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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k May 30. 2017

딜리에서 키토까지 공항인상기 #3

온 세상을 품은 거대함 - 싱가포르 창이공항

싱가포르 창이 공항. 1년 전 한국에서 동티모르로 처음 올 때 싱가포르 창이 공항을 경유했다. 그때는 일행이 있기도 했고 짐도 많아서 공항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얼마 없었다. 단지 무척 크다는 생각을 했다.      


이번엔 딜리에서 키토까지 가는 여정 중 세 번째로 싱가포르 창이 공항에 들렀다. 싱가포르에 도착한 건 밤 10시 40분, 터미널3로 내렸다. 그리고 프랑크푸르트행 비행기의 탑승시각은 터미널 2에서 11시. 촉박한 환승시간(물론 실제로는 그다지 촉박하지 않았다. 실제 이륙 시간은 11시 40분인데다가 탑승권에 기재된 시각을 그대로 지켰을 때 돌아오는 보상은 긴 줄 뒤에서 기다리면서 길러지는 인내심뿐이다) 때문에 그저 공항을 자세히 둘러볼 여유도 없이 오로지 전진했다. 터미널 2 E08 게이트를 향해서.      


터미널3에서 터미널2에 가기 위해선 무려 트레인을 두 번 타야했다. 새삼 다시 느낀다. 이 공항 참 넓구나. 어떤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는 것이 아닌, 하나의 시설 안에서 각 구역을 이동하기 위한 트레인이 있다는 것이 묘하게 느껴졌다. 트레인을 타고 다른 터미널로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정작 그리 길지 않다. 그러나 이 트레인이 없다면 결코 제 시간에 다음 비행기에 오르지 못할 것이다. 오직 공항에서만 가능한 교통수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항 내 터미널을 연결하는 트레인을 타니 어렸을 때 읽은 만화책 하나가 생각난다. 바로 <공태랑 나가신다>라는 일본의 청춘액션만화다. 만화가 당연히 그렇듯이 이 만화에도 현실성 없는 이야기가 넘쳐나지만 어떤 비현실적 설정 가운데서도 내가 제일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건, 만화의 배경이 되는 고등학교 안에 모노레일이 있다는 설정이었다. 공업고등학교 실습용 모노레일 따위가 아니라 실제 학교 내 구역을 이동하기 위한 모노레일이다. 학교가 너무 커서 모노레일을 타야만 하는 거였다.      


만화 속 학교가 얼마나 크냐면 교내의 어떤 구역은 학교 본관과 너무 멀리 떨어져있어 교칙의 강제력이 전혀 미치지 못한다. 그 구역에서는 학생 갱단이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을 뿐더러 심지어 갱단에 의해 그곳을 지나는 모노레일이 탈취 당하기도 한다. 세상에, 이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런데 나는 이 황당한 설정에 그만 매료됐다. 대책 없는 스케일이 맘에 들었다.     


<장자>에 곤이라는 물고기가 나온다고 한다. 나로서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이미 엄청나게 큰 그 물고기는 엄청나게 큰 새인 대붕이 되어 남녘 바다로 날아간다. 그 생물의 어마어마한 크기를 묘사하는 대목이 입시 때 응시한 대학의 논술고사에 나왔다. 그 지문을 보며 잠깐 딴 생각을 했다. 대붕의 크기를 헤아려 보았다. 논술고사에서 지문이 묘사하는 장면을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일은 쓸데없는 짓이다. 문제가 요구하는 것을 잘 파악한 후 제시된 지문에 의거하여 자신의 논지를 펼쳐나가야 할 시간도 모자를 판이었지만 그토록 거대한 생물체를 나는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책 없이 큰 사물 혹은 개념이나 긴 시간 등을 묘사하는 글을 읽을 때 나는 아득해진다. 불교에서는 억겁이 얼마나 긴 세월인지 숨이 턱 막히도록 이해할 수 있게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엄청나게 커다란 바위를 선녀의 옷으로 100년에 한 번 쓸어서 바위가 모두 닳아 없어지는 데 걸리는 시간을 1겁이라 한다지 않은가. 그게 1억 번 반복되는 게 억겁이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그 수를 일일이 세고 싶은 충동마저 든다. 그리고 상상해본다. 만약 내가 1억겁만큼의 시간 동안 죽지 않고 살아야만 한다면, 나는 끝내 어떤 존재가 될까. 그러면 이내 현기증이 난다. 이 현기증 반응에 중독성이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싱가포르 창이공항이 날 사로잡은 건 대붕과 억겁에 비견할 만한 거대함이었다. 트레인을 두 번 갈아타고 터미널 2에 내리고도 탑승 게이트는 반대편 가장 멀리 있었다. 약 19분을 걸어야 한다고 표지판이 친절히 알려줬다. 19분을 걸어가는 동안 수없이 많은 게이트를 지나쳤다. 각 게이트는 적어도 네다섯 군데의 목적지를 위한 것일 테고 각 비행기 수백 명의 승객을 목적지로 데려다준다. 각 승객은 자신의 목적지에서 동료를 만나고 가족을 만난다. 따라서 게이트 너머에 수없이 많은 인연이 있다. 수천, 수만의 인연을 가능하게 하는 게이트 하나를 지나칠 때마다 억겁만큼의 시간과 대붕의 크기가 떠오른다. 창이 공항이 연결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 하나 하나를 직접 들려주려면 필시 억겁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고, 그것을 글로 써서 넓은 대지에 펼쳐놓는다면 대붕의 크기를 필적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공항이 좋다. 그곳에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어서다. 창이공항과 같은 허브공항이 그렇게 클 수밖에 없는 건 이 세상에 비행기를 타고 이동해야만 하는 저마다의 사연이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공항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겐 모두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다. 이 사람들은 저마다의 목적지에서 다시 또 다른 이야기들을 만들어낼 것이다. 사람들의 이야기와 사연을 나는 다 알지 못한다. 알아야 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이야기들은 어떤 형태로든 나에게 나타날 것이다. 내가 직접 경험하게 되거나 혹은 다른 이의 경험을 통해 나타날 것이다. 책이나 영화를 통해서 다가올 것이며, 뉴스나 라디오가 보여줄 것이다. 모든 사연과 이야기는 나와 다른 이들이 겪었고, 겪고 있으며, 앞으로 겪을 인간의 삶 그 자체다. 그리고 공항에는 이 수많은 삶들이 뒤엉켜 떠다닌다. 그래서 나는 공항이 좋다. 그 모든 삶을 띄우고 받아내는 거대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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