지로 말을 듣게 하는 통제 수단 그 이상, 이하도 아니기에.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종종 화가 난다. 자기에게 잘못을 지적했다는 이유로 교사에게 ‘지랄, 씨발 새끼가’라고 하는 학생을 눈 앞에 보고도 화가 안 나는 선생님은 바로 조퇴해서 병원에 가봐야 한다. 사람이라면 화가 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화를 표출한다. 그래도 때리지는 않는다. 다만 화가 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뿐이다. 다시 한 번 속으로 다짐한다. 절대 때리지 않는다. 난 단지 화를 내고 있을 뿐이다.


내가 늘 이래 왔다. 조금이라도 아이들과 세대 차이가 덜 나는 젊은 교사로서 아이들의 욕구를 이해하려고 했다. 웬만한 일은 대화를 통해 합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고 따라서 당연히 체벌은 스스로 금지했다. 그래도 화가 날 때는 어쩔 수 없다. 그래서 때리지는 않아도 화는 낸다. 그런데 어린이들에게 성인 남성의 분노는 어떻게 느껴질까? 우리 반 아이들이 늘 내게 하던 말이 있다. 평소에는 내가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은데(좋다고는 절대 안 한다), 내가 화를 낼 때면 너무 무서워서 싫어진다고. ‘제발’ 화내면서 소리 좀 지르지 말아달라고. 그때는 “그렇게 무서우면 말을 좀 듣든가!”라고 대꾸했다. 그런데 여기 와서 한 발짝 물러나 생각해보니 그게 곧 체벌이었다. 나는 아이들의 몸을 떄린 대신에 마음을 때리고 쑤시고 후벼온 것이다. 개는 말을 못 알아들으니 인간이 화를 낸들 마음에 상처를 받지 않을지 모르지만 인간은 다른 인간에게 상처를 받는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적극 이용해왔다. 교육적 훈계라는 아주 아름다운 이름 아래. ‘상처받기 싫으면 내 말 들어!’


주변에 이런 이야기를 종종 털어놓으면 몇몇 ‘전문가’ 선생님들은 늘 이렇게 말했다. 원칙과 일관성 있는 규칙 적용이 필요하다고. 교사의 감정을 그대로 표출하기보다는 ‘나-메시지’ 등을 통해서 대화로 교사의 감정을 알려주고 아동의 욕구를 파악해서 욕구에 대한 허용과 비허용의 기준을 명확하게 알려주라고. 내가 그래서 늘 말하고 다닌다. 말은 쉽다고. 좀 억지 섞어서 말하면 자신의 분노를 조절하지 못한데서 뒤따르는 죄책감을 무시할 줄 아는 미덕이 교사에게 꼭 필요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론 제일 좋은 건 분노를 조절할 줄 아는 일이겠지만. 어쨌든 나는 그런 미덕이 없었고 지금도 없다. 실은 전부터 알고 있었다. 내 화가 아이들에게 상처를 준다는 사실 말이다. 어느 날은 아이들에게 미친 듯이 화를 내고 수업이 끝난 후 교실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가까스로 감정을 거둬들여보니 교실 한 구석에는 이성을 잃은 한 마리 짐승이 씩씩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래서 뭘 어쩌자는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글쎄, 그저 동티모르에 ‘만연’한 체벌 행위들을 볼 때마다 ‘선진교육강국’에서 온 외국인 선생님의 ‘비체벌부심’이 우스워졌을 뿐이다. 진짜 만연했던 건 무엇이고 누구의 마음에서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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