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공항의 인상을 만드나 - 프랑크푸르트 공항과 바르셀로나 공항
사람을 처음 만나면 그렇듯 처음 가보는 공항에도 첫 인상이 있다. 나는 대개 비행기에서 내린 후 게이트 옆 유리창을 통해 활주로 주변 건물과 풍경을 보면서 그 공항의 첫 인상을 얻곤 한다. 싱가포르를 떠난 지 12시간 40분 후 동이 트기 직전 새벽녘에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했고 유리창을 통해 본 활주로는 아직 어두웠다. 프랑크푸르트는 이전에 와본 적이 없다. 독일이란 나라 자체를 처음 와봤다. 내게 다시 한 번 유럽여행을 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래서 몇몇 나라를 선택하여 여행할 수 있다면, 독일은 아마 후순위가 될 것 같다. 프랑크푸르트라는 도시는 생각조차 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나는 독일과 여기 프랑크푸르트라는 도시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그런 내가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와있다. 물론 나는 단순히 환승만 하러 온 것이니 독일에 입국한 적이 없는 건 여전하다. 그럼에도 내게 이 공항의 첫 인상을 논할 자격이 있다면, 프랑크푸르트 공항의 첫인상은 바로 ‘차가움’이다.
항공기 출입구를 벗어나자마자 차가운 공기가 느껴진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도 차갑다. 아직 새벽이라 그럴 것이다. 차가운 날씨, 낮은 온도가 풍기는 독특한 냄새가 있다. 겨울 새벽 공기의 냄새 말이다. 이 냄새는 차라리 촉각에 가깝다. 더운 나라 동티모르에서 1년간 지낸 탓에 지금 프랑크푸르트에서 정말 오랜만에 겨울 냄새를 맡고 있다. 겨울 냄새를 풍기는 찬 공기가 주는 느낌을 좋아한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겨울 냄새가 내 정신의 주요 부품을 새 것으로 교체하는 것만 같다. 나는 겨울 냄새가 정말로 좋다.
그러나 겨울 공기 냄새가 프랑크푸르트 공항의 본질은 아닐 터, 게다가 지금은 겨울도 아닌 4월초이다. 공항 건물 안으로 들어와 외부의 냉기에서 멀어지자 이윽고 눈에 들어온 것은 질서정연한 공항 건물의 배치와 유리창 밖에 줄지어 늘어서 있는 똑같이 생긴 루프트한자 항공기였다. 기종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겉모양이 같은 항공기 수십 대가 터미널 게이트를 따라 늘어서 있었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의 터미널 1은 오로지 루프트한자 소속의 항공기만 이용하는 곳이니 거기서 보이는 항공기의 무늬가 똑같은 건 당연한 일이다. 같은 모양의 항공기들이 늘어선 풍경처럼 공항이 주는 전체적 인상 역시 질서정연하고 딱 맞아떨어졌다. 공항에서 일하는 사람들조차 그래보였다. 체크포인트를 안내하는 직원은 미소도 머금지 않은 채 기계적으로 사람들을 다루고 있었다. 직원뿐만이 아니었다. 이 공항에서 독일어로 말하며 웃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이곳에서 일하고 이곳을 이용하는 사람들마저 공항이 제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일조하고 있었다.
이건 어쩌면 내가 독일과 독일인에게 갖고 있는 편견일 것이다. 나라와 국민들이 차갑다는 이미지 말이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한 이후로 나는 매사를 정확히 그 편견대로만 보았다. 어쩌면 나는 운이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머문 건 새벽녘 한 시간 뿐이었으니 말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공항과 같이 불특정다수가 흘러들어왔다 흘러다가는 곳에서 생면부지의 외국인들이 내게 따뜻함과 친절함을 아낌없이 보여줄 거라 기대하는 것 자체가 글러먹은 생각이다. 심지어 동도 트기 전 새벽이었다. 그들은 원래부터 차갑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피곤했던 것일지 모른다.
편견은 엉뚱한 데서 깨졌다. 어떤 사람이 차가운 인상을 갖고 있으면 우리는 보통 또 다른 편견 하나를 마음대로 만들어낸다. 저 인간은 차가우니까 매사에 정확하고 똑부러질거야, 하는 식으로. 그래서 나 역시 독일의 이미지를 마음대로 만들어냈다. 기술력이 뛰어나고 매사에 정확해서 한 치의 실수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딜리나 발리에서 비행기 연착을 걱정한 적은 있어도 바로 여기서 비행기 이착륙이 지연될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셀로나로 행 비행기에 탑승하여 이륙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 갑자기 기장이 독일어로 무언가를 방송했다. 몇몇 사람들이 일어나 짐을 꺼낸다. 독일어에 이어 영어로 방송이 이어졌다. 나머지 사람들이 짜증을 내며 일어났다. 엔진 결함으로 곧 출발해야 할 비행기가 이륙을 하지 못하게 되는 바람에 승객 모두가 다른 비행기로 갈아타라는 방송이었따. 엔진 결함이라니. 딜리 공항도 아닌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엔진 결함이라니. 생전 만나보지도 못한 독일 엔지니어들에 대한 신뢰가 깨지는 순간이었다. 왜 인상은 그렇게 차가우면서 일은 제대로 못 하니? 바르셀로나가 내 최종 목적지가 아니었기에, 그래서 두 번의 환승을 더 남겨두고 있었기에 행여 다음 비행기를 놓칠까 불안했다. 결국 다른 비행기로 옮겨 타 다른 기장과 다른 승무원들과 함께 바르셀로나로 떠날 수 있었다(신기했던 건 비행기가 바뀌면 기장과 승무원 모두가 교체된다는 점이었다). 다행히 비행 중 엔진 결함은 없었다. 두 시간 가량의 비행 끝에 무사히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불공평하게도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했을 때와는 달리 바르셀로나의 첫인상에는 정오의 햇볕이 함께 했다. 그러므로 바르셀로나 공항의 첫 인상은 모든 면에서 프랑크푸르트와 정반대였다. 착륙 방향 왼쪽에 무성한 듯 우거진 초지와 그 너머 바다 위를 유람하는 요트 몇 척은 여기가 남부유럽이라는 사실을 실감나게 했다. 적당히 기분 좋은 햇볕 그자체가 바로셀로나 공항의 이미지였다. 바르셀로나 공항은 탁 트여있다. 바닷가에 위치한 덕이다. 게이트 어디서든 활주로 너머의 바다와 그 위를 떠다니는 요트를 볼 수 있었다. 이곳에서 프랑크푸르트 공항이 보여주던 정적인 질서와 딱딱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들 역시 여유와 감정이 넘쳤다. 독일에서 근엄한 모습으로 비행기에 올라탔던 승객들마저 구름 위에서 체면을 모두 내던지고 내려온 것 마냥 쉴 새 없이 떠들고 있었다.
무엇이 두 공항의 분위기를 이토록 다르게 만들까? 좀 비약일지 모르지만 이런 생각을 해봤다. 사람들은 왜 프랑크푸르트행 비행기를 탈까? 아마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하여 다른 항공기든 기차든 이용하여 독일의 다른 지역으로 가려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프랑크푸르트가 최종 목적지인 사람들도 관광보다는 사업이나 업무 출장 목적으로 오는 것이 더 많지 않을까 싶다(이것도 순전히 내 편견에 불과할 거다. 난 프랑크푸르트에 대해 전혀 모르니. 그래도 혹은 그래서 그냥 그렇게 생각하련다). 한편 사람들은 왜 바르셀로나행 비행기를 탈까? 그건 무엇보다도 바르셀로나를 가기 위해서다. 오로지 바르셀로나를 가기 위해 바르셀로나 공항에 온다. 말장난 같지만 사실이다. 여긴 다른 곳이 아닌 바르셀로나다. 스페인의 관문으로서도 아니고 오롯이 그자체로 스스로 빛을 내는 곳, 바르셀로나다. 수 백년 째 짓고 있는 성당이 있고 그걸 설계한 천재 건축가가 지은 수많은 건축물들이 있고 그밖에 핫하고 쿨한 것들로 가득 찬 관광지, 바르셀로나다. 이곳에 오면서 들뜨지 않을 사람이 있으랴.
루프트한자 항공사의 거점 공항인 프랑크푸르트는 제 공항에 온 사람들을 다시 다른 공항에 차질 없이 날려 보내는 의무를 성실히 수행해야만 한다. 그래서 차갑고 질서정연하다. 비록 실제로는 차갑고 냉정하지 못한 탓에 엔진 결함이 종종 발생할지언정 특유의 분위기는 어디 가지 않는다. 바르셀로나는 그저 이곳이 목적지인 사람들을 잘 받아내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그 일은 공항이 따로 애쓰지 않아도 바르셀로나의 환상적인 햇살이 알아서 잘 할 것이다. 바르셀로나의 날씨와 풍경, 그리고 무엇보다도 관광지로서 명성이 안겨주는 설렘은 아무리 긴 입국 심사 줄이라도 견뎌내게 한다. 공간 자체가 지닌 정체성의 차이가 공간의 관문인 공항의 분위기를 결정하고 곧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기분도 결정한다. 물론, 애석하게도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다. 나는 바로셀로나에서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없다. 나는 바르셀로나가 목적지인 사람이 아니다. 세 시간 후 다시 보고타로 가는 비행기에 타야 한다. 원래 다섯 시간이었어야 했다. 이게 다 차갑고 냉정하지 못한 독일 엔지니어들이 일으킨 엔진 결함 때문이다. 결국, 그 어떤 편견도 옳지 않다!