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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k May 23. 2017

딜리에서 키토까지 공항인상기 #2

자유를 만끽하는 타인을 관찰할 자유 - 발리 응우라라이 공항

발리 시내에 머무른 건 단 한 시간 남짓. 시내에 머무른 이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자유로운 영혼들을 내 생애 가장 많이 보았다. 그리고 그 영혼들은 대개 갓 탄 콧등과 어깨를 과시하며 발리 골목을 활보하고 있었다.     


발리 공항에서 다음 비행기를 타기까지 다섯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그런데 입국 심사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원래 계획은 발리 시내를 두 시간 정도 정처 없이 둘러보는 거였는데, 공항이 예상 외로 번잡해서 다음 비행기 체크인 시간도 넉넉하게 잡을 필요가 있었다. 결국 시내 체류 일정을 한 시간으로 줄일 수밖에 없었다.  

   

택시를 타고 디스커버리몰이란 데를 갔다. 발리 시내도 꽤 복잡하고 넓은 듯해서 어딜 콕 집어서 가달라고 하기가 애매했다. 그래서 유명한 대형쇼핑몰을 골랐다. 다행히 몰 바로 옆에 해변이 있었다. 꾸따 비치라는 곳이었다. 꽤 넓은 해변이었고 물은 무척 깨끗했다. 사람이 바글바글하지도 않았다. 주변 경관은 깔끔했다. 무엇보다 동티모르와는 달리 쓰레기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해변 경치를 즐기기엔 내게 시간이 너무 없었다. 그 날의 마지막 남은 빛을 다 털어내는 듯한 늦은 오후의 강렬한 햇살을 눈에 담고는 해변에서 나왔다.     


다시 쇼핑몰을 거쳐 반대편으로 나와 이번엔 골목을 걸었다. 도로변엔 테라스를 갖춘 식당들이 즐비했다. 마치 한국의 홍대나 대학로의 거리를 보는 듯했다. 그러다 작은 잡화점 거리가 나왔다가 다시 식당들이 나왔다가 이번엔 호텔, 다시 작은 잡화점들. 어딜 가나 관광객을 위한 곳이었다. 작은 골목에 들어가도, 아무리 외진 골목엘 들어가도 끝자락엔 결국 호텔이 나왔다. 이보다 더 관광친화적일 수 없는 곳이었다. 내가 본 발리는 그랬다.  

   

물론 내가 돌아본 꾸따가 발리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안다. 디지털 노마드니 디지털 구루니 하는 이들에게 핫하다는 발리 북부의 우붓이라는 곳의 분위기는 또 다르다는 걸 들어 알고 있다. 그러나 우붓에 가지 않아도, 상업관광지의 절정으로 보이는 꾸따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발리만의 분위기가 있었다. 그것은 자유였다. 진정 나는 발리에서 자유를 보았다. 나와 상관없는 타인의 자유를.     


갓 탄 콧등과 어깨가 둥실둥실 떠다니던 발리의 거리에서 자유를 만끽하는 자의 여유, 혹은 여유를 만끽하는 자의 자유를 느꼈다. 흥미롭게도 단체관광 위주의 중국인 관광객과 주로 커플 여행객인 한국인 관광객들에게선 별로 보이지 않던 인상이었다. 그런 걸 어떻게 아냐고? 표정이 보여준다. 자기들끼리 신나게 떠들던 단체 관광객들에게선 웃기고 재미있다는 표정이 보였고 커플 관광객에게선 사랑 또는 권태의 표정이 엿보였지만 갓 탄 콧등과 어깨를 드러내고 다니던 이들의 표정에선 그야말로 순간을 즐기고 있는 자유로움이 보였다.      


나는 여행을 즐기는 자세가 중요하다, 따위의 말을 하고 싶지 않다. 여유와 자유를 만끽하는 여행을 하는 데 물질적, 시간적 조건은 매우 중요하다. 내가 목격했던, 자유를 만끽하던 사람들이 그렇지 않아 보이던 사람들보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울 가능성이 높다. 이건 불편한 진실도 못 되는 당연한 사실이다. 대체로 그런 여유가 있기 힘들 뿐 아니라 있다 해도 남들에게 과시하기 바쁜 한국 사회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나는 그저 구경하는 입장에서, 자신의 순간을 충분히 즐기는, 그러면서 과시하거나 뽐내지 않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행복했다. 비록 그들의 눈에는 내가 여행 스케줄에 쫓겨 허겁지겁 거리를 배회하는 관광객으로 보였을지라도 말이다.  


물론 발리의 외국인 관광객은 모두 물질적 풍족함을 적절히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고 한국인은 돈과 시간에 쪼들려 다니기만 한다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내가 고작 1시간 동안 발리의 모든 것을 관찰했을리도 없다. 내가 보지 못한 장면과 느끼지 못한 감정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발리가 내게 남긴 인상은 순간을 즐기는 사람들이 뿜어내는 행복감으로 채워져 있다. 그 사람들이 어느 나라 관광객인지는 상관없다. 혹은 돈 많은 자들의 여유일 뿐이라고 불편해해도 상관없다. 나로서는 그곳을 활보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게 행복한 표정과 몸짓을 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예외적이고 특별한 경험일 따름이다.     


     



다시 공항에 돌아가 체크인.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면세구역에 들어왔다. 출국도장을 찍어야만 들어올 수 있는 이곳은 어느 나라도 아닌 곳이다. 이제 첫 번째 경유지를 벗어나는 것뿐인데 꼭 서너 번째인 듯 익숙하다. 이 익숙함은 낯섦의 익숙함이다. 비행기에서 내릴 때마다 혹은 탈 때마다 새로운 공항에 들어서지만 그 본질은 같다. 티켓 있는 자에게만 허락된 구역. 이곳에 들어온 이상 공항의 물리적 위치는 의미 없다. 출국 도장을 찍고 이곳에 발을 들인 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이 나라를 벗어났다. 나는 이미 하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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