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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k Jun 02. 2017

[동티모르 이야기] 동티모르의 말들


동티모르의 언어 상황은 매우 복잡하다. 일단 공용어가 두 가지다. 하나는 포르투갈어이고 다른 하나는 테툰어(혹은 테툼어, Tetun 또는 Tetum)다. 그리고 그다지 넓지 않은 영토임에도 지방어가 30여 가지나 있다. 이중 일부는 유사하지만 일부는 서로 소통이 아예 불가능한, 심지어 어족조차 다른 것으로 추정되는 언어들이다. 여기에 30여 년간 인도네시아에 의한 식민 지배로 인해 인도네시아어까지 광범하게 통용되고 있다.


외부에서 보기에는 저조한 사용 인구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어가 사실상 제 1 언어인 것처럼 보인다. 정부기관의 공식 명칭이나 공문 등이 포르투갈어로 되어 있고 국가 역시 포르투갈어로만 부른다(테툰어 가사가 아예 없다). 학교에서도 테툰어 과목과 종교 과목을 제외하곤 포르투갈어로 교육한다. (거의 구비되어 있지 않은) 교과서 역시 포르투갈어로 되어 있다. 실제로 법적으로 포르투갈어가 제 1 언어의 지위를 지니고 있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명백한 것은, 동티모르 정부의 포르투갈어 보급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제 포르투갈어 사용 인구가 매우 적다는 점이다. 실제로 지난 1년간 만났던 동티모르 사람들 중에 포르투갈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포르투갈어가 공용어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수백 년에 걸친 포르투갈 식민 지배에도 불구하고 이 언어를 사용하는 인구가 그렇게 적은 것은 과거 포르투갈 식민 정부의 통치 정책에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포르투갈이 티모르 섬(동티모르 독립국가와 인도네시아령 서티모르 지역)에 진출한 것은 이 지역에서 자생하던 백단목 때문이었다. 당시 티모르 섬 내에는 지역별로 소왕국들이 있어 각자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있었다. 식민 정부가 각 지역에서 백단목을 교역하기 위해서는 통일된 언어가 필요했는데, 이 언어로 테툰어를 보급하게 된 것이다. 더불어 포르투갈 식민 정부는 백단목, 나중에는 커피 수입(수탈)을 위한 최소한의 행정제도만 유지했다. 따라서 체계적인 포르투갈어 교육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테툰어조차도 특산품을 사고 팔기 위해 필요한 수준으로만 보급했다. 다만 가톨릭 교회를 통해서 포르투갈어 교육이 일부 이루어지기는 했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는 테툰어 어휘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테툰어는 굉장히 많은 단어를 포르투갈어에서 차용해왔다. 이를테면 포르투갈어로 교육이라는 의미를 지닌 educação이라는 단어를 알파벳 발음 그대로 풀어내어 edukasaun이라고 쓰는 식이다(물론 이러한 철자법이 확립된 건 2002년 독립정부 수립 이후다). 동사의 경우에는 포르투갈어의 복잡한 인칭/시제 변화를 그대로 쓰지 않고 해 동사의 3인칭 단수 현재형만을 도입해서 쓴다. 포르투갈어로 ‘돕다’라는 뜻을 지닌 ajudar의 3인칭 단수인 ajuda만을 취하여 사용하는 식이다. 그렇다고 모든 포르투갈어 어휘를 테툰식으로 변용해서 쓴다 해도 동티모르인들이 모두 그 뜻을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식민 통치 시기 포르투갈은 원활한 통상을 위한 수준의 테툰어 보급 외에는 별다른 교육을 실시하지 않았다. 따라서 일상과 종교(가톨릭) 영역 외에는 포르투갈어 어휘가 들어올 일이 없었고 체계적 언어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은 탓에 테툰어가 자체적으로 발달할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공용어 하나는 너무 어려워서 사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고, 다른 하나는 너무 초보적이어서 의학, 법률 등과 같은 전문 분야에서 활용할 수 없는 까닭에 그 대체재로 사용하는 언어가 바로 인도네시아어다. 물론 인도네시아어는 동티모르의 공식 언어는 아니다. 그러나 성인 인구 대부분이 인도네시아어를 사용할 줄 알고 있으며, 꼭 인도네시아어 사용자가 아니더라도 숫자, 단위, 일상 표현 다수를 인도네시아어에서 빌려와서 쓰고 있다. 


1970년대 동티모르가 포르투갈에서 독립하자마자 인도네시아가 침공하여 동티모르를 속주로 삼았고 1999년까지 인도네시아의 식민 지배가 계속되었다. 인도네시아 식민지배 시절에는 학교에서 오로지 인도네시아어만 가르쳤다. 이 기간 초등교육기관의 수가 대폭 늘고 보통교육이 시작됨에 따라 인도네시아어가 쉽게 보급될 수 있었던 듯하다. 따라서 1999년 독립 당시 동티모르인 대부분이 인도네시아어를 쓸 수 있었던 데 비해 포르투갈어 사용 인구는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포르투갈어가 공용어로 지정된 것은 독립 투쟁을 이끌었던 사람들이 가톨릭 수도원 등에서 포르투갈어로 교육을 받았고, 독립 과정에서도 포르투갈 정부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사회 곳곳에서 인도네시아어를 쓰는 사람이 많다. 심지어 동티모르 국립대학에서 포르투갈어나 테툰어로 논문을 쓰지 않고 인도네시아어로 쓴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여기까지만 해도 이 작은 나라에 벌써 세 가지 언어가 등장했다. 그런데 동티모르의 언어는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바로 동티모르 내 각 지역에서 쓰이는 토착어들이다. 토착어가 무려 30여 가지나 된다고 한다. 내가 살고 있는 로스팔로스 지역에도 파탈루쿠어(fataluku)라는 토착어가 따로 있다. 어휘부터 어순까지 테툰어와 완전히 다르다. 동티모르의 지방언어는 해당 지역 주민들의 모국어 역할을 하기 때문에 학생들 대부분 파탈루쿠어를 모국어로 습득하고 난 다음에 학교에 입학하면 포르투갈어와 테툰어를 배운다. 최근에는 테툰어 교육을 점점 중요하게 다루는 추세라고 들었다. 지방 토착어가 나라의 크기에 비해 무척 많긴 하지만 그 사실 자체가 동티모르의 언어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비록 공용어인 포르투갈어 사용률은 현저히 낮지만 또 다른 공용어인 테툰어는 비교적 잘 통용되는 편이기 때문이다. 


동티모르의 언어 상황에서 제일 큰 문제는 일상어로 쓰이는 테툰어가 아직은 빈곤한 언어라는 데 있는 듯하다. 어떤 동티모르인이 테툰어만을 쓴다고 해서(예를 들면 수도 딜리 지역 사람들은 테툰어가 모국어다) 그가 오로지 테툰어만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모순 같지만, 이런 식이다. 테툰어로 표현할 수 있는 어휘가 적은 탓에 많은 단어들을 포르투갈어와 인도네시아어에서 빌려오는데, 이게 사람마다 쓰는 방식이 제각각이다. 예를 들면, 테툰어에도 고유의 숫자 체계가 있다. 그러나 아주 큰 숫자는 표현할 수가 없다. 그래서 돈의 액수를 말할 때는 주로 인도네시아어 숫자를 사용하고 적은 액수를 말할 때도 일상에서는 대부분 인도네시아어 숫자로 계산을 한다. 그런데 학교나 관공서에서는 포르투갈어 숫자를 쓸 때가 가끔 있다. 물론 일상적으로는 인도네시아어 숫자를 쓰지만 공식적인 회의를 할 때는 포르투갈어 숫자를 쓰는 편이다. 다른 명사나 동사도 마찬가지다. 어떤 이는 영화를 nonton(인도네시아어)하지만 다른 이는 haree(테툰어)한다. 어떤 이는 tuku tolu(테툰어)에 만나자고 하고 다른 이는 tres(포르투갈어)에 만나자고 하는데 또 다른 이는 jam tiga(인도네시아어)에 만나자고 한다. 이런 대화를 서로 알아들으니 외국인이 볼 때는 오히려 동티모르 사람들이 모두 언어적 천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당장 공용어로서 부족한 테툰어 자체의 어휘를 확장하고 체계를 다듬어 나가야 하는데 그 빈틈을 외국어로 손쉽게 메꾸고 말기 때문에 언어가 확장하고 발전할 여지가 사라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두 차례에 걸친 오랜 식민 지배 탓일까? 난 분명히 그렇다고 생각한다. 

  

사실 한국인에게 이런 복잡한 언어 상황은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나는 테툰어를 배우면서 우리말에서 한자어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높은지 새삼 떠올리곤 했다. 따지고 보면 지방언어가 다양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동티모르의 언어 상황은 한국과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본질적으로 같다고 본다. 한국어에서 한자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테툰어에서 포르투갈어 어휘가 차지하는 비중 이상이다. 동티모르에 있던 어느 한국인이 테툰어의 조악함을 가리켜 자기네 말로 논문도 한 편 못 써내는 나라이니 가난할 만하다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한국에서 순우리말로 된 논문을 단 한 단락이라도 써낼 수 있을지 매우 궁금하다. 한편 일제강점기를 거쳐 우리말에 유입된 일본어 잔재들을 보면 테툰어-인도네시아어 관계와도 비슷하다. 물론 아직 잔존한 일본어 어휘가 우리말에 그렇게 절대적인 비중을 갖고 있진 않다. 그러나 언어에 새겨진 식민 지배의 흔적이라는 점에서 기시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테툰어에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비록 포르투갈 통치 이전 테툰어의 양상을 알 수 있는 기록 문자도 없고 수 백 년의 식민 지배를 겪음으로써 자체적으로 언어를 발달시킬 기회를 얻지도 못했지만, 그리고 현대적 어휘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또다시 포르투갈어와 같은 외래어에 의존할 수밖에 없겠지만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는 테툰어로 법을 만들고 전문 분야의 글을 쓸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더 많은 포르투갈어 혹은 인도네시아어 단어가 들어와 자리 잡을 가능성이 크다. 그와 동시에 30여 개의 지방 언어가 테툰어의 어휘 확장에 중요한 참고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 언어는 변화하기 마련이다. 그것을 앞당기는 것은 동티모르 정부의 과제일 테고. 꼭 그랬으면 좋겠다. 내가 한국어를 활용하고 향유하고 사랑하듯이 동티모르 사람들도 테툰어로 그리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몇 십 년 후 제 나라의 역사를 그대로 닮아 있는 이 언어를 향유하는 자국민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혹시 아는가. 그때엔 테툰어로 된 문학 작품을 전 세계의 언어로 번역하여 읽을 날이 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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